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항해시대는 언제 끝날 것인가. 루피는 갈수록 동료를 모으는데 난 하나뿐이던 동료마저 떠나 혼자 몰타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루마니아에서의 개고생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라고 생각을 해야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선 아무런 소득 없이 보낸 이 시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나마 몰타란 섬나라는 휴양을 하기에 최적의 나라였고,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피로감을 지중해 한가운데 누워 씻어내버리고 싶었다.
https://www.cntraveller.in/story/malta-unexpected-melting-pot-mediterranean/
몰타는 옛 유적들이 살아 숨 쉬는 나라였다. 갈색풍의 엔틱 한 건물 사이로 불어오는 간질간질한 바람과 파도소리는 루마니아를 완전히 잊게 해 주었다. 나는 짐을 풀자마자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해변가로 달려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모랫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소리를 상상하고 공기를 느껴본다. 생생히 살아서 넘실대는 자연을 더 강하게 느끼고 싶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지나온 여정과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한다. 이 항해는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뿌옇게 보이는 항로 사이로 조그마한 빛의 입자라도 하나 볼 수 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빛의 입자는커녕 검은 연기들이 바다로부터 뭉게뭉게 피어나 시야를 가린다.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 이런 일 따위는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에 따른 감정 노동과 물리적 고단함이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수평선의 끝에 도달하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옛 유럽 사람들의 생각처럼 나 또한 내 앞에 펼쳐진 여정의 끝이 낭떠러지일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누구의 말도, 상황도 아닌,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두려움이었고, 나는 몰타에서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아마 한국에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며칠 후 몰타의 대학을 찾아갔다.
학생들에게 물어 치의학과를 찾아냈고 이내 치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인종은 다양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남아공, 보츠와나, 호주, 리투아니아, 헝가리 등지에서 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수많은 학생들을 잡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국제 치대 학부에 관한 인터뷰를 하는 기자라도 된다는 듯이. 학생들은 흔쾌히 응해주었고, 졸업 후 영국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내 케이스의 이야기를 듣더니 교육청에 가보라고 한다. 아마 될 걸? 이 나라는 그런 문제에 있어 꽤 너그러운 나라일 거야. 한 번 가봐. 나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대학 병원을 가고, 교수들을 만났다. 그들 또한 친절했고 내게 교육청에 한번 가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빛의 입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https://www.nytimes.com/2013/12/08/travel/beneath-maltas-beauty-a-tangled-history.html
숙소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긍정적인 신호가 많이 보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졸업한 간호사들 또한 이곳으로 와서 자격증 프로세스를 밟고, 일을 한다고 했다. 다음날 당장 짐을 꾸려 교육청을 찾아가 상담 신청을 했다. 두 시간 정도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상담사는 영국 발음을 내는 몰타인이었다. 몰타가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미국 영어보다는 영국 영어에 가까웠다. 나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제일 기대했던 답변을 기다렸다. 내 증명서로, 이곳에서 일을 할 수가 있는지. 그는 물론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장이 몸 안에서 흥분하기 시작한다. 혈류가 갑자기 빠르게 돌기 시작하는 것만 같다.
"할.수.있.다.고?"
"응. 할 수 있지. 영어권에서 졸업했잖아. 영어도 되고. 서류 절차 밟으면 돼. 좀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 된다는 것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몇 번이고 재차 물었지만 그는 한 번만 더 물으면 내 서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됐다. 됐어. 찾았어.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는 내 감동 세레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류나 빨리 작성하라고 했다.
서류 작성을 하고 곱게 잘 접어 갈색 봉투에 넣고 제출했다. 소정의 돈을 내고 언제 다시 오면 되냐고 물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기쁜 마음으로 알겠다고 하고 교육청을 나선다. 정말 되는 것일까? 찾은 것일까? 이 나라는 나를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만감이 교차했고,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막상 일이 잘 진행되니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https://www.telegraph.co.uk/travel/destinations/europe/malta/articles/malta-attractions/
https://www.dreamyachtcharter.com/mojito-cocktail-recipes/
나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온 나라에 평화와 여유가 찍혀있는 이 나라에서의 삶을 생각했다. 환자를 돌보다 쉬는 날이면 멋진 바닷가에서 요트를 타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상상, 파아란 파라솔 밑에 여자 친구와 함께 누워 모히또에서 몰타 한잔을 말하며 꺄르르 웃어대는 그런 상상. 아-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찬란하게 빛났다. 푸른 먹물이 넘실대는 지중해 앞에서 2유로짜리 피자빵을 먹으며 Lost stars의 가사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몰타에서의 휴양이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숙박객들과 모여 블루라군을 갔다. 태양은 쨍쨍하게 우리의 살갗을 태웠다. 달궈진 몸을 바다에 빠트린다. 차갑다. 차고 시원하다. 소프트볼을 가지고 수구를 한다. 너도 나도 웃고, 소리를 지른다. 공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 이윽고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다. 기력이 다 빠진 채 해변가로 기어 나온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모래사장에 눕는다. 평온한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귀에서는 바닷소리가 짠내음과 함께 울려 퍼진다. 배가 고프다. 호스텔 주인인 맥스가 해온 요리를 먹는다. 메뉴는 토끼고기. 토끼? 으웩. 그러나 맛은 일품이다. 뼈가 많긴 했지만. 밥을 먹고 파라솔 밑에 누워있다 보면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취해 선잠이 든다. 소나무 가지로 코를 간지럽히는 친구들의 장난에 잠이 깨고 다시 바다로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https://www.flickr.com/photos/65683071@N04/7976584662/
밤에는 루프탑 파티가 있다. 커다란 검은색 스피커에서 짱짱한 음악이 터져 나온다. 각자의 손엔 모히또가, 진토닉이, 럼콕이 들려있다. 모두 각자의 잔을 가지고 400년 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위에서 파티를 즐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공상에 빠질 때가 많다. 과거를 살피기도 하고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해먹에 흔들흔들 누워 다시금 이 여정을 복기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음소거 처리되고 내 속의 공상만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정신을 지배한다. 나는 이런 시간을 좋아한다. 번잡 속의 고요. 혼란 속의 평온. 태풍의 눈과 같은 시간. 이런 시간은 나를 마주한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다. 여행은 때때로 이런 시간을 선물해준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적요한 이 시간이 없다면 깊은 사유의 낚싯줄을 내릴 수 없다.
Virginia Woolf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여성의 어떠한 권리도 인정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울프의 이 말은 위대하다. 위대하고도 슬프다. 그러나 이 말은 당대의 여성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문장이다.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때 우리는 깊어진다. 그러나 흐름의 표면은 단단히 얼어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표면을 깨는 망치질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흐름 속에 들어가 더 깊어질 수 있다. 이 행위에는 단어들이 필요하다.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단어의 문을 열어보지 않고, 문장을 먹지 않는다. 문장에 담겨있는 사유의 넓이가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키는데, 문장의 깊이가 얼어붙은 흐름의 표면을 철저히 부수는데, 우리는 그런 행위를 거부한다. 우리는 깊고 넓은 문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속에서 낚싯줄에 걸린 문장들이 내 정신을 마음껏 휘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사유할 때 우리의 존재는 확장된다. 그 확장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언어의 세계가 끝나는 곳에는 존재의 세계가 끝난다고 말하는 니체의 말은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표현할 언어가 결여되었을 때 그 상황을 더 이상 정확히 고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아니, 일찍이 언어의 세계가 끝나는 곳에는 존재의 세계가 끝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니체, '아침놀'
나는 어느새 빠진 몽상 속에서 현실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홀짝홀짝 마시던 모히또가 뇌 속의 해마를 건드린다. 흔들거리는 해먹은 내 헤롱헤롱 한 상태를 받아줄 최적의 장소였다. 곧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모히또에 취한 눈꺼풀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그때 프랑스에서 온 아들린이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나를 깨운다.
- 일어나!
- 어! 어.. 무슨 일이야? 깜빡 잠들뻔했네 하하
-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이리 와 봐.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볼 것이 있어!!
고등학생 여자아이인 아들린의 아버지는 외교관이다. 자신도 국제학교에 다니며 나중에 외교관이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들린은 자신과 같이 여행 온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준다. 여자 아이 2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내게 심각하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얼른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앉았고 그들의 질문은 시작됐다.
- 이거 엄청 민감한 걸 수도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 정말 궁금해서 그래.
- 어, 뭔데 그래
- 우리가 구글 기사에서 봤는데... (속닥속닥)
싸우스 코리안들의 거기가 세계에서 제일 작대!!
그거 진짜야?응?!
응??? 이건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얜 또 왜 이렇게 신난건데???
- ???????? 뭐라고? 누가 그래?
- 구글에 나와있는 통계자료야 푸하하하!! 찾아봐 찾아봐. 거기 나와있어 하하하핳
나는 문제의 그 통계를 바로 찾아봤다. 그 통계 최하위 칸에는 정말로 싸우스 코리안이라고 당당히 적혀있었다. 그 위에 노쓰 코리안이 있었고, 두 레벨 위가 재팬, 차이나는 조금 더 위에 있었다. 1,2등은 세네갈이었는지, 코트디부아르였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 야! 이거 다 뻥이야! 지들이 2500만 싸우스 코리안 남정네들 거기를 다 봤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통계 내고 있네. 이거 명백한 레이시즘이야! (성희롱도 아닌 레이시즘)
- 푸하하하하하 화내는 거 보니 진짠가 봐!!! 하긴(속닥속닥) 아시아인들이 좀 작다고 듣긴했어(소곤소곤)
- 진짜 어이가 없다. 보여줄 수도 없고 참!!!"
아들린과 친구들은 소파에 누워 큰 소리로 웃는다. 우스갯소리로 놀리려고 한 말이다만 자존심이 몹시 상한다. 어떤 놈이 대체 그런 통계를 낸 거야?! 나는 절대 그렇지 않.. 여기까지 말하겠다. 아무튼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파티를 즐겼다. 모두들 흥이 넘쳤다. 몰타라서 흥이 넘치는 건지, 호스텔에 있는 자쿠지가 좋아서 흥이 넘치는 건지, 오늘 다녀온 블루라군이 너무 좋아서 흥이 넘치는 건지는 모른다. 다만 모두 웃통을 까고, 비키니를 입고 알코올이 담긴 유리잔을 손에 든 채 축배를 든다. 마치 해적들이 새로운 항해를 나서기 전 럼주를 가득 따라 마시는 듯이. 나는 우선 즐기기로 했다. 가지고 온 상황과 문제들은 잠시 옆에 제쳐놓고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