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도 없던 리투아니아 한인 치대생들을 만나고 기분만 불쾌해졌지만 그들이 그런다고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 했다.
다시 빌뉴스 대학 치과 Department로 찾아가 현지인, 외국인 치대생들을 만나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졸업 후에 어떻게 할 계획인지, 졸업을 하면 자격증을 딸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아니면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이 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주변 환경은 어떤지, 각각의 나라와 비교했을 때 살만 한 것 같은지 등을 물어봤다. 리투아니아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현지 언어 시험을 봐야 한다. 빌뉴스의 치대 수업들은 영어로 진행이 되지만 우리가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울 때 ESL 클래스를 따로 듣는 것처럼 이곳에도 그런 언어 수업이 따로 있었다. 졸업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일을 하기 위해선 현지 언어 또한 일정 레벨 수준이 되어야 했다.
이곳에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터키에서 온 중동 친구들도 많았고 다른 EU 국가에서 온 친구들도 많았다. 해외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우리 나라 만큼 대학 입학이 힘든 나라가 많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입학은 쉬웠지만 졸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고, 내가 다녔던 대학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도태되고, 떨어져 나가는 수가 어마어마했고 입학생의 30프로 정도만이 무사히 졸업을 했다. 며칠에 걸쳐 학생들과 교수를 만나 이야기 하고 형과 P가 머물고 있는 우테나라는 도시에 갔다. 그들이 머물고있는 아파트는 좁았고 허름했다. 둘은 그 근처에 있는 전문대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목표는 내가 다녀왔던 빌뉴스 치대로 다시 편입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학점을 더 취득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이렇게 멀리 떨어진 시골 자취방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취방 옆집에는 매일 대마 파티를 하는 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주 술에 취해 소리를 질렀고, 복도를 나다녔다. 대마 냄새가 복도에 흥건했다. 나는 형과 P에게 여기서 학점을 따면 확실히 편입을 할 수 있냐, 어디서 얻은 정보냐고 물었고, 둘은 어물쩡 대답을 했다. 수업은 자주 캔슬됐고 그럴 때마다 집에서 유튜브나 게임을 하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우린 많은 얘기를 했고 내 생각에 그런 학교에서 더 머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둘도 벌써 그곳에 있던 시간이 1년 이상이었고 그런 생활에 지쳐있었다. 나는 캐나다와 빌뉴스에서의 일을 들려주었다. 앞으로 나는 여러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적당한 나라가 있으면 그곳에 정착할 것이다. 둘도 결정을 하라. 제대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곳에 남아 이 생활을 지속하던지, 아니면 나랑 같이 가던지. 그것도 아니면 귀국을 하던지.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후 형은 나와 함께 가기로 했고, P는 조금 더 생각해 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우리가 빌뉴스가 아닌 '카우나스'에 있는 대학으로 한번 더 가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 후에 결정을 한다고 했다. 어찌 됐든 둘의 의견도 이곳에 머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결정을 한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집 계약을 마무리하고, 짐을 쌌다. 그리곤 카우나스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카우나스에 있는 lsmu 대학에 들러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교수들을 만나고 학생들을 만났다. 그곳의 교수들은 조금 더 호의적이었다. 한 교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요는 이것이었다. '왜 애초에 자격증을 주지도 않는 나라로 갔느냐?' 나도 그 현실이 너무 짜증 나고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있겠나. 시간은 이렇게 지났고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들은 나 같은 케이스를 신기해했다. 차라리 형과 P의 케이스는 그나마 괜찮았다. 편입을 하면 됐으니까. 반면 나는 이미 졸업을 했는데 왜 이곳에 굳이 다시 와서 편입을 하냐는 것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캐나다 이야기까지 흘러 들어갔고, 결국 마지막 질문은 위에 있는 저 질문으로 끝이 났다. '그러게 거길 왜 갔어?'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나도 내가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다면 그때의 나를 뜯어말렸겠지.... 후.
형과 P는 편입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시기상으로 맞지 않으니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다음 연도에 다시 와서 편입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나는 자기들도 모르겠단다. 이런 케이스가 지금까지 있질 않았어서 헤드와 논의를 해봐야 한단다. 많은 이야기를 더 했고,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지금은 편입이 불가하니 내년까지 죽치고 앉아서 기다릴 바에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게 답이었다. 우리는 다시 결정해야 했다. 나는 밑의 나라 폴란드로 간다고 했고, 형도 나와 같이 가기로 했다. P는 귀국해서 내년에 있을 편입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형과 나는 폴란드로 가는 야간 버스를 예매했고, P는 귀국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깜깜했다. 그러나 그 깜깜함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 발을 내밀고, 가보기로 정했다. 칭기즈칸의 말이 생각났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그 깜깜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리투아니아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인터넷으로 유럽 몇몇 나라의 치대 시스템에 대해 알아봤다.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나라들의 시스템을 보고 방문할 학교 리스트를 정했다. 각 나라의 치대 교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페이스북을 찾아 메시지를 보내 궁금한 점을 물었고, 학교와 Ministry of Education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 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탔다. 폴란드 치대는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그럼에도 폴란드를 들렸던 건 꼭 방문해보고 싶었던 장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어릴 적 읽었던 '안네의 일기'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들과 시대적 맥락을 같이하는 유대인 수용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이곳에 들리기 위해 바르샤바로 출발했고, 며칠을 머물다 다시 크라쿠프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치과 자격증을 찾다 말고 뜬금없이 아우슈비츠라니. 전혀 연관성은 없지만 인간들이 저지른 뼈아픈 역사의 잔해를 생생하게 목도하는 것이 당시에는 내 목적보다 중요한 듯 느껴졌다. 아우슈비츠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오시비엥침'이라는 마을에 있었는데, 오시비엥침 마을에 있는 수용소이고, 독일어로 하면 아우슈비츠라고 해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수용소 정문에 붙어있는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적힌 문구를 볼 때부터 마음은 무거웠다. 천천히 수용소 안을 둘러본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눅눅한 침묵만이 이곳에 온 모든 이의 시선으로 내려앉는다. 처참한 이 결과물들이 모두 한 민족을 향한 증오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인류의 퇴보를 의미했다. 인간들은 예로부터 싸우고 전쟁해왔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살아남는 자가 강자인 세계. 그렇게 역사는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잔혹한 역사의 잔재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인간이란 존재에 의문을 품게 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런 물음 앞에 설 때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나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나와 같은 인간이란 종, 즉 타인에 대해 사유할 때 타인을 향한, 타인과의 관계를 향한 이해가 더욱 깊어진다. '존재'에 대한 고찰 없이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욕망을 자꾸 건드린다면, 이 욕망은 점점 불어나는 검은 거머리처럼 비대해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가진 것이 별로 없을 때 거머리는 거기 있다고 알아차릴 수 조차 없을 만큼 작다. 내 몸집이 조금씩 커지고 가진 것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 거머리는 슬그머니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조금씩 밖으로 나온 거머리는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더 많은 피를 빨아들이라고 속삭인다. 더 많은 것을 빨아들이면 빨아들일수록 우리의 힘과 능력, 영향력 또한 더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배가 빵빵하게 부를 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집이 커졌을 때는 스스로를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조차 잊어버렸을 만큼 비대한 거머리에게 잡아먹힌 상태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집이 작으면 작은대로, 커지면 커진 대로 끝없이 사유해야 한다. 울프의 말처럼 사유의 낚싯줄을 올바른 곳에 깊게 내리는 것만이 비대한 거머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나만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 타인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자연의 존재에 대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히틀러는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의 중점에 서있는 인물이지만 이 범죄를 혼자만의 힘으로 저지르지 않았다. 히틀러 유겐트를 동원하고 조직한 발두어 폰 쉬라흐, 히틀러의 비서 역할을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히틀러를 구워삶을 정도로 큰 권력을 누렸던 마르틴 보어만, 수용소로 실려온 수감자들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강제 노역에 동원할 지를 결정하고 수감자들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은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 같은 인간들과 인류 최악의 범죄를 만들어냈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테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결국 아이히만 그 자신도 게르만족의 우월성에 취해 타인에 대한 어떠한 고찰도 없이 살상을 도운 범법자에 불과했다. 그가 아렌트가 말한 대로 '파괴적 이념과 반인간적 정치에 물든 악마적 인간이 아니라 다만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인습적 관례를 따른 ‘명령 수행자’ 내지 ‘거대한 기계의 한 톱니바퀴’에 불과한 인간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항상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한겨레 21 - 1046호,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결국 유대인들에 대한 이해는 조금도 없는, 자신들의 '종'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거만한 얼간이에 불과했다.
수용소를 지나다가 발견한 유리창 안에는 수십만 켤레의 신발이 들어있다. 다른 유리창 안에는 수십, 수백만 개의 머리칼이 잘려져 있다. 또다시 수십만 개의 안경, 가방, 옷가지들이 각각의 유리창 안에 담겨있다. 그들의 영혼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유리창 안의 비좁은 공간에서 우리를 노려본다. 천천히 걸어 나와 잘린 머리카락을 다시 머리에 붙이고, 시력에 맞는 안경을 뒤적뒤적 찾아 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올 때 신었던 신발과 가방을 메고 우리에게 물을 것만 같다.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느냐고. 어린아이 사이즈의 신발부터, 커다란 남성의 신발까지 사이즈는 다양했다. 인간의 잔인함은 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스실로 들어갔다. 하얗고 얇게 벅벅 그어진 손톱자국들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어느 관광객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용소에 오기 전 봤던 홀로코스트 영상이 생각났다. 유대인들이 이 작은 가스실에 무더기로 밀려든다. 공포는 그들이 마시는 공기 안에 녹아있다. 그들은 두려움을 마시기 시작한다. 불안에 찬 눈빛, 떨리는 입술, 팔과 다리. 나치는 환풍구를 열어 독가스를 주입한다.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른다. 소리.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지르는 절절한 소리. 죽음이 그들 머리 위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영상을 보고 와서일까, 이들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들의 흐느낌은 하나둘씩 더해진다. 흐느끼지 않는 이들 또한 우리 모두의 슬픔에 동참한다. 묵념하고, 바라본다. 처절한 인류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바라보고, 인식해야 한다. 역사의 아픔으로 사라진 그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우리는 인식함으로 동참하고, 기억한다. '내가 네가 되는 일은 없지만, 내가 네 아픔을 아는 일은 있다.' 이서희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깊은 연민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사랑의 모호하고 때로는 굴곡 많은 지형과 달리, 연민은 가장 정확한 자리를 집어 아픈 사람을 품어낸다. 아픔을 즉각적으로 아는 것만큼 인간의 결속을 단단하게 만드는 건 없다. 내가 네가 되는 일은 없지만, 내가 네 아픔을 아는 일은 있다. 그 있음을 다시 내 아픔으로 끌어안아 함께 쉴 곳을 만드는 게 연민이다. 비록 한 뼘의 휴식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