뜨개인의 여행

by 김범인

기가 막힌 여행 계획 이야기를 들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시작하여 유럽까지 철도로 횡단을 한다. 중간중간 역에서 내려서 관광도 하고 휴양도 하며 여행을 즐긴다. 열차 안에서 지루한 시간은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 이색적인 분위기들을 느끼며 이겨낸다. 여기까지는 뭐. 나도 늘 여행을 꿈꾸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니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여행을 뜨개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함께 탑승한다면? 여행에 무언가 다른 색깔이 입혀지지 않는가? 나의 가슴에 뜨끈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뜨개 친구인 그분의 이야기로는 시베리아 열차를 탈 때 실과 도안을 잔뜩 들고 타서 열차 안에서 수다와 함께 열심히 뜨개를 하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리며 완성된 옷과 액세서리들을 입고 쓰고 착용하며 여행을 하자고 한다. 다시 열차를 탑승해서 뜨개를 하고 다음 기착지에서 완성된 작품을 착장하고 관광을 한다. 그 말을 듣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에요.' '적금 들면 되나요?' '완벽한 여행 계획'. 나 역시 그 기발한 여행은 언젠가는 꼭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 여행에 나도 동참할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맥주도 끊을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다.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모두 뜨개인이니 열차 안의 분위기가 어떨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여행자들의 손은 실과 바늘을 쥐고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얼굴은 미소 짓고, 입은 쉬지 않고 웃고 떠들지만 자세는 곧다. 일반인에게 힘들고 지루하다고 악명 높은 열차 안의 분위기는 뜨개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토록 원하던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고 아늑한 공간이다. 더군다나 그 자리에서 완성된 작품들은 그 여행에 꼭 필요한 방한복이요, 패션 템이며, 여행 메이트이다. 이동시간조차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효율적이고, 감각적이고, 건실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행 목적지만큼 이동시간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여행이라니...... 시간과 공간과 그 안의 사람과 대화가 아름다운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뜨개 친구 버전 같기도 하다.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이지 않는가?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 계획은 들어본 적 없다.


내 일이 여행과 관련된 일이었을 만큼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현재는 육아로 인해, 그리고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은 아득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평생 자유로운 여행자로 살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뜨개를 시작하고는 그것과 상반된 활동인 여행의 매력을 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이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여전히 나는 여행을 꿈꾸며 산다. 지금 나는 여행과 뜨개의 콜라보를 좋아한다. 요즘의 나의 여행 이야기를 해보겠다. 해외여행은 힘들어졌지만 가족들과 국내여행은 꾸준히 한다.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지를 선택할 때부터 나의 머릿속 한편에는 뜨개 작품 착장과 활용을 위한 시뮬레이션이 진행된다. 여행지에서 입을 옷, 메고 다닐 가방, 각종 뜨개 액세서리들과 여행 소품을 그려본다. 여행지와 계절에 맞는 소장 뜨개 작품이 있는지 기억을 훑는다.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행 출발일까지 뜰 수 있을 프로세스를 구축한다. 그리고 작업을 진행한다. 여행 출발 전날이 되면 여행가방 안에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과 출발일까지 혼심의 힘을 다해 완성한 뜨개 작품을 넣는다. 혹시 다 못 떴어도 괜찮다. 이동시간에 열심히 뜨면 된다. 여행 가방 한 귀퉁이에는 여행 중 틈 날 때마다 뜨개를 할 수 있도록 실과 바늘을 준비한다. 여행지에서는 신경 쓸 일이 많을 수도 있고 시간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으니 복잡한 테크닉이 들어간 작품보다는 간결한 무늬와 쉬운 기법으로 뜨는 작품을 고르도록 한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입을 뜨개옷과 가방 등을 머리맡에 준비해 둔다. 자,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뜨개) 여행 준비는 끝난 것이다.


출발일이 되어 차를 타면 자세를 잡는다. 컵홀더에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넣어두고 다리 위에 뜨개 거리가 담긴 가방을 올린다. 도안은 바로바로 볼 수 있도록 가방에 살짝 끼워두거나 차 문 옆의 수납공간에 끼워둔다. 손은 실과 바늘을 잡고 뜨개를 하고, 눈은 뜨개 중인 편물과 창밖을 번갈아 본다. 입과 귀는 가족들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참여하기 위해 긴장한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나는 뜨개인인 동시에 어린 두 아이를 보살피는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남들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손은 뜨개를 하고 있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야말로 여행의 시작부터 오감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아니, 가족과의 여행과 뜨개 활동의 조화를 위해서 여섯 번째 감각도 열어둔다.


물론 여행지에 도착하면 관광과 휴양을 위해 뜨개는 잠시 접어둔다. 이때는 함께하는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나는 뜨개 못지않게 여행에도 진심이기 때문에 많이 보고 걷고 먹는 데에 집중한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이곳은 다시 못 올 곳인 것 마냥 최선을 다해 여행을 즐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뜨개는 함께하고 있다. 어떻게 함께하냐고? 내가 입은 뜨개옷 또는 들고 있는 뜨개 가방 또는 뜨개모자나 뜨개 액세서리와 함께다. 내가 뜨개를 시작한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몸에서 뜨개 작품이 떠나 있던 적이 거의 없는데 여행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여행지를 배경으로 나는 내 몸에 장착한 뜨개 작품의 사진을 기념으로 찍어둔다. 고성 바닷가에서 입은 로브, 선자령에서 신었던 양말, 강릉 바닷가에서 들었던 가방, 안동에서 썼던 모자... 지난 여행을 생각하면 그곳의 추억을 머금은 뜨개 작품들이 생각난다. 여행지에서 입고 다닌 스웨터야 수두룩하게 많고 날씨가 추워지면 숄이나 양말과 장갑은 입고, 두르고, 신고, 끼고, 늘 챙겨가니 내게 여행을 담은 뜨개 작품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여행가방에 뜨개 거리를 늘 챙겨가지만 가족들과 여행을 하면 사실은 뜨개를 많이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어려서 낮동안은 계속 챙겨줘야 하기도 하고,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이 여유로운 휴양보다는 활동적인 관광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뜨개 할 틈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행 중 아직 가족들이 깨지 않아 조용한 이른 아침시간은 내가 뜨개를 즐기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의 고요함에 잠겨 뜨개에 집중한다. 소란스러움이 예상된 하루가 시작되기 전, 나의 마음을 정돈하는 평화로운 시간이다. 이 시간의 행복함을 위해서 뜨개 거리를 그렇게도 바리바리 싸가는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은 여행에 하면서도 뜨개를 놓지 않는 내게 약간의 불만을 표출한다. 여행과 가족들에게만 집중해달라는 것이다. 여행가방을 쌀 때 이야기한다. "짐도 많은데 뜨개 거리를 그렇게나 많이 가져가야 해?" 여행지에서도 이야기한다. "뜨개 거리는 놓고 그냥 즐겨." "여행 와서도 뜨개에만 정신 팔지 마." 내게 이것은 핵심을 놓친 가족들의 얕은 충고로만 느껴진다. 나는 이야기한다. "뜨개는 먹고 자는 것처럼 내게 자연스러운 생존의 기본 요소야. 여행 가서도 먹고 자야 하는 것처럼 뜨개도 살려면 해야 하거든!" 여행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여행이 삶의 한 부분이라면 그 삶 속에 뜨개는 그냥 그렇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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