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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하쿠나 마타타


 많은 도전을 하고, 경험을 쌓고, 이야깃거리들을 두 팔에 가득 채운채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대로, 주위 상황도 거진 그대로였다. 단지 바뀐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내 마음가짐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자신을 조금 더 믿어주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래도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조금 더 생겼달까.


요즘같이 너도나도 여행을 많이 떠나는 시대에, 세계일주라는 여행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행을 통해 드넓은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왔을 뿐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아우디를 타고 있었다. 나는 옆자리에 타서 "새끼, 돈 많이 벌었네." 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심 부럽기도 하고, 안정돼 보이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친구들이 열심히 일을 하며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었다면, 나는 현재를 살기 위해 더 노력했다. 그때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더 방랑했다. 


그렇게 지내온지 4년, 내가 가지게 된 것이라곤 여러 가지 경험과, 스토리뿐이었다.






네팔의 지진을 경험하기 전, 나는 24살에 혼자 200만 원을 가지고 83일간 유럽여행을 한 적이 있다. 런던의 비싼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주택가를 두드리며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냐고 물을 때면 미친놈 취급당하며 쫓겨나기 일수였다. 그럼 노숙을 하러 갔다. 로마의 기차역과 아테네의 버스 정류장, 피사와 바르셀로나의 공항, 부다페스트의 공원, 론다의 허름한 쉘터에서도 뻥 뚫린 하늘을 보며 잠을 잤다. 추운 줄도 모르고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할지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면 파리나 두브로브니크에 포진된 호스텔에 잡일을 할 테니 숙식을 제공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그때마다 게스트하우스를 관리하거나 사람들을 여행지로 인솔하는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설거지는 도맡아 했고 집을 보수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잘 몰라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 어쩌다 운이 좋아 통역 일을 맡게 되면 짭짤한 용돈을 벌기도 했다. 


하루를 2유로짜리 빵으로 채운 날도 많았다. 배고프고 추운 생활이었지만 무엇이 그리도 좋았던지, 데살로니키의 드넓은 바다와 체르마트의 마텐 호른을 볼 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느라 하루 12시간을 걸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더욱 세상을 돌아다녔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몇 달 후 인도를 갔다. 인도는 모든 것을 초월한 나라인 것 같았지만 그 카오스 속에서도 고요히 빛나던 태풍의 눈이 존재했다. 인도 여행은 세상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증폭시켰고 더 넓은 세상과 사람을 만나고 싶은 갈망에 불을 지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떠났다. 또 다른 세계여행의 시작이었다.


에베레스트의 칼라파타르를 향해 산을 오를 때 지진이 났고 부상을 당해 고립이 됐다. 다행히 한국에서 온 팀을 만나 구조를 당했다. 몇 개월이 흘러 치과 시험을 보러 간 캐나다에선 도착한 날 수갑을 차고 추방을 당했다. 한국에 돌아와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다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 각국의 병원과 학교, 치의학 협회들을 돌며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돌아다녔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몰타, 헝가리 등 여러 국가의 치의와 교수들을 만나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긴 여행 끝에 나를 받아줄 곳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유럽 대륙을 떠나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몰타에서 일하던 치과의사에게 아프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남아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국면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며칠 뒤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 종단을 하던 중 말라위에서 만난 최선교사님과 콩고 의사의 도움으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시험을 합격하고 국립병원에서 1년간 환자들을 돌봤다. 주말에는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치료도 해주고 집도의를 도와 에이즈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수술했다. 많은 분들의 후원을 받아 도서관을 지었고, 4명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밤늦게 돌아다니다 칼 맞고 저세상으로 갈 뻔했으며 말라리아에 2번이나 걸려 또 한 번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나는 운이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1년 3개월 간의 봉사를 마친 후 남아공으로 내려갔다. 다음 스텝은 멕시코부터 캐나다까지 걸어서 종단하는 Pacific crest trail이었다. 피씨티에 도전하기 전 쿠바 여행을 하고 싶어 쿠바로 날아갔지만 비자비용을 위해 남겨둔 350불을 요하네스버그에서 도난당했다. 현금이 없었고 카드는 불통이었다. 쿠바 이민국은 나를 감옥에 처넣었다. 언제 나오게 될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3일 동안 감옥에 가둬놓고 자유를 빼앗았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에 나온 드레퓌스가 된 느낌이었다. 멀끔했던 캐나다 유치장과는 다른 음침한 쿠바 감옥에서 질질 짜며 벽에 수기를 남겼다. 군인들은 총을 가지고 우리를 감시했다. 하루 중 햇볕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주어졌다. 감옥에서 풀린 날 나는 자유가 주는 햇살이 이렇게나 눈부신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이렇게나 달콤한 것이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했던 자유라는 이름의 행복은 당연했기에 늘 무시당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감옥에서 나와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은 깜짝 선물로 두부를 사주었다. 두부를 우물우물 씹으며 '출소 축하합니다'라는 듣도보도 못한 노래를 순대국밥 집에서 들었다. 식당 아줌마도, 옆 테이블에 앉은 회사원들도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Pct 준비를 대강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에선 지인들의 소개로 알게 된 블루리본을 만났다. 블루리본의 형, 누나들은 나를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챙겨주었다. 호기롭게 Pct를 시작했고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걷는 도중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던 날도 있었고, 멘탈이 무너져 한 발자국도 더 걷기 싫었던 날도 있었다. 포기해야 할 수만 가지 이유를 찾던 내게 하이커들은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버텼다. 내 모습은 점점 초췌해졌다. 말라져 갔고, 거울 속의 내가 어색해져만 갔다.


6개월의 시간은 빠른 듯- 빠르지 않은 듯 흘렀고,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에 도착했다. 4300km의 대장정이 끝나고, 나를 쫓아낸 캐나다에 들어가 며칠을 지내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엘에이로 돌아가 블루리본 사람들을 만나 감사인사를 전하고 귀국행 비행에 올랐다.


다시 돌아온 한국은 어색했다. 귓가에 들리는 한국말과 전광판들이 모든 여행을 끝마치고 귀국한 나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했다. 이제 긴 여행은 끝이 났다.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고, 미래를 위해 여행에서 배운 여러 가지 것들을 적용해야 할 때였다. 지금껏 거쳐왔던 수많은 국가와 도시들이 눈 앞을 스쳐갔다. 지난 4년간의 여행은 행복했지만, 운이 없던 일이 더 많았다. 운이 좋지 않아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배운 하쿠나 마타타를 외쳤다. 마치 이 단어를 외치면 모든 걱정 근심이 깨끗하게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캐나다로 시작했던 내 여행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캐나다에서 끝을 맺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캐나다에서 쫓겨났던 내가 걸어서 다시 캐나다로 들어갈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안한 삶이기에 뒤를 돌아보면 더 재밌는 게 인생일까. 내가 여행하며 수도 없이 외쳤던 말,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일까? 좋은 인생이 있고 나쁜 인생이 있는가? 완생의 삶이란 존재하는가? 모르겠다. 당장의 하루 이틀 후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제한된 시선에서 벗어나 그저 하루하루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힘쓰는 인생을 살고 싶다. 세상을 조금 돌아보니, 나만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름의 고충을 안고 살고 있더라. 고민과 불안을 껴안은 채, 그럼에도 서로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고 있더라. 그래서 나도,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



Oregon coast tr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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