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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아프리카 여행 주의보


나이로비를 지나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으로 넘어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갔다. 표값은 숙소 주인이 말한 것과 같았다. 혹시 모르니 창구에 있는 사람에게도,  버스 앞에 서있던 기사에게도 가격을 물었다. 동일한 대답을 했다. 사기는 당한 것 같지 않았다. 여타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음, 탄자니아는 좀 낫군' 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일은 다음 날 터졌다. 새벽에 버스를 타러 갔을 때 우리가 당한 상황은 내 지난 여행을 통틀어 제일 화가 는 날이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버스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는데 기사가 티켓을 확인하더니 2만 원을 더 내라고 했다. 


- 뭔 소리야, 어제 내가 몇 명한테 확인을 했는데. 이 가격 맞잖아. 다른 버스 기사도 그렇게 말했거든? 


그러나 이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가격이 어제 가격이었고 자기 버스는 하루 걸러 가격을 다르게 받는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돈을 더 내라, 그리고 넌 외국인이기 때문에 돈을 더 내야 한다(....). 그래 뭐.. 여기 버스는 비행기 처럼 하루마다 가격이 다르고 뭐 그런거야? ... 그럼 표를 싸게 사려면 2달 전에 예약하고 뭐 그래야 하는거야?


두피의 구멍 사이 사이로 스팀이 치솟아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안에서 부터 끓어 오르는 깊은 빡침이었다. 당장 그 버스에서 내리고 다른 버스를 타기 위해 창구 앞으로 갔다. 앞에는 호객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어디 가냐고, 싸게 해 주겠다고, 내 팔을 붙잡는다. 그중 한 명을 골라 따라갔고 안내해준 버스에 앉았다. 기사가 와서 돈을 내라고 했다. 나는 아까 호객꾼에게 들었던 값을 줬다. 기사의 손이 그대로 남아있다. 


- 뭐? 어떡하라고?


돈을 더 내라고 한다. 심지어 처음 버스보다 비싸다 (....) 


- 아까 저 사람이 이 돈이면 된다 그랬는데?

- 아니야. 걔는 잘 몰라. 더 내야 해.


이쯤이면 그냥 더러워서라도 돈을 집어던지고 버스에 남아 있을 법도 한데 도저히 이런 저급한 사기꾼들에게 지는 게 싫었다. 다시 한번 빡침이 올라왔지만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을 세 번 그리며 살인충동이 일어나는 걸 억제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까 모여있던 호객꾼 6명이 다시금 내게 우르르 달려든다. 그러더니 누구는 내 옷을, 누구는 내 팔을, 누구는 내 몸을, 누구는 내 어깨를 잡고 서로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싸우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한 팔로 나를 잡고 한 팔로는 옆에 있는 애를 때리기도 한다. 얼굴에 주먹을 가격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내 앞에서, 내 온몸을 하나씩 붙잡은 그들이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이런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먹고살기 위해 이러는 걸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측은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당시에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었고 이런 망할 인간들이 있는 땅에 내가 다시 오나 봐라 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쳤던 때였다. 나는, SHUT UP! HEY! SHUT UP! LISTEN! 을 힘껏 외치며 내 말을 들으라고 했다. 나도 감정적이었고 그들도 감정적이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였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 분을 내고 있었다.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외쳤던 것 같다. 


- 아까 사기 친 놈 누구야!!! 어디 갔어!!


그러나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다시 말했다. 


- 너네 계속 우리한테 사기 치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기만 해 봐!(사실 딱히 어쩔 방안도 없음).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말고 제대로 된 값 내고 탈 수 있는 버스를 가져오라고!!!


이 말이 끝나니 자기들끼리 더 싸우기 시작한다.

하...... 이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느낀 점 몇 가지가 있다.


1. 새벽부터 이런 일을 겪으면 하루가 너무 고통스럽다. 

2.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화 내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3. 성격 파탄자가 된다.

4.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5.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다행히 호객꾼들에게 둘러싸여 고문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긴 어느 현지인이 버스표를 사는데 도움을 줬고, 사기를 당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버스 기사가 사기를 치는 건지, 삐끼가 사기를 치는 건지, 둘 다 짜고 사기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프리카 육로 여행은 다른 어떤 여행보다 힘들었다. 인도도 힘들긴 했지만 아프리카에 비하면 애기 수준이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이들지만 버스를 타고 나면 평화가 찾아온다. 에티오피아와 케냐에서 타던 버스보다 상태도 좋은 버스였고 깔려있는 도로도 안정적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앞자리에 앉은 애기가 계속 시끄럽게 울었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하며 가지고 있던 아이패드로 동영상을 틀어 보여줬다. 아이는 울음을 그쳤고, 엄마에게 내 자리로 아이를 데려가서 놀아줘도 되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흔쾌히 허락했다. 자리로 돌아와 놀아주다가 같이 잠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품에 안겨 잠든 아이와 함께 나도 같이 잠이 들었다. 아이는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깨서 울었다. 덕분에 나도 깼고, 조금 달래주면 아이는 금방 다시 웃었다. 아이 엄마도 내게 아이를 맡겨버리고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3시간 여를 아이와 함께했다.





다르에스 살람에 도착 후 일정을 짰다. 탄자니아에서 타자라 기차를 타고 잠비아로 갈지, 버스를 타고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해 말라위로 내려갈지 정해야 했다. 버스를 탈 때마다 개고생을 해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있던 터라 한 번에 잠비아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르에스 살람에서 바로 잠비아를 가게 되면 1860km에 달하는 거리를 40km로 주행하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타자라 기차가 그런 기차였다.


말라위는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나라는 아니다. 나라의 절반이 호수로 메워져 있을 만큼 큰 호수를 제외하고는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따듯한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라로, 말라위 국민이 따듯해서 붙여진 별명이라던데,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프리카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 난 상태였으므로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서 종단을 마쳤던 친구가 말라위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꼭 가보라고 하기에, 이왕 비슷한 고생을 하는 거, 말라위를 가기로 정했다. 다르에스 살람에서 잔지바르 섬을 들렸다가 모로고로 - 이링가 - 음베야를 통해 말라위로 들어갔다. 



탄자니아 지도


잔지바르, 핑궤 섬


잔지바르






탄자니아의 국경을 넘어 말라위의 카롱가라는 도시로 들어왔다. 이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수도인 릴롱궤로 간다. 어쩌다 sns에서 인연을 맺게 된 한인 선교사님께서 말라위에 온다면 한 번 들리라고 초청을 해주셨다. 말라위의 첫 느낌은 괜찮았다. 사람들도 착했고, 버스를 타러 가도 호객꾼들이 극성을 부리지 않았다. 타려면 타고 말라면 말아~ 이런 느낌. 이래서 따듯한 심장이라고 하는 건가? 다른 나라에서 호되게 당하고 와서 그런지 조금만 친절을 베풀어줘도 쉽게 감동을 먹었다.


릴롱궤에 도착해서 한인 선교사님을 만났다. 최선교사님 부부로, 말라위에서 오랜 시간 사역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쭉 얘기했다. 특별히 나는 남아공에 치과 자격증을 알아보러 가는 김에 아프리카 종단을 하고 있다고 얘기를 했다. 선교사님은 이곳에서도 자격증을 딸 수 있을 거라고 말씀을 하셨다. 


읭?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곳에 콩고 출신 의사가 있는데 말라위 자격증을 취득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하면 그 의사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정보라도 얻을 셈으로 만나보겠다고 얘기했다. 며칠 후 그 의사를 만났고 내가 지나왔던 과정을 쭉 - 이야기하니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기에, 아마 남아공으로 갔다가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다시 몰타로 돌아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콩고 의사는 말라위에서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고, 자기 또한 그렇게 취득을 했다고 얘기했다. 이곳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어떤 나라를 가던 다음 스텝을 쌓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격증을 딸 수 있다고? 어떻게?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고, 의료 인력이 부족한 나라였다. 영어권 국가이기에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 캐나다, 브라질, 일본 등의 나라에서 많은 의료 인력들이 파견되어 같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격증을 따는 방법은 여타 다른 나라에 비해 수월했다.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보건복지부에 제출하고, 자격이 갖춰졌다는 것이 승인이 나면 시험을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Written exam과 Practical exam으로 나눠지는데, Kamuzu central hospital이라는 국립병원에서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시험을 보고 합격이 된다면 1년간 국립병원에서 일을 해야 했다. 단, 국립병원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 보수는 없다고 했다. 


보수가 없다고? 그럼 어떻게 생활을 하지? 


들어보니 나라가 어려워 현지 의료진 조차 월급이 밀리기도 하고 어떤 달에는 받지 못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외국인들한테는 오죽하겠나. 당연히 외국인들은 국립병원에서 일을 할 때 자기가 소속된 본국의 병원이나 회사(NGO)에서 지원금 내지는 후원금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현지에서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선 국립병원에서의 기간을 하루빨리 마쳐야 했다. 나 같은 케이스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단독으로 아프리카 오지의 땅에 찾아와 뒤에 받쳐주는 기관이나 병원도 없이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고로, 이곳에서 생활을 하려면 그 생활비 또한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프리카에서의 치과 활동이라. 본과 4학년 시절, 캐나다에서 진료를 보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캐나다와 말라위 사이에는 하나하나 설명하기 부족한 간극이 있었고, 이곳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1년을 머문다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말라위라는 나라를 잘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상상 속의 아프리카와 그다지 다른 모습이 아니었기에 이 척박한 땅에서 1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월급도 받지 못할 텐데 생활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숙식은 또 어디서 할 것이란 말인가. 갑작스러운 기회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여행을 잠시 멈추고 커리어를 쌓느냐,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는 나라로의 여행을 진행하느냐. 이 선택이 앞으로 있을 여정을 좌우할 터였다. 그러나 남아공에 가더라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쉥겐 비자가 풀려 몰타로 다시 돌아가려면 몇 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돌아다니는 것에 조금 지쳐있기도 했다.


우선 정말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보건복지부에 서류라도 내보기로 했다. 콩고 의사와 보건복지부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점을 충분히 이수했고, 인정이 될 수 있는 학력인지 승인을 받기 위해 서류를 제출했다. 승인이 나기까지 3주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데, 만약 이곳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다면 3주나 되는 시간을 쓸 이유가 없었다. 결정을 빨리 해야 했다. 우선 수도 릴롱궤를 돌아보고,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NGO 사람들을 만나서 말라위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말라위의 한인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체적으로 말라위는 여유롭고, 한적한 나라라고 했다. 좋게 말하면 여유지만 나쁘게 말하면 역시나 모든 것이 느리게 돌아간다는 것일 테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조금 하는 것 빼고는 그렇게 나쁘지 않고 순수한 면이 많다고 했다.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길래.) 무튼, 말라위에 머무는 동안 느꼈던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 사람들보단 친절한 사람도 많은 것 같았고, 순수한 면도 있는 것 같긴 했다. 문제는 이 나라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여가 활동이나 문화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수도 릴롱궤에는 그 흔한 맥도널드와 스타벅스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패스트푸드점은 Kfc밖에 없었고, 노래방도, 오락실도, 피시방도 없었다. 카페도 많지 않았고 저녁 6시면 날씨가 어두워지고 도로의 모든 불이 꺼지기 때문에 위험해서 돌아다니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나라에서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의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NGO 단원들은 이런 '아무것도 없음'을 즐기는 듯했다. 빡빡한 일정이 짜여있는 한국과 다르게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시간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깨닸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나라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고 어느새 그 생활에 익숙해져 이곳이 너무 좋아졌다고 말을 하는 분도 만날 수 있었다. 이 나라가 생각한 것만큼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곳에 머무는 것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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