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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실패, 또다시 실패

 

 까미노를 마치고 메일을 하나 받았다. 몰타에서 온 메일이었다. 서류 심사가 끝났고 다음 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하니 다시 방문해달라는 메일이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마드리드에서 몰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몰타에 도착한 날짜는 12월 중순. 도착하자마자 교육부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본 이 얼굴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나는 이런 메일을 받았고, 당장이라도 다음 스텝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느긋함 그 자체였다. 


- 지금 하는 일들이 많이 밀려있으니 좀만 기다려. 그리고 우린 며칠 후에 있을 크리스마스 행사도 준비해야 하거든. 좀만 기다려.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행정 시스템이 한국에 비해 무척이나 여유로운, 느긋한, 게으른, 느려 터진 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한국의 일처리가 타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탓에 이들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다시 교육부로 갔다.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내일 다시 와봐. 나는 숙소로 돌아갔고 다음 날 다시금 방문을 했다. 그날도 동일했다. 그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주말을 숙소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월요일이 됐고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직원이 바뀌어있었다. 전 주에 나를 상대하던 직원이 조금 일찍 크리스마스 휴가를 썼다고 했다. 스팀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그 직원과 대화를 했다. 직원은 알겠다고 말하며 다시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렸고, 기다렸지만 나를 다시 부르진 않았다. 언제쯤 진행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지금 일이 많아서 안된다고 한다. 그럼 내 일은? 내 일은 일이 아니야? 나한테 메일 보내지 않았냐고. 오라며! 당장 오라며!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할 거야 대체! 따지듯이 물으니 그제야 미안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업무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짜는 1월 5일이나 돼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스팀이 풀로 차서 거친 연기가 두피를 통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불그락 거리고 따지고 싶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목청에서 꾸물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터트리면 될 일도 안된다. 후.......... 


다시 숙소로 와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기까지 이곳에서 있을 순 없다. 돈도 거진 다 떨어져 간다. 쉥겐 비자 또한 90일을 거의 다 채워서 1월 초에는 떠나야 했다. 그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유럽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생,,, 린생,,,, 개망한 내 린생,,, 지중해에 코 박고 죽어야 하나? 열 받는데 누군가한테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숙소 주인 브라이언에게 이 상황을 털어놨다. 브라이언과는 꽤 친해진 상태였고 그는 내게 토끼고기 요리와 맥주를 주었다. 힘내. 원래 몰타가 좀 느려. 전부 다 좀 많이 느려... 


인생은 왜 이렇게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을까?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한국도 아니어서 속 시원히 얘기할 누군가도 없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거의 다 끝난 것 같았는데. 막막한 마음에 해변가를 내리 걸었다. 해변가를 지나 번화가를 걸었다가 앞에 보이던 언덕을 올랐다. 세상 모든 고뇌를 혼자 진 듯 찌푸린 미간 사이로 세상을 바라봤다. 찌푸려진 미간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 또한 찌푸러져 보였다. 찌푸려진 세상 사이로 찌그러진 내가 보였다. 찌그러진 어깨를 펴지 못할 것 같았다. 산티아고를 완주하며 얻었던 성취감은 온 데 간데없고, 찌그러진 깡통처럼 조그맣게 쪼그라진 나만 남아있었다.


세상은 무엇이며,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런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꼭 치과를 해야만 하나. 꼭 의사가 돼야만 하나. 나는 왜 시험도 못 보고 캐나다에서 쫓겨났을까. 아니 왜 필리핀으로 가서 공부를 했을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질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존재 자체를 허무하게 했다. 젊을 때의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지만, 이 고생이 그 고생이 맞는 것일까? 막막하고 어두운 앞길이 보이질 않아 언덕 위에 서서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른다. 소리라도 마음껏 질렀다면 후련했을까. 그 먹먹함을 그대로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혹여라도 어느 순간에, 의사가 된다면. 자격증을 딸 수 있다면. 케케묵은 이 먹먹함을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밤길을 걸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어느덧 새벽녘이었다.   


다음 날, 마지막으로 다시 교육부로 갔고 직원과 다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내 질척거림을 높이 산 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보겠다며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1월 초에나 나올 터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며칠을 보냈다. 브라이언이 몰타에서 치과를 하고 있는 지인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는 벨기에 출신이었고 그 또한 타국에서 공부를 하고 이곳에서 자격증을 취득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몰타에서의 삶과 일을 하는 환경에는 만족하지만 자리를 잡기까지, 즉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자격증 취득 프로세스에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나 문제는 느려 터진 행정 시스템이라고 재차 말했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 상황을 들은 그는 남아공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남아공은 몇몇 지역이 위험하긴 하지만 나라가 아름답고 살기도 좋아 외국 의사들이 많이 찾기도 하는 나라라고 했다. 학부시절 친구 몇이 남아공으로 편입을 했었기 때문에 남아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남아공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그저 얼룩말이 뛰어다니는 아프리카의 대초원 위에 세워진 대학이 있겠거니 하며 넘겼었다. 듣기로는 총기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그러나 남아공을 검색해본 결과 대초원의 얼룩말은커녕 드넓은 바다와 초록의 산봉우리 속에 어우러진 문명도시를 볼 수 있었다. 내 짧은 생각이 이렇게도 뒤틀린 편견이었다니.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남아공의 매력은 까진 양파처럼 계속 쏟아져 나왔다. 우선 남아공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치과의사들을 구글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찾아보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이런 상황에서 남아공에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졸업한 지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거나, 남아공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나 같은 케이스는 알지 못한다거나, 졸업한 해당 국가에서 자격증을 취득했다면 남아공의 자격증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우선 돈이 거의 다 떨어졌었고,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붙박여있는 남아공이라는 나라는 동네 옆집이 아니었다. 한번 한 번의 선택을 조심스레 결정해야 했다. 남아공 치과 협회 사이트를 자세히 읽어보고 문의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이 오질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이 세상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일까 뻘짓의 연속일까.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든 뻘짓의 연속이든, 어쨌든 그 결과에 책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길을 가면 갈수록 내 첫 선택은 잘못된 단춧구멍에 끼워졌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첫 단춧구멍을 잘못 끼웠다면, 나머지 단춧구멍들에서도 불협화음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불협화음이 날 때, 첫 단춧구멍을 끼웠을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첫 단춧구멍을 잘못 끼운 나, 그 선택을 제안한 주변 사람, 그리고 당시 그렇게 흘러갔던 환경들을 탓해야 할까? 설령 첫 단춧구멍이 잘못 끼워졌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삐걱대는 불협화음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은 할 수 있다. 아니, 아예 불협화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창조해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뻘짓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잘못 끼웠다고 생각되는 첫 단추 위의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 뻘짓을 하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이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과정 안에서 배우고 깨닫고 겪는 모든 일들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 주고 성장시켜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은 때로 고통스럽고, 멍청하고, 미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 어마무시한 것이라는 걸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아공을 간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유럽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아프리카 땅으로 들어갈지,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올지 결정해야 했다. 친구들과 부모님, 멘토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가보는 걸로 결정을 내렸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한국 병원에서 일하던 멘토의 의사 지인이 에티오피아의 병원에 파견되어 진료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분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몰타 - 에티오피아 - 남아공이라. 그럼 그냥 이집트로 들어가서 육로로 내려가 버리자. 어차피 나중에 치과를 한다면 아프리카 봉사는 당연히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육로로 내려가며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경험도 할 겸, 중간에 봉사활동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고, 모아 온 돈이 거의 다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캐나다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내 상황과 도전, 이집트에서부터 남아공까지의 종단 계획을 잘 정리해 쓰기 시작했다. 결국 돈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고, 쓴 글을 어느 회사 대표 두 분께 보내드렸다. 며칠 동안 답장이 없었다. 낙담이 됐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 때쯤 학부시절 내가 의지하곤 하던 간사님에게서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이러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고, 대표분들께 이런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없어서 한국에 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라고 말을 했다. 그분은 그 메일 내용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내용을 보여주었고, 그분은 이 내용을 자기 페이지에 포스팅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캐나다에서 추방당했다는 게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꼴이 우스워보여 망설여졌지만 간사님은 내게 한번 올려나 보자고 했다. 다음 날 포스팅을 올렸고, 신기하게도 올리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 메시지와 후원이 들어왔다. 하루가 더 지나고 두 분 중 한 분의 대표님 또한 멋진 도전을 응원한다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다. 


브라이언에게 혹여나 나중에 교육부에서 메일이 오면 연락할 테니 그때 이 서류를 제출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 또한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출국 날을 기다렸다. 이집트의 치대는 카이로 대학에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시간을 두고 몰타에 다시 돌아와 프로세스를 여유롭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학교를 가고 교수들을 만나고, 교육부 직원들을 만나는 이런 과정들에 너무 지쳐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컸다. 뭐 하고 있는 짓인지 싶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은 왜 이따구냐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처럼 국제적으로 뻘짓하고 있는 인간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아프리카 땅에 있는 아랍권 대학까지 찾아갈 생각을 했을까. 카이로 대학은 영어를 쓰는지, 아랍어를 쓰는지도 몰랐다. 알아보기도 귀찮았다. 그냥 가보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계획대로 되는 게 있나.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 되는대로,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이집트의 며칠 전 기사를 봤다. 수도인 카이로 한복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고 했다. 이번엔 폭탄 맞는 거 아냐? 한 70퍼센트의 확률로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님 내 주변 100m 반경에서 터지던가. 


새로운 땅,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혹여라도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긴다면, 음. 에베레스트와 캐나다에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됐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몰타 교육부에 가서 담당자를 다시 만났다. 빨간색 초록색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트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저 내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일이 진행된다면 이메일과 친구를 통해 최대한 협조할 테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냈다. 며칠 후 이집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3000여 년의 역사가 깃든,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세워지고 람세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머물던 땅에 발을 디뎠다. 신기함 반, 설렘 반, 두려움 반, 긴장 반. 여기도 다 사람 사는데야. 다 똑같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지. 미라가 살진 안잖아. 아, 미라는 저 밑에 있긴 하겠지만. 아무튼 떨지 마. 떨 필요 없어, 자연스럽게 하면 돼.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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