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쿠레슈티에 도착한 날은 금요일이었다. 루마니아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다. 아니 어쩌면 클루지 나포카에 들어섰을 때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말에는 교육부, 보건복지부, 학교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기에 이틀을 하릴없이 쉬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아침 일찍 교육부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많았고, 우린 대기해야 했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3시간이 지났고 12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점심시간이라며 사람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우리도 점심을 먹고 왔다. 그런 후 또다시 대기. 사람들이 느린 건지 시스템이 느린 건지 무척이나 오래 기다렸다. 직원들의 자리에선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받는 이가 없었다. 아니 왜 아무도 전화를 안 받아?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자초지종 설명을 하며 클루지 나포카의 대학에서 이쪽으로 가보라고 했다고 했다. 내 말은 듣던 직원은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 그걸 왜 여기서 처리해?"
- 음? 음.. 교육부.. 니까? 그리고 그쪽 대학 행정담당 직원이 이곳으로 가보라고 했으니까..?
- (웃으며) 여기는 그런 문제를 떠맡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 줄 서있는 사람들 봤지? 우린 엄청 바빠. 너의 이슈는 아마 다시 학교로 가서 물어봐야 할 거야. 여긴 아니야.
- (당황) 아니 학교에서 여기로 가라고 했는데... 그럼 보건복지부는 어때?
- 글쎄, 거기도 아닐 텐데. 모르겠다. 한번 가봐. 근데 내 생각엔 학교로 가야 해. 버스타고 좀 가면 '이야시'라는 학교가 있어. 그쪽 치대가 유명해. 거기로 한번 가봐.
- 아... 알았어. 고마워.
슬슬 열이 뻗쳐 올랐다. 누구를 향한 분노도 아니었고 그냥 이 상황 자체에 열이 받았다. 나는 전화를 잠시 쓸 수 있냐고 물었고, 보건복지부와 이야시 대학에 전화를 걸었다.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내가 아까 이곳에서 본 풍경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벨은 울리는데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풍경이 눈에 선했다.
교육부에서 나와 보건복지부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미 오후 4시가 다 된 상황이었고 지금 가봤자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쳐도 문을 닫을게 뻔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걸었다. 시티뱅크로 가서 돈을 뽑고 그 옆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이 스타벅스는 루마니아에 있는 동안 아마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일 거다.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와이파이 거지였다. 그만큼 부쿠레슈티에는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인터넷을 조금 쓰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갔다. 학교로 다시 가라고? 이런 %$%^#. 불길한 느낌은 항상 적중했다.
다음 날, 보건복지부로 향했다. 살다 살다 루마니아의 교육부와 보건복지부를 갈 줄이야. 다행히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 나도 보건복지부로 오는 건 조금 쌩뚱맞다 생각했다. 이런 문제가 보건이나 복지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했지만 학교도 아니고, 교육부도 아니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나 잡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복도를 걸어가던 직원을 잡고 물었고, 이 직원은 어리둥절하며 다른 직원을 불러줬다. 루마니아어로 뭐라고 하더니 그 직원 또한 다른 직원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의외로 잘 풀리는 것 같은 상황에 기분이 살짝쿵 좋아졌다. 혹시나, 의외로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다 싶어 나를 맞이한 세 번째 직원에게 열과 성을 다해 내 상황을 설명했다. 캐나다에서의 일과 리투아니아, 헝가리, 클루지 나포카, 교육부에서 나누던 대화들. 내가 어떻게 이 나라의 보건복지부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가 지은 표정의 의미를 알 순 없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 거리며 깊게 숙고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혹시.. 아는게 있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 알아?
- 음.. 아니 미안. 잘 모르겠네. 근데 그건 아무래도 학교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긴 아니야.
역시는 역시였다. 그럼 그렇지.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 상에 있을까. 직원에게 혹시 이런 문제에 대해 알만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그는 다른 직원을 찾아 물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그대로였다. 형과 나는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아무 말없이 떠돌이 개처럼 하늘을 보며 걸었다. 한숨은 나오고 앞 길은 보이지 않는데 나는 갈 곳이 없고. 여기도 아니란 말인가. 그럼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아보기로 했다. 교육부에서 말한 '이야시'라는 대학으로 한번 더 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야시 대학은 부쿠레슈티에서 동북쪽으로 9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다. 루트 한번 기가 막히는 구만. 클루지 나포카 - 부쿠레슈티 - 이야시는 각각 9시간 코스로 이루어진 버뮤다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야시에서 이야기가 잘 된다면 모르겠지만 또 한 번 안된다면 그다음은 어쩌지? 다시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야 하나? 으아아아. 루마니아를 죽이고 싶었다. 필리핀을 죽이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빠진 나를 죽이고 싶었다.
결국 다시 한번 지루한 9시간 버스를 타고 이야시에 도착했다. 이젠 해탈한 듯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숙소에 가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학교에 갔다. 다시 한번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교수를 찾아갔다. 그 대학의 교수는 나를 과 헤드에게로 데려갔다. 헤드는 우리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그 따스함이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따스함과는 별개로 이 문제가 과연 이곳에서 풀리느냐 안 풀리느냐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헤드는 최대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따로 상담시간까지 만들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형의 케이스는 편입이 가능하지만 루마니아 현지 언어가 되어야 나중에 자격증을 따고 일을 할 수 있다고 결론이 났고, 나 또한 그 전과 마찬가지로 응? 하는 표정이 나왔다. 그걸 왜 여기서 해결하냐는 듯이, 내게 교육부로 다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클루지 나포카에선 교육부로 가보라고 했고,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선 다시 학교로 가보라고 했다며 이 곳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다시 교육부로 가라고 한다면, 나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오- 이 가련한 인생이여- 한 편의 우울한 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고 나는 곧 세체니 강물에 몸을 던져 죽어버릴 비련한 소설의 주인공 같은 처지가 되었다.
다시 교육부로 가라고? 여기서 처리하는 법을 모르겠다고? 여기 관할이 아니라고? 다시 부쿠레슈티로 가라고? 이런 답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전화도 안 받아, 이메일 답장도 안와, 연락할 수단이 도저히 없어서 거치적거리는 캐리어와 함께 이곳으로 장장 9시간의 버스를 타고 도착했는데, 다시 돌아가라고?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 아... 아. 난 내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왜 필리핀으로 갔을까. 왜 거기서 치대를 다녔을까. 그때로 돌아가 나를 만난다면 뚝배기를 잡고 뺨을 때리며 정신 차려!!!! 당장 독일이든 캐나다든 남아공으로 떠나버려!!!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정말 미치고 팔짱 뛰는 일이기 때문에,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당시 받았던 열과 분노가 강하게 올라오는 것이다. 대체 왜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는 거야. 그럼 누가 아는 거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문득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그 구절이 생각났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사진출처 - Google image
나는 과연 새인가? 이 단단한 치의학의 알을 깨기 위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쪼아대고 투쟁하는 하나의 새인가? 그렇다면 나를 번번이 골탕 먹이는 이 세계는 무엇인가? 내가 파괴해야 하는 세계인 것인가? 이 세계를 뚫는다면, 이 세계를 부셔버릴 수 있다면 새로운 전사로 거듭날 수 있는가? 아- 그러나, 이 세계란 얼마나 단단한가. 얼마나 견고한가! 아무리 깨 보려고 쪼아대도, 아무리 파괴하려고 부딪혀봐도 깨지지 않는 이 철옹성은 얼마나 더 큰 집념과 투지를 필요로 하는가! 나는 결국 하나의 알을 깨지 못했다.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지 못해 비참하게 시들어가는 새끼 조류에 불과했다. 아브락사스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는 패잔병에 불과했다. 온몸의 털이 다 빠진 내게 다시 알을 깰 수 있는 힘이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깨지지 않는 알 속에 주저앉아 이따위 곳에 날 집어넣은 운명을 저주하며 욕짓거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다. 결국 이야시 대학에서도 나는 환영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이야시 대학의 문제도, 루마니아의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대학의 문제도 아닐 것이며 헝가리 세멜바이스 대학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문제란 무엇인가? 내 케이스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나 같은 케이스는 세계 어딜 찾아봐도 없을 테니, 대학들과 기관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와 같이 졸업한 이란 친구는 졸업 후 자신의 나라로 가 국가고시를 보고 치과를 열었다. 나와 같이 졸업한 미국 친구들 또한 국가고시를 패스하고, 인턴생활을 하는 친구와, 일찌감치 치과에 들어가 페이닥터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나와 같이 졸업한 캐나다 친구도, 레바논 친구도, 이집트와 필리핀 친구들도 졸업 후 각자의 나라에서 치과의사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반면 나는 한국에서 8420km나 떨어진 이야시라는 대학에서 한번 더 퇴짜를 맞고 다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였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의 추방, 아니 치과 공부를 시작한 것 자체가 미스 판단이지는 않았을까? 머리 끝까지 열이 차오른다. 그러나 이 열을 분출할 곳은 어느 곳도 없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고, 멍청하고, 미련한 바보 새끼, 병신 새끼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http://nassauweekly.com/white-noise/road-asphalt-rain-night-lights-light-street-bokeh-close-up/
부쿠레슈티로 돌아오는 버스 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도시는 형형 색깔의 빛으로 물들었다. 거무죽죽한 옷을 걸친 절망은 버스 곳곳을 파고들었다. 버스 의자에, 의자에 붙은 손잡이에, 버스 에어컨에, 버스 서랍장 모든 곳에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절망에게 잡아먹혀 버린 걸지도 몰랐다. 버스 곳곳에 절망이 파고든 것이 아니라 내 목구멍을 먼저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기도와 후두를 먼저 갉아먹고 척추를 타고 내려와 흉곽과 폐, 심장을 차례대로 점령하고 그 밑의 간, 위, 장을 삼켜버렸는지도 몰랐다. 내 망막에 맺힌 모든 세계는 어두움과 절망이었다. 눈에 비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럼에도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다채로움으로 빛났다. 내 세계는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불과 몇 미터 앞에 놓인 저 세계는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밤을 달리는 이 버스도 그 아이러니를 따라 달리는 듯했다.
부쿠레슈티에 다시 도착한 날은 목요일 오후였다. 벌써 희망은 놓은 지 오래였지만 마지막으로 교육부를 한번 더 가볼 셈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교육부로 향했지만 문은 닫혀있었다. 목요일 12시 이후에는 일을 안 한다고 하고, 금요일도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루한 이 회색도시에서 목, 금, 토, 일을 거쳐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인 것이다. 이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스타벅스에 앉아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몇몇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은 그만했으면 많이 해봤으니 이제 돌아오라고 했다. 포기하고 그냥 돌아와. 어차피 안되네 뭘. 충분히 노력했어. 친구들이 말한 대로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절대 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일까?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는 이런 일을 하는 건 멍청한 일인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 그래 어쩔 수 없었어,라고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몰랐다. 뭐가 맞는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몹시 분통이 터지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돌아간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이 짓거리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형의 결정을 존중했다. 나 또한 이런 머저리 같은 행동을 당장 멈추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형은 다음 날 비행기를 예약했고 바로 귀국했다. 나는 형에게 수고했다 말하고, 형은 내게 더 수고하라고 말했다. 입국심사대로 들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했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도 쓸쓸했다.
홀로 남은 나는 부쿠레슈티 시내 한복판에 있는 스타벅스에 앉아 다음 일정을 짜고 있었다. 다음 나라는 불가리아였지만 그 나라 또한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와 별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기에 다른 목적지를 찾았지만 도저히 어딜 가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 주변을 산책하고, 여행객들과 수다를 떨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한 번은 숙소에서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각자 루마니아에 온 이유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다들 여행의 목적으로, 비즈니스의 목적으로, 디지털 노마드의 삶으로 이곳에 모인 숙박객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와 비슷한 이유를 가진 사람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1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기가 참 쪽팔렸다. 술을 조금 마신 상태로 막상 내 차례가 오니 두서 없는 말들이 술술 기어 나왔다. 스토리는 졸업 후 네팔 지진의 이야기부터, 캐나다에서의 추방, 한국 귀국, 리투아니아 - 폴란드 - 헝가리 - 루마니아의 대학, 교육부, 보건복지부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줄줄이 흘러나왔다. 나는 한껏 흥분해서 이 나라의 형편없는 시스템이나 캐나다 입국심사대의 쪼잔함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웃긴 건 모든 숙박객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WOW, THEN WHAT?, HOW DID YOU DO THAT?, JESUS!, HOLY CRAP!, THAT'S BULLSHIT! 과 같은 감탄사 아닌 감탄사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들의 리액션은 내 한탄에 부스터를 달아줬고, 나는 결국 YEAH, THAT'S WHY I'M HERE BROOO, 를 마지막으로 이 스토리의 끝을 장식했다. 그들로써는 이런 케이스의 여행 이야기가 신기했던 것 같다.
질문은 이곳저곳 양쪽에서 쑤시고 들어왔고 급기야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한 친구가 '그래서 너 치대를 졸업한 건 맞지?' 그럼 나 여기 이빨이 무진장 아픈데, 이것 좀 봐줄 수 있어?라고 말하며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안에 있던 숙박객들 전부가(라고 해봤자 5명) 내 앞에 입을 벌리고 줄을 서게 되었다. 딱히 아픈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심심해서, 술을 많이 먹어서, 초콜릿을 많이 먹어서, 양치를 잘 안 해서 와 같은 이유로 진료를 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호스텔의 소파 위에 앉아 진짜 병원이라도 되는 양 그들의 치아를 봐주기 시작했다. 중국계 미국인의 치아 하나는 심하게 썩어있었고 육안으로 봐도 당장 신경치료를 하러 가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런 통증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무려 1시간 이상 붙잡고 이 치아, 저 치아들에 대해 물었다. 나는 질문에 답을 해주다가 내일 또 교육부로 가야 한다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경험을 무더기로 하는 것도 참 재주다 싶은 밤이었다.
시시콜콜한 밤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월요일이 됐고, 당당한 걸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교육부로 쳐들어갔다. 그때 나와 상담을 했던 직원에게 이야시 대학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털어놓고, 거기도 아니라고 하니 대체 뭐냐고, 괜히 시간 쓰고 돈만 낭비한 거 아니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고 조용조용, (그때는 그래도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이 사람들 탓할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 직원은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며 나를 더 높은 직급에 있는 사람에게 데려갔으나- 결과는 뻔했다. 이런 케이스를 가진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만나보질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관련 서류들을 제출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교육부에서 기다리던 도중 클루지 나포카에서 대학을 다니는 노르웨이 출신 청년을 만났는데 그 친구도 어떤 문제 때문에 이곳에 와있다고 했다. 듣기론 자기 친구들이 '몰타'라는 나라에 공부를 하러 많이 간다며 내게 그곳에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몰타? 몰타가 어디야? 듣도보도 못한 작은 섬나라인 몰타를 처음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여러 설명을 듣고 고맙다고 말하며 스타벅스로 돌아와 폭풍 검색을 하기에 이르렀다. 몰타는 인구수 49만 명에 1인당 GDP가 3만 달러(2018)에 해당하는 섬나라였다. 제주도 인구가 60만이라고 하니, 얼마나 작은 나라일지 쉽게 가늠 되질 않았다. 지도에 찾아보니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섬나라가 이탈리아 반도 밑에 위치해 있다. 영어와 몰타어를 공용어로 쓰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휴양지로서 최고의 나라!라고 외치는 블로거들의 글을 읽으니 과연 이곳에 희망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냥 여행차라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마침 거리가 그렇게 멀지도 않고 하니.
여러 나라 치대에 관한 정보는 한글로 치면 많지 않으므로 대부분 영어로 알아보는데 몰타 또한 정말로 국제 학생들이 많았고, 영어를 쓰기 때문에 졸업 후에도 언어로 야기될 문제는 딱히 없는 듯 보였다. 루마니아에서의 지친 마음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되든 안 되든 모르는 일이지만 안 되면 휴양이나 하지 뭐, 라는 마음으로 몰타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렇게 나는 원피스의 루피가 대항해시대를 탐험하듯 세계 이곳저곳의 교육기관을 쑤시고 다니는 여행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