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여행, 그들에겐 일상
하이볼과 나마비루
요 며칠 경량 패딩을 찾아 옷장을 뒤적거리게 되는 날씨였다.
도쿄의 날씨는 서울보다는 부산에 가까운 듯하지만, 시차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날씨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싶어 쉽사리 수긍 못하고 따뜻한 옷을 챙겨야 하나 고민을 했다.
일교차를 생각해 반소매와 긴팔, 그리고 외투까지 적절히 조화롭게 캐리어에 싼 후에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비행시간 두 시간 정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중의 하나인 도쿄로의 여행이지만 어쨌든 해외. 우리 집에서 도쿄 친구 집까지 가는 데는 꼬박 10시간이 걸린다.
공항 입구에 나와 아이들, 캐리어를 내려주고 신랑은 공항 주차장에 주차하러 간다.
공항을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몇 장 찍는데도 손이 제법 시리다. 벌써 겨울이 오고 있는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스카이라이너 열차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며 세 개의 캐리어를 끌고 배낭도 메고 가야 하는 쉽지 않은 일정인데도 어쩐지 아이들의 낯빛에선 별로 힘든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첫째에겐 세 번째 일본, 둘째에겐 두 번째 일본이긴 하나 둘 다 내가 만들어 준 포토 북 속 본인들 모습을 보고 아 , 내가 비행기를 타긴 탔구나! 기억할 뿐이다. 본인들 입장에선 거의첫 번째 해외여행이나 다름없으니 느껴지는 설렘 때문인지, 힘들지만 좀만 버티면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힘든 티 내지 않고 꿋꿋이 캐리어와 가방을 짊어지고 제 몫을 해내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아케보노바시역에 도착하자 우리의 여정도 거의 끝이 보였다. 지하철 개찰구 앞까지 마중을 나와준 비아 어머님과 아버님 덕분에 헤매지 않고 조금 더 빨리 일본 가정집의 일상에 스며들 수 있었다.
친구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한국에서 가져온 각종 과자와 이젠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내 일러스트로 만든 신년 달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책 등을 펼쳐놓았다. 선물로 가득 찼던 캐리어를 다 털어내고 나니 몸도 맘도 가벼워졌다. 저녁 식사가 아직인 우리 아이들 먹이려고 오는 길에 포장해 온 도시락을 식탁 위에 펼쳐놓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저녁밥이고 뭐고 관심이 없고, 그저 회포를 풀고 싶은 모양이다.
어른 또한 놀고 싶긴 마찬가지. 긴 이동시간의 피곤함과 긴장감은 친구네 집 길목 식당가를 만난 순간 싹 사라졌다. 어서 어느 이자카야에 자리 잡고 앉아 여행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었다.
우리는 관광객을 위한 메뉴판 따위 없는 한 술집에 들어갔다.
이번 여행이 지금까지 해왔던 여행들과 가장 다른 점은 이것이었다.
일본어가 능통한 동행자가 늘 함께했다는 것. 한국어 메뉴판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 장점은 어찌 보면 여행자를 수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여행 내내 일본을 겉핥기가 아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기도 했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또 이 관광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바로바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우리 가족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이볼과 나마비루를 먹기 위해서 달려온 게 아닐까?
한국에서 메인 메뉴를 시키면 딸려 나올 법한 밑반찬들이 메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나씩 나온다. 배고픈 우리는 날름날름 먹어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