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위에 온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이곳에 거주하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도 들어보고, 말라위 호수인 은카타베이도 다녀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자격증을 취득할 수 만 있다면 이곳에서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학부시절 가난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나갔을 때 막연히 생각했던 아프리카였다. 티비에서는 아프리카를 가난과 기아, 질병, 테러의 나라로 소개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가난의 프레임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그런 미지의 땅에 가서 봉사를 한다는 건 높은 수양을 쌓은 성직자, 즉 이태석 신부나 프란치스코 교황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양은 커녕 빨빨거리며 세계 곳곳을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26살의 혈기왕성한 내가 이 땅에서 1년간 머무르며 봉사활동을 한다니.
학생 때 내 꿈은 반들반들하게 광이 나는 대리석이 깔린 캐나다의 병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쉴 때는 밴쿠버의 스탠리 공원이나 로키산맥 같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워라밸을 누리는 삶을 꿈꿨었다. 그러니 맥도널드도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1년을 보내라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 주가 더 지나고, 서류 심사가 완료되었다. 자격은 충분했고, Written exam과 Practical exam을 보면 되었다. 시험은 약 두 달 후에 있었고, 그전까지 나는 임시자격증 같은 걸 가지고 국립병원에서 일을 익히고, 배우면 되었다. 고로, 두 달간 다시 공부 모드로 땅굴을 파야 한다는 얘기였다. 캐나다 시험을 위해 본과 2학년 때부터 같이 공부하고 준비했던 친구들이 원격으로 도와줬다. 그 친구들 또한 2차 미국 국시 시험을 앞두고 있어 공부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나와는 여러모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비록 캐나다에선 시험을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지만 그때 매일 밤을 새 가며 준비했던 시험공부가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 수 있지만 이곳의 시험 난이도는 캐나다나 미국의 그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캐나다 국시의 족보(?)(=기출문제)를 달달 외웠으니 이 나라의 국시 공부를 할 땐 훨씬 수월했다.
Practical exam(임상시험)은 병원을 다니며 준비했고 필요한 스킬을 다시금 몸에 익혔다. 졸업한 지 1년이 지났지만 Senior dentist들이 옆에서 잘 도와주니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한국과 몽골을 오가며 치과 의료선교를 하시다가 말라위에 오신 강선교사님께서도 이때 국립병원에 오셔서 나를 지도해줬다. Scaling, Restoration, Extraction, Endodontic treatment, Prosthodontic treatment 등 학부 때 죽어라 배웠던 과정들을 다시금 반복하며 익혔고, 환자들을 치료했다. 한 가지 문제는 아프리카는 구강악안면외과(Oral and maxillofacial surgery) 환자들이 많았는데, 물론 나도 학부 때 이 과목을 배우고 실습도 어느 정도 했지만 환자의 케이스 자체가 레벨이 틀렸다. 내가 배웠던 구강악안면외과 실습수업에는 보통 발치 환자나(Extraction, Wisdom teeth extraction), 가끔 Maxillomandibular fixation을 했을 뿐이고, 나머지 severe worst case들은 책으로만 봤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선 책으로만 봤던 Severe case의 환자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수술비가 없어 민간병원으로 가지 못한 환자들이 모두 국립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책으로만 봤던 구강악안면외과 환자의 케이스를 실제로 마주하니 내가 지금껏 치과 기술이라며 해왔던 진료들(스케일링, 충치치료, 신경치료, 발치, 잇몸치료, 보철치료 등)이 얼마나 가볍게 느껴지던지. 물론 이런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고, 사람마다 맞는 분야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의 경중을 따질 순 없다. 단지 이곳의 환자들을 접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치과 진료의 생각이 하나 더 트인 느낌이었다.
그렇게 두 달간 다시 책 속에 파묻혔고 임상시험을 위해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시험을 봤을 때 임상실력은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다행히 합산 점수가 합격을 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세계를 반 바퀴 돌아 캐나다와는 정 반대인 말라위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캐나다 치과의사'와 '말라위 치과의사' 사이에는 경제적인 면뿐만 아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느끼는 그 간극을 어떤 경험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간극이 실재가 될지, 간극을 뛰어넘는 이상이 될지 정해진다. 나는 캐나다에서 치과의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없다. 오히려 조금 고생은 했지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미국 국시를 준비하고 있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본인 인생은 ------------ Dentist -------------->인데 반해,
내 인생은 ↗ ↗ ↙ ↙↗ ↙↗ ↗ ↙↗(Earthquake, Europe, India, Dentist, Homeless, Full of experience)로 가득하다고.
우여곡절도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다음 일정을 정할 때마다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 안에서 '조금만 더'와 '때려쳐'가 자꾸만 싸웠다. 그때마다 괴로웠다. 조금만 더 지났으면 정말 포기하고 끝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금 마음을 잡았다. 고단했던 이 여정에서 내가 가장 뿌듯했던 건 이것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 실패와 좌절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 실패와 좌절 속에 무너져 내려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이 된다. 주저앉아도 다시 한번 더 일어나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길이 보인다는 것. 이 사실을 몸소 깨달았고, 실질적인 경험을 한 것이 지금 나를 단단히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이뤄낸 경험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내고 있다.
말라위 생활 3개월 차, 그간의 소감을 한번 말해보자면 우선 이틀에 한 번씩 물과 전기가 끊긴다. 보통 4~5시간씩 끊기고 심하면 일주일씩 끊기기도 한다. 정작 전기와 물이 가장 필요한 활동시간엔 들어오지 않다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시간 - 새벽 2시부터 5시 정도 - 에 물과 전기님이 살짝쿵 들어왔다 곧바로 다시 나가신다. 따라서 오후 6시만 되면 집안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
보통 촛불을 켜고 생활을 하는데 이미 문명세계의 편리함에 찌들어버린 나로선 전기 하나 없는 것이 이리도 고통을 안겨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컴퓨터도 안되고, 핸드폰도 배터리를 아껴야 하니 할 수 없고, 한석봉 마냥 눈을 가리고 글을 쓸 수도 없고, 촛불을 켜고 책을 읽자니 눈이 침침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촛불을 하나 둘 켜놓고 같이 살던 사람들과 밥을 먹다 보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잘 보이진 않다만 촛불이 주는 조선 갬성과 잔잔- 하게 틀어놓은 째즈가 나름의 낭만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전기가 일주일간 끊기면 집 안에도 대참사가 일어난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이 상하고, 녹고, 냄새나고, 다 버려야 하고. 발전기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말라위다. 발전기가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있어도 안 먹힌다. 씻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미리 받아놓은 물로 여럿이 나눠가며 씻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물 조절을 잘해야 한다. 받아놓은 물이 차갑게 식어버릴 때 샤워를 하면 그것 또한 엄청난 고행. 말라위는 참고로 건기(4-12월)와 우기(1-4월)로 나뉘는데 건기, 특히 6-8월에는 아프리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춥다. 말라위에 처음 와서 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더워 죽겠는데 패딩을 입는다고..?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 패딩을 구하러 다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튼 그렇게 추운 날씨에 전기와 물이 쌍으로 끊겨 이미 식어버린 찬 물로 샤워를 한다면... 그래서 잘 안 했다.
말라리아는 또 왜들 그렇게 많이 걸리는지. 에이즈에 감염된 국민들도 10%가 넘을 정도고, 총과 칼을 든 떼강도들이 가끔 한인들을 상대로 출몰해 총구를 머리와 입 구녕에 집어넣고 돈을 내놓으라고 한단다. 이곳에 계신 선교사님 몇몇 분들은 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으셨고, 머리도 깨지고, 팔도 반쯤 잘려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기도 했다. 아니 이런 이야기들을 왜 처음에 해주시지 않고.... 무튼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시며 본인의 역할을 꿋꿋이 감당하시길 5년, 10년째. 그분들을 통해 고아인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가는 모습을 보니 존경이 우러러 나왔다.
나는 병원으로 출근을 했고 환자들을 돌봤다. 처음에는 발치(Extraction) 환자 위주로 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수복치료(Restorative treatment)와 근관치료(Endodontic treatment)를 주로 맡게 됐다. 보철치료(Prosthetic treatment) 환자는 많지 않았다. 크라운이나 금을 씌우기에는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고,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발치를 해달라고 찾아왔다.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치아를 뽑아버린다는 게 안타까워 병원장의 협조를 구하고 살릴 수 있는 치아를 최대한 살렸다.
몸이 어느 정도 적응을 했을 때 구강악안면외과(Oral and maxillofacial surgery) 환자를 치료하는 시니어를 어시스트 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썼다시피 내가 배운 구강악안면외과의 케이스들은 주로 책과 영상으로 본 것들이다. 이곳은 책과 영상에서만 존재하던 환자들이 실재하는 곳이었다. Abcess, Tumor를 가진 환자들은 기본이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당시 기록을 해두었던 환자들의 케이스는 Squamous cell carcinoma, Cancrum oris(noma), Necrotizing gingivostomatitis 등의 환자들이 있었다.
내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닐뿐더러 실습을 해본 적도 거의 없다. 우리나라든 필리핀이든 캐나다든 미국이든 이런 환자들은 치과의 주된 케이스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과진료는 끽해봐야 레진, 인레이, 신경치료, 크라운, 임플란트, 교정 등이지만 아프리카는 구강악안면외과의 케이스가 주를 이루는 메인이라고 한다. 물론 개인병원과 국립병원은 차이가 있다. 어느 나라던 특별한 사명감이 있지 않은 이상 이런 환자들을 메인으로 보려 하는 치의는 많지 않다. 미국 국시를 준비하는 친구에게 우리가 책으로만 봤던 환자들이 이곳에 있다고 하니 미국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환자들이라며 나를 부러워했다.
잘 사는 나라인만큼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치료를 즉각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 말라위의 상황이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를 대변할 순 없지만 많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이런 환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병원을 가려면 7시간을 차로 달려야 하는 환자, 심지어 나귀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병원 한번 가는데 7시간이 걸리니 차라리 안 가게 된다. 일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병이 초기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방치하는 사람들이 많고, 10년, 20년, 30년 치료를 받지 않고 통증과 함께 살기에 얼굴의 반이 종양으로 땡땡 붓는 환자들까지 생긴다.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서든 올 텐데 그것조차 쉽사리 알지 못한다. 핸드폰은커녕 와이파이도 없고, 전기도 통하지 않는 외딴 마을에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병원까지 찾아오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은 얼굴에 천을 두르고 병원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 악화된 바이러스가 자신의 얼굴과 몸을 망가뜨렸다는 걸 가리기 위해 천을 두른다. 가만있어도 흘러나오는 노란 고름 사이로 이들의 눈물이 떨어지는 걸 나는 자주 봤다. 이들 앞에 내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들의 공허한 눈은 이미 놓아버린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자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