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무작정 대학교를 찾아가 친구를 만들어 놀았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열기를 받는 학생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삶의 여유가 넘쳐 흘렀다. 공강 시간에 해변가로 달려가 수영을 하거나 태닝을 하고 돌아오는 건 기본이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해변도로를 달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 풍경이 생물학이라던가, 경제학이라던가 하는 전공을 배우러 온 학생들 같지 않고 마치 다이빙을 배우러 온 학생들 같았다. 내가 만난 친구들은 입고있는 차림새부터가 나시와 반바지, 쪼리와 선글라스가 기본으로 장착되어있었다. 그들의 한쪽 팔엔 백팩, 다른 팔엔 스케이드 보드가 있었다.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이 잠시 머물기에는 좋지만 무척이나 심심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졸업 후 몇년간은 이곳에서 일을 하지만 경력을 쌓은 뒤에는 영국으로 가서 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삶의 풍경이 여유로웠기에 살기에도 좋을 것 같았지만, 지구상의 어떤 나라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안전하기는 한국 못지않은 나라이기는 하나 열정, 패기, 경쟁, 쟁취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나라이기 때문에 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에게 휴양지로 둘러쌓인 이 나라는 잠시 거쳐가는 나라에 불과했다.
이곳에 사는 많은 이들은 좋게 말하면 여유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느리고 게을렀다. 노는 것만큼은 이 친구들과 평화롭게 잘 놀았지만, 나는 행정 절차를 밟고 있었기에 한없이 느리기만 한 이 시스템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교육부로 갔을 때 내 서류는 한 스텝 더 나아가있긴 했다. 차근차근 프로세스를 밟고 서류상의 절차가 완료되면 자격증 발급이 되고 대학병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동안 일을 해야한다. 그런 후에 영국이나 유럽내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서류상의 절차가 완료되기 까지는 조금 오래 걸리는 듯 했다. 교육부 담당자는 내게, 이 절차는 오래 걸리는 프로세스니, 두달 후에 다시 몰타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래도 절차가 진행이 되고 있고 두달이라는 시간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조금씩 길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두달의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낼름 유럽 저가항공의 비행편을 찾아봤고, 30유로에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편이 있었다.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탈리아로 날아가기로 했다.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는 가본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엔 친퀘테레와 피사를 가볼 작정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정했다. 약 한달간 다른 유럽의 나라들을 거쳐 여행한 후 남은 한달엔 순례자의 길을 걸을 계획을 짰다. 몰타의 자격증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이왕 들리는 나라들의 자격증 시스템 또한 알아보고 싶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계획에 집어 넣었다. 다음 날 나는 로마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으로 날라갔다. 이탈리아에서의 일정은 로마 - 피렌체 - 친퀘테레 - 피사였다.
피사에서 시간을 보낸 후 공항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이 다음 날 새벽에 있었다. 공항은 최고의 노숙 장소다. 공항의자에서 침낭을 피고 누울 때면 그렇게 안락하고 편안할 수가 없다. 공항에 도착하고 머리를 누일 적당한 의자를 찾는데 이 의자들이 한줄로 연결이 되어있는 의자가 아니라 한칸씩 팔걸이로 나뉘어져 있는 의자밖에 없었다. 각국의 공항마다 다른 컨셉의 의자들을 가져다 놓긴 하지만 이런 의자를 만나면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자던가, 구석으로 들어가 공항 바닥에 누워 자야 한다. 나는 공항 전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봤지만 마땅히 몸을 누일 곳이 없었다. 공항 자체가 작기도 했다. 할 수 없이 그나마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폈다. 자리를 피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과 양치를 했다. 노숙을 할 때 하더라도 청결은 필수다. 로션을 바르고 깔아놓은 침낭 안으로 쏙 들어가 누웠다. 약 30분 정도 선잠이 들 무렵 공항직원이 내게 찾아왔다.
- 미안한데, 우리 공항은 12시에 문을 닫을거야. 여기서 자면 안되고 밖으로 나가야 해.
- 응? 공항이 문을 닫는다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항노숙을 하기도 했지만 공항이 문을 닫는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어 몇번이고 재차 물었다. 지금 밖에 나가면 너무 추워. 공항이 문을 닫는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 조금만 있으면 비행 시간이란말이야. 이런 말 저런 말 다 갖다 붙이며 사정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미안. 나가줘, 였다. 약 4시간 후면 탑승을 해야 하는데 이 4시간 동안 문을 닫는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의 룰에 따를 수 밖에.
10월의 피사는 쌀쌀했다. 나는 다시 노숙을 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공항 게이트는 닫히고 불이 꺼졌다. 새벽 비행이 있는 다른 탑승객들 또한 나 처럼 쫓겨났다. 공항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마침 돌로 된 벤치가 보였고 그곳에 침낭을 깔았다. 피사의 밤 하늘을 보며 다시 침낭에 들어갔다. 작은 마을의 공항은 문을 닫기도 하는구나. 이내 잠에 빠져들었고, 약 3시간 후 일어나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탑승준비를 했다. 그리고 몇시간 후 비가 내리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https://theplanetd.com/anne-frank-house-museum-amsterdam/
암스테르담에 도착해 여독을 푼 뒤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했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 수밖에 없던 현실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당시 안네는 13세의 나이로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돼주었던 일기장에게 '키티'라는 이름을 붙여 글을 써 내려간다. 안네는 우리가 흔히 일기장에 쓰듯 자신의 생각을 그저 떠오르는 대로 쓴 것이 아니라 '키티'라는 구체적인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자신의 심경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은신처 생활의 고단함,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성장기 신체적 변화, 자기 신체와 타인의 신체에 대한 궁금증, 식료품 조달의 어려움, 은신처 생활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등 이 모든 일에 대해 안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오로지 키티를 통해 글을 적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안네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4년 이들의 은신처는 발각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다. 안네가 죽고 한 달 뒤 수용소는 해방되고, 안네의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만이 살아 나와 안네의 일기를 세상에 공개한다.
https://www.public-transport-holland.com/2018/03/05/anne-frank-house/
안네의 집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티켓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로 유명한데 나는 감사하게도 같은 숙박객 친구의 도움으로 금방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네의 집에 도착했을 땐 엄청난 인파의 사람이 몰려 줄을 서고 있었고, 나는 제일 뒤쪽 꼬리에 가 줄을 섰다. 그 시간을 이용해 다시 한번 안네의 일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지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가 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그만큼 안네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컸기에 다들 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그만큼 우리도 더 젖었다. 내가 안네의 집에 들어갈 때쯤에는 많은 사람들이 젖어있었다. 나는 혼자여서 우산을 사러 갈 수도 없었다고 치지만 누군가와 같이 온 몇몇 사람들은 대체 왜 우산을 사지 않는 거지?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네덜란드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나라라(실제로 이곳에 있는 2주 동안 거의 10일간은 비 옴) 사람들이 우산을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와도 그냥 맞는다고 한다.
안네의 집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있다. 조용히 감상만 하고 나오는 것인데, 안네와 가족들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있다.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흑백 영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책을 읽고 실제 배경이 된 그곳에 들어가니 느낌이 새롭다.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에 갔을 때처럼 착잡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게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이 세상이 잠시 힘든 시기를 거치는 거라고. 나랑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 지나갈 거야.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모든 고난이 끝나겠지.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긴 해도, 나는 사람들 본성이 선하다는 걸 믿어."
"In spite of everything I still believe that people are really good at heart. I simply can`t build up my hopes on a foundation consisting of confusion, misery and death."
"As long as this exists, this sunshine and this cloudless sky, and as long as I can enjoy it, how can I be sad?"
"People can tell you to keep your mouth shut, but it doesn`t stop you having your own opinion"
"I`ve found that there is always some beauty left - in nature, sunshine, freedom, in yourself; these can all help you"
며칠 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미국을 비롯한 온 나라가 인종차별에 대해 들썩일 때 아프리카계 프랑스, 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 인스타그램에 미술가 겸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뱅크시가 올려놓은 글을 캡처해서 올려놓았는데,
"At first I thought I should just shut up and listen to black people about this issue.
But why would I do that? It`s not their problem. It`s mine.
People of colour are being failed by the system. The white system. Like a broken pipe flooding the aprtment of the people living downstairs. This faulty system is making their life a misery, but it`s not their job to fix it. They can`t - no one will let them in the apartment upstairs.
This is a white problem. And if white people don`t fix it, someone will have to come upstairs and kick the door in."
이 글을 리포스트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소중한 친구들이 울먹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신들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한 느낌을 받는다며, 가본 적도 없는 아프리카 땅으로 돌아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내 나라는 그 나라가 아닌데, 왜 내가 내 나라라고 느끼는 이 나라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했다. 그들의 친구들은 다 포기하고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이라도 편하게 돌아가자고. 포기하면 편하다고. 인정하면 편하다고.
나는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고 말했다. 내가 너의 모든 상황과 느끼는 감정들을 온전히 다 알 순 없겠지만 너희들이 받는 아픔과 상처를 같이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리포스트 같은 일밖엔 없지만 나 또한 이런 문제에 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러니까 너희들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알량한 특권의식을 포기해야 할 사람들, 썩어빠진 마인드를 바꿔야 할 사람은 너희들이 아니라 저 가해자들이라고. 사회는 분명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진보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테지만, 사람들의 의식이나 행동은 분명 변화하고 있다고. 가끔 나타나는 미친놈들이 우리의 의식을, 우리의 진보를, 우리의 문명을 퇴화시키는 행동을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사회악과 불평등에 맞서 용기를 냈고, 목소리를 냈고 진보를 이뤄왔다고. 그러니 이제 바통을 받은 너, 나,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 하나 바꾸기도 힘든데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 어려운 일이 불가능한 일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것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나도 언젠가는 기득권의 세력에 편승해 누군가를 쉽게 죽이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뱅크시의 말은 울림을 준다. It`s not their problem. It`s mine.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몰아가서 비난하기는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군가에게 차별 섞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행동을 하며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았는지. 그랬다면 반성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