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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https://www.coloradocountrylife.coop/tour-el-camino-de-santiago/

 


네덜란드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파리로 건너왔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약 900km의 여정으로 약 30~40일 동안 오로지 두발로 프랑스 남부인 생장부터 피레네 산맥을 통해 스페인 서북부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길이다. 산티아고 도착 후에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와 '묵시아'라는 마을까지 약 60km를 더 걷기도 한다. 까미노를 걷게 되면 필그림(Philgrim) 패스포트를 가지고 각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순례자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에 묵을 수 있다. 알베르게에는 순례길을 걸으러 온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 서로의 음식과 와인을 나눠 먹고 기타를 튕기며 파티를 연다. 순례길을 걸으며 앞서니 뒷서니 만나는 모든 순례자들은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말을 던진다. 하루 약 8시간~10시간 정도를 걷는데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던 나도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땐 내게 이 길을 추천한 친구를 죽^^이고 싶었다. 청바지니 아이패드니 하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모두 들어있는 배낭을 짊어지고 하루 27km 내지는 30km를 걷는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체 내가 왜 이 길을 걸으러 온 건지 후회막심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걷다 보면 이 길이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단순 몇 번 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이 있다. 어느새 돌아보면 나는 이 길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순례길에서 제일 힘든 구간은 첫날이었다. 산을 즐겨 타지 않는 한 인간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걸쳐있는 높다란 산맥을 하나 넘다 보니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보고 여기 좋다고 한 @#@##$ 누구야,, 당장 나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할 때는 어느 정도 각을 잡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산을 올랐으니 그나마 정신적으론 버틸만했다. 하지만 순례길은 분명 평평한 평지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만 믿고 온 건데 첫날부터 오지게 올라가는 오르막이 원망스러웠다. 언제까지야? 언제 다와? 걸음을 같이 하는 다른 순례자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냐고오오를 외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왔다. 내리막 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이 때 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음
여긴 어디 나는 뉴규
아직 한참 남았쥬



첫날의 도착지는 '론 세스 바이어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나무에 적힌 숙소 표지판의 이름을 본 순간 유레카를 외쳤다.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꼈달까. 발엔 온통 물집이 다 잡히고 몸의 근육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똑바로 걷지를 못했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숙소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어찌나 감사하던지. 어그적 어그적 걸으며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이곳이 바로 천국 아니던가. 그렇게 나의 까미노는 시작되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에 알이 지독하게 배겨있었다. 숙소에 묵었던 모든 순레자들의 걸음걸이가 똥 싼 기저귀라도 찬 듯 다 똑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똑바로 좀 걸으라고. 너나 똑바로 걸어. 하하하. 


첫날 그렇게 개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음 날부터는 난이도가 많이 수월해졌다. 피레네 같은 산맥을 올라가는 날은 많지 않았다. 적당히 오르고 적당히 내려갔다. 평지도 꽤 많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건 걸으며 만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른 여행지에서도 여행자들과 만나 노는 것이 재밌었지만 이곳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고통을 느끼며, 같은 길을 걸으니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같이 걷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던 아일랜드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있었다.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이들이었기에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일정을 늦출 순 없기에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팜플로나라는 대도시의 밤거리를 산책하던 중 그 선생님들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는데 길거리에서 오만 소리를 지르고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어디 갔었냐며, 걱정했다며, 잘 걷고 있냐며 등등등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그 선선한 밤공기, 그 순간의 색감,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형형한 아드레날린, 기쁨을 주체할 수 없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우리의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 여행을 하며 커다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 어느 공간은 아주 잘 그린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어느 공간은 물통을 엎어 그림이 완전히 망가졌다. 잘 그린 그림이든, 망가진 그림이든 나는 여행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때로는 검은색, 황토색, 회색. 이 모든 색감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내 삶의 궤적이다. 시간이 지나 그림들을 꺼내 볼 때면 달달한 초콜릿이 입 안에 녹아들듯 이미 그 기억 안에 푹 녹아들어 간 내가 있다. 



팜플로나의 밤거리

https://theculturetrip.com/europe/spain/articles/the-best-coffee-shops-in-pamplona/



우리는 한참을 거리 한복판에 서서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어댔다. 실컷 떠들다가 이제 뭘 할 거냐는 말에 선생님들은 클럽에 간다고 했다. 조인 어스! 라며 내 팔짱을 낀다. 60대 노부부 선생님도 계셨는데 같이 클럽을 갔다. 나이는 중요치 않다! 노부부께서는 춤을 정말로 잘 추셨고 커플 댄스를 추며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았다. 나는 진지충이기 때문에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다른 선생님들과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점들에 대한 열렬한 대화를 나누었다. 시끌벅적한 밤은 지나가고,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페이스대로 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도,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여행은 그런 것이고, 삶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 차가운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그것.  






까미노에서 썼던 일기를 들여다보면 버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걷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만큼 그곳에서 내가 지녀야 했던 것은 최신형 아이패드나 값비싼 시계 따위가 아니라 목마를 때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한 병과 소량의 점심, 같이 걸을 수 있는 친구,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텍스트에는 기분 좋은 느낌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미화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에 나는 당시에도 무한히 행복했었고, 그 글을 읽는 지금도 무한의 미소가 퍼져 나온다. 


길에서 만난 각양 각국의 사람들은 삶의 여유가 넘쳐 보였다. 과연 현실로 돌아가도 똑같을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인들은 조금 달랐다. 나 같은 장기 여행자를 빼고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듯한 일정을 가지고 있었고, 계획을 짜 놓고 이곳에 왔다. 순례길을 끝마치는 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며 오늘 하루는 몇 킬로를 걸어야 하고 오늘은 반드시 그 마을에 도착해야 했다. 일정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조급해했다. 어떤 이는 무리하게 더 걷느라 무릎에 무리가 와 완주하지 못한 채 버스를 타고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어떤 이는 만날 때마다 걸음이 늦어 귀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어떨지를 걱정했다. 


이 길에서 만난 폴란드 출신 대학생은 자신의 고향인 바르샤바(폴란드의 수도)에서부터 약 2900km나 되는 길을 걸어오며 나를 만났다. 산티아고가 최종 목적지라고 했다. 텐트에서 먹고 자고 하며 하루에 5유로 정도씩만 쓰며 걸어오는 생활을 5개월째 하고 있다고 했다. 곧 끝이 보인다고 기뻐했다. 또 다른 미국 친구 카를로스는 이 길을 걷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일부러 넉넉잡아 두 달을 비워 놓았다고 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걷는 걸음도, 일정도 여유로웠다. 그밖에 만난 헝가리의 대학생 친구들과 칠레에서 온 호세에게서 느꼈던 특별함 또한 그들의 태도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면 자주 외국인 친구들의 이런 여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많은 부분을 부러워했다. 이들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다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은 여행지이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기 때문에 여유가 넘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만난 한국 친구들은 왜 일정을 넉넉하게 잡지 않았을까. 똑같은 여행지인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여유로운 걸음을 걷고 누군가는 조급함에 떠밀려 길을 걷는 것일까. 잡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면 외국 친구들에겐 그들만의 상황이 없었을까.


특히나 대학생 친구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 것들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고자 온 여행인데, 이곳에 와서도 앞날에 대한 불안의 씨앗이 꺼지지 않는 듯 보였다.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친구들은 열심히 배우고 돈을 벌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 이런 길이나 걷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친구가 생각난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문화는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다. 학창 시절부터 우리는 비교를 당해왔다. 학교에서, 또 집에서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는 선생님, 부모님이 계셨다. 더군다나 전 세계에서 한국만 쓰고 있는 '나이' 문화 때문에 이 나이면 무엇을 해야 하고, 이 나이면 무엇을 했어야 하고, 이 나이면 무엇을 이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정해져 있다. 군대에서 만난 23살 선임이 30살이던 내게 하던 말이 있다. 나도 형처럼 여행을 가고 싶지만 너무 늦은 것 같아. 복학도 해야 하고 취업준비도 해야 하고.


응? 23살이 늦었다고?


나중에 적겠지만 까미노를 걸은지 2년 후 나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미서부를 걸어서 종단하는 PCT(Pacific Crest Trail)에 도전을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70대의 영국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더 늦으면 정말 못할 것 같아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지금이라도 도전을 해보고 싶어 이 길에 왔다고 말을 했다. 당시 내 도전을 보고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던 40대 형은 내게, 나는 너무 늦었어~ 이 나이에 그런 걸 어떻게 하냐? 네 나이였으면 당장 했지~라는 말을 했다. 40대 형과 70대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누구는 나이라는 숫자에 갇혀 '도전'을 할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누구는 나이라는 숫자를 초월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민다. 40대 형이 내 나이였으면 이런 도전을 했을까? 글쎄다. 30대에는 30대 나름의 준비하고 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23살의 대학생 친구가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도전하기에 '늦었다'라고 말하는 사회. 20대도 늦었고, 30대도 늦었고, 40대도 늦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언제가 빠른 것일까? 10대는 빠른가? 10대는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 그럼 10세 이하가 빠른 것인가?



Philgrim

https://followthecamino.com/en/blog/the-camino-de-santiago-hits-record-numbers-in-2019/



여유로움을 느끼러 여행지에 왔는데, 오히려 여행지에서 더 바빠지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에펠탑에서 사진 찍고 이동하고, 콜로세움에서 사진 찍고 이동하고, 빅벤 앞에서 사진 찍고 이동하는 우리가 있다. 정혜윤 작가의 글, "좋은 책은 그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 좋은 책은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시 또는 한 편의 글-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책을 여행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좋은 여행은 다녀오기 전과 후를 달라지게 만든다. 겉핥기식의 여행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행을 할 때 우리가 얻어가는 것은 에펠탑 인증샷만이 아니라 더 깊은 내면의 성찰일 수 있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자신을 살피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며, 나 중심적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 사회를 바라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고 만들어가는 것. 여행을 하며 배울 수 있었던 건 사실 이런 것들이 전부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적이라 말하고,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의 소리라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치들을 놓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부조리함에 패배하고, 자본이 신이 되어버린 이 고장 난 사회를 그대로 답습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이 경쟁사회에서 잠시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을 탐험하고, 책에 들어있는 텍스트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우리의 정신을 마구마구 휘젓고 그 정리되지 않은 복잡함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고, 다시 주워 담아 재정립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 시간이 많아질 때 우리는 단단한 내면을 쌓을 수 있고,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로울 수 있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문명의 이기만을 쫓는 여행이 아닌 깊은 정신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






혼타나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11월 중순에 접어들어 그런지 날씨도 점점 추워진다. 샤워를 하고 근처 마켓에서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사 왔다. 널따란 갈색 테이블 위에 순례자들끼리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각자 사 온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왜소한 몸집에 푹 파여 들어간 볼, 퀭한 눈, 젖은 머리의 남자는 휠체어에 앉아 열심히 통조림을 따고 있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곁눈질로 그를 힐끔 거리며 쳐다봤다. 통조림 따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자를 자세히 보니 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 괜찮으면 내가 해줄까?라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내게 통조림을 내어주었다. 통조림을 따주고 말을 걸었지만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불어로 뭐라고 했지만 말은 어눌했고, 우리 중 불어를 할 줄 아는 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바디랭귀지로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해,라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즐겁게 수다를 떨며 웃음꽃을 피웠지만 그는 휠체어 위에 가만히 앉아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친구나 동료는 없는 듯 보였고 우리는 그가 알베르게에서 일을 하거나, 이 마을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주민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은 30km 이상 걸어야 했기에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 문 앞에 서서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제 본 휠체어를 탄 남자가 알베르게에서 나온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남자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휠체어에는 커다란 가방과 침낭으로 보이는 물건이 있었다. 설마 순례자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 코스라 휠체어를 탄 상태로 오르기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 남자는 끙끙대며 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휠체어를 잡아주며 밀어줄까?라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밀며 올라가는데 나도 힘이 빠졌다. 어디까지 밀어줘야 하는 거지? 말이 통하질 않으니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때 뒤에서 아리안이 내게 말을 걸었다. 


- 헤이 데이빗~ 굿모닝! 뭐해?

- 어! 잘됐다. 아리안 너 불어 할 줄 알지? 통역 좀 해줘~


캐나다의 퀘벡 출신인 아리안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아리안과 그 남자는 불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몇 마디 하고 나니 아리안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에는 어느새 다른 순례자 친구들도 모이기 시작했고, 모두 아리안의 통역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한껏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검은 뿔테를 쓴 아리안의 표정은 굳어졌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떡 벌렸다가,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며 혀를 차기도 했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레잇을 연발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 이 친구 이름은 안토니인데 지금 까미노를 걷는 중 이래. 


우리 모두는 놀라며 물었다. 


- 휠체어를 타고 까미노를 걷는다고?

- 응 프랑스 남부 지방인 툴루즈부터 시작해서 약 700km를 휠체어를 타고 왔고, 정말 힘들 땐 히치하이킹을 해서 이곳까지 왔대.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휠체어를 타고 까미노를 걷는다라. 말도 어눌하고 손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이 남자가 까미노를 걷는다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못했다. 안토니는 우리가 믿지 못하는 눈치이자 자신의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었다. 여권에는 각 마을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말도 안 돼.


우리 모두가 그 여권을 보며 외쳤던 말이다. 이 친구 정말 fighter야. 대단해. 모두가 입 모아 말한다. 우리는 그가 이 길을 걷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첫째, 나는 크리스천이고,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이 길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둘째, 나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도 이 길을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셋째, 어떤 사람이든 어떤 것을 포기치 않고 꿋꿋이 도전한다면 결국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안토니는 23살이고, 가족도 없다고 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휠체어로 지날 수 없는 언덕이나 산 길이 많아 보통 차도로 걷곤 하는데 그때마다 경찰에게 붙잡혀 어딜 가는지, 이 길은 위험하다며 다시 돌아가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어떨 때는 앰뷸런스를 불러 안토니의 건강을 체크해주기도 했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경찰들의 숱한 말에도 불구하고 까미노를 완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팔과 다리가 온전치 못한 이 남자가,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경찰에게 붙들릴 때면 어눌한 말로 까미노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했을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족도 없이 홀로 내버려진 듯한 이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했을 지난한 그 시간들을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 남자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우리는 말을 잃은 상태로 멍하니 안토니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그는 휠체어를 밀며 20km를 간다고 했다. 그를 언덕 위까지 밀어주고, 우리 또한 각자의 길에 나섰다. 안토니를 만난 친구들 모두 각각의 깊은 상념에 잠겨 오늘 길을 걸을 것이다. 수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안토니는 또 어떤 도전을 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복되지 않고 그 환경을 초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나가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어떠한 도전을 하고 있는가?


안토니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하기까지 총 31일,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를 거쳐 묵시아까지 가는데 총 33일이 걸려 까미노를 마쳤다.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날의 마음은 아마 이 길을 걷는 모든 이가 동일할 것이다. 두근두근 거리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마음속에선 벌써부터 소리 벗고 팬티를 지르는 목소리들이 마구마구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끝이야!!! 끝이라고!!!!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돼!!!!


드디어 산티아고로 입성하는 날, 우리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동동 떠다녔다. 가벼운 발걸음을 따라 목청에선 돌고래 사운드가 터져 나왔고 너도나도 기쁨의 몸짓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저 멀리 산티아고 성당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는 더 흥분된 기분으로, 더 빨리 걸었다. 도착했을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잠시 후 마을 안으로 들어왔고, 성당 앞에 펼쳐진 광장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성당 앞에 섰을 때 멈췄다. 등에 지고 있던 가방부터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성당 앞 광장에 대자로 누웠다. 같이 걷던 이들도 하나둘씩 옆에 눕기 시작했다. 하늘을 바라봤다. 파랬다. 하늘이 이렇게 파랬구나.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지난 한 달 동안 고생한 기억이 스쳐갔다. 처음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 때 잡힌 여러 개의 물집부터, 온몸을 때리던 근육통,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포기하고 싶은 마음, 도전하고 싶은 마음, 성취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생각들을 접어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찾아온 평화를 누렸다. 얼굴을 살살 간지럽히는 바람을 느끼고 누워있자니 세상 행복할 수가 없다. 


하나둘씩 친구들이 도착한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방을 내 던지고 눕는 일이다. 순례자가 아닌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웃으며 따봉을 치켜세우고 축하한다고 말해준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길에서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이야기를 나눠봤던 사람이든 아니든, 완주를 했든 짧은 거리를 걸었든, 같은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고통을 즐기고 누린 순례자들이라면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입은 귀에 걸렸고 마음은 부풀어올랐다. 부풀어 오르던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이탈리아 친구 제피는 사진을 찍는 내내 감격의 소리를 지른다. 


사진을 다 찍고 저녁에 있을 파티 장소를 정하는데 브라질에서 온 자나가 성당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다시 소리를 지르며 환영한다. 축하해 자나. 드디어 왔어. 얼른 와. 여기가 산티아고 성당이야. 자나는 트레킹 폴 대신 사용했던 나무막대를 의지하며 성당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때마침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가랑비를 맞으며 우는 자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고개를 높이 들고 성당을 바라보며 나무막대에 몸을 의지한 채 감격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흘린다. 어깨가 들썩이고, 우리는 모두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를 안아주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특별했던 순간으로 꼽히는 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마지막에 서있었다.



피니스테라
피니스테라 & 묵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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