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편의점에서 일한 건 스무살 때였다. 그때 나는 두 군데 편의점에서 동시에 근무했다. 주말에는 직영점에서 하루 12시간 정도를 일했고, 평일 주 3일은 가맹점에서 저녁 4시간 동안 일했다. 평일 일했던 가맹점은 당시의 최저시급인 2500원에 한참 밑도는 1800원을 주는 악질이었지만, 나는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걸 감내했다.
특히 직영점 일을 좋아했는데, 본사에서 파견된 두 점장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 점장님과 꼿꼿하고 점잖은 선비 점장님. 직영점인 만큼 모든 것이 FM이었고 더 힘들기도 했지만, 점장님들은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나의 향상심과 인정 욕구를 북돋웠다. 점장님이 손에 쓰레기를 들고 있으면 쓰레기통에서 슥 비켜 서는 것만으로도 역시 유능한 알바라며 칭찬해 주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얘기도 많이 들려줬다. 상품 진열만 해도 알고 보면 재미있는 원리가 숨어있다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배치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마치 비법을 전수하듯 무게를 잡으며 알려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대학 새내기였던 내게는 중견 사회인처럼 느껴졌었지만 그분들도 겨우 스물일고여덟의 사회초년생이었고, 자신이 막 배운 것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은 것이었을 테니 돌이켜보면 참 귀엽기 그지없다.
덩치 점장님은 기분 좋으면 난데없이 뚱한 얼굴로 궁둥이를 흔들었다. 그럴 때 나는 티벳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어이없음을 최대한 전달했지만 사실은 그 표정과 궁둥이의 부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선비 점장님은 불평 같기도 하고 자랑 같기도 한 여자친구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지면 "점장님은 멋있으시니까요"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 선비 점장님은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오늘 바닥 청소는 점장님이 해주겠다고 말했다. 후에, 약혼까지 했던 그 여자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도망가 버렸을 때 나는 무척 수척해진 선비 점장님을 만나 고깃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비스직이 근무 중 의자에 앉는 게 말이 되지 않는 분위기여서 내내 서서 일했다. 점장님들과 있으니 힘들다고 몸을 배배 꼴 수도 없고 힘없이 벽에 기댈 수도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12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나 싶은데 그때는 그게 당연해서 다리가 아파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버텼다. 또, 지금은 물류가 들어오면 물류 기사님이 물류 상자를 정리하기 편한 곳까지 날라주지만 그때는 640ml짜리 병맥주 상자들을 냉장고까지 나르기 위해 용을 썼다. 하지만 돌도 씹어먹던 스무살에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라면 시재 정산이 자주 맞지 않는 점이었다. 그때는 지금 같은 포스(P.O.S. point-of-sales. 판매 시점 정보 관리) 시스템이 없었고, 계산을 할 때도 딴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이는 유체이탈 증상이 심했던 나는 왜 돈이 비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날 번 돈의 반을 털어 시재를 메꾸고서 한껏 처진 어깨로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땐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는 손님들도 많아서, 점장님들께는 웃어보이면서 속으로 쌍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한결같이 농담을 건네고 소소한 인생 얘기를 들려주던 두 점장님의 존재가 생각나 다시 신이 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일하는 1년 동안 나는 겉돌던 중고등학교 시절 목말랐던 유대감과 소속감을 채울 수 있었다. 그 후로 다양한 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에 빨대 꽂힌 듯 노동력을 착취당하기도 하고 일이 힘들어서 울기도 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내 ADHD 증상에 가열차게 부딪치기 전까지 내가 쓸모 없는 인력이 아니라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일하는 곳에서도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느꼈던 1년이 그만큼 탄탄했기 때문이다. 삼십대 후반이 되어 모든 것을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을 때도 붙잡고 일어설 지푸라기가 되어준 게 바로 이때의 기억이다.
삼십대 후반의 나는 사회불안 장애와 우울증, 공황 증세로 인생에서 자존감의 최저점을 찍고 있었다. 이 얘기는 다른 책에 자세히 써서 비슷한 얘기를 또 쓰기는 좀 그렇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나 자신이 길바닥에 까맣게 눌러붙은 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밟히고 민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 밟히고 밟히면서 더더욱 바닥과 한 몸이 되어버리는, 그러면서 본체가 닳아져 자신을 잃어가는 존재. 눈치가 없고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남들이 오해하게끔 행동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오래 해온 학교 일을 그만두기로 했고, 드디어 글 쓰는 일을 최우선순위로 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개운했다. 나의 모든 병증은 무의식이 제시하는 진입금지 표지판이었다. 더 이상 맞지 않는 분야에서 애쓰지 말고 나에게 맞는 길을 개척하라는 내비게이션 음성. 말 그대로 인생 2막이었다.
다만 문제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한데 일을 구하기가 두렵다는 점이었다. 글 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야심차게 활동하던 동호회도 청각과민과 사회불안 때문에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동호회 동료인 남자분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툭 던지듯 말했다.
- 나 편의점하는데, 너 일할래?
그 말이 내가 혼자 끙끙거리며 걷어올리고 있던 2막의 인생을 확 열어젖혀 주었다. 내가 얼마나 지질한 상태인지 모르고 한 말씀이었지만, 나라면 믿고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분의 말이 꼭 식량 없이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건네받은 초코바 같았다. 그 이상 없을 수 없을 만큼 없다고 느꼈던 에너지가 새싹처럼 뾰족 솟았다. 그래, 내가 편의점 일은 그래도 잘 맞았으니까. 편의점 점원이랑 손님은 서로 냄새가 가닿기도 전에 스쳐가는 관계잖아. 눈치 빠르게 행동할 일도 많지 않을 거고, 정해진 멘트만 잘해도 문제는 안 될 거야.
출근하면 이전 근무자와 교대한 뒤 혼자 일한다고 해서 더욱 다행이었다. 그분이 운영하는 게 편의점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다 포기해 버리지는 말라는 신의 목소리였다.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만 있다면 인생은 어떤 식으로든 손을 내밀어주는 게 아닐까, 지금은 생각한다.
점장님 부부는 내 실수보다 의지를 더 봐주셨다. 지적할 부분이 있을 때도 지적이라 느끼지 않도록 배려를 담아 말씀하셨고,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으셨다.
- 늘 잘해줘서 고마워요.
- 오늘도 정말 고생했습니다.
- 바람 씨 그만두면 안 돼.
- 바람 씨가 있어서 든든해요.
시간이 흐르고, 점장님들이 건네주는 말들이 내 안에 쌓였다. 그 말들이 지붕 없이 내내 비바람을 맞던 마음에 작은 움막이 되어주었다. 나도 받아들여지는 곳이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쓸모가 있었다. 그게 세상 여기 한 곳뿐이라도. 쓸모 없는 존재는 아닌 거였다.
이곳은 매출이 적어서 야간에는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았다. 남자 점장님이 계산대 안 좁은 바닥에 매트를 깔고 주무시다 손님이 오면 손님을 받는 식으로 운영했다. 낮에는 다른 일을 다니셨고 허리가 안 좋은 분이라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 분은 직접 딴 밤과 제주에서 친척이 보낸 유기농 귤 같은 것들을 내 손에 한 봉지씩 들려서 집에 보내셨다. 늘 자전거로 다니는 출퇴근길을 걱정하며 내 자전거에 직접 바구니와 전조등을 달아주셨다. 매번 요즘 건강은 어떠냐며 안부를 물으셨다. 매상이 오르지 않아 점포 앞 넓은 마당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을까 고민하다가도 직원들이 힘들어질 거라면서 생각을 접으셨다. 나는 그런 두 분이 정말로 좋았다.
사실 내가 일을 특별히 잘한 것은 없었다. 시간 맞춰 해야할 일을 챙기고, 적당히 놀다가도 더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정말로 실수가 많은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에 성실함이라도 보여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지만, 나중에는 처음만큼 열심히 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두 분은 나를 믿고 지켜봐 주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분들이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신 것은 그분들의 성품이라는 것을. 누구든지 해보려는 열의만 보이면 정말 잘하지 못하더라도 늘 힘을 북돋워줄 분들이라는 것을.
나는 이 점포에서 일하면서 첫 번째 에세이집의 초고를 썼다. 그러다 글 쓸 시간이 충분치 않아 결국 점포를 그만두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처럼 마음이 조여들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주업을 잘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편의점 이야기를 다루는 꼭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나중에 궁극의 알바를 새로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설마, 하나도 없겠어?'라는 생각도 스을쩍 든다. 내가 받은 호의 덕분이다. 그런 장소,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겪어서 아니까."
문장마다 진심이었지만 쓰면서 의문은 남아 있었다. 여기 말고도 나에게 맞는 곳이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가 있을까. 설마 그런 행운이 연속으로 찾아올까.
편의점 일을 쉬면서 1년이 흐르고, 이제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어져서 한번 들여다보기나 하자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에 알바천당을 깔았다. 때마침 집에서 5분 거리 편의점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근무시간도 주 3일 4시간씩으로, 글을 쓰면서 일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진지하게 일을 다시 시작할 각오가 있었던 건 아닌데, 조건이 이렇다 보니 가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 남자인 사장님은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셨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면서도, 사장님께 일을 배우면서도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불편한 일이 생길 거야. 나한테 불만을 가지실 거야. 나는 갑작스레 일을 구한 걸 후회하게 되겠지. 그렇게 나랑 잘 맞는 점포가 다시 있긴 어려울 테니까. 어쩌면 거길 그만뒀던 것도 너무 속상해질지 몰라. 그런데 두 달 후, 나는 책의 초고에 이런 말을 추가했다.
"일 년 후, 지역을 옮겨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게 됐다. 놀라지 마시라. 세상에는 알바생에게 극존칭을 쓰고 주휴수당을 주기 위해 근무시간을 늘려주는 사장님도 실재한다. 도전이란 두려운 것이지만 해볼 가치가 있다."
그렇다. 네 번째 편의점의 점장님, 그러니까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는 우리 사장님은 어디부터 어떻게 자랑을 해야 제대로 전달이 될까 고민이 될 만큼 좋은 분이다. 두 번째 에세이에도 편의점 얘기를 조금 썼는데, 두 책의 편의점이 서로 다른 점포이고 점장님도 서로 다른 분이라고 하면 놀라는 분들이 있다. 나로서도 어떻게 이만치 좋은 분들과 연이어 연이 닿았는지 신기하다. 이번 생에서 다른 복은 모르겠지만 인복, 특히 '편의점 점장복'은 있는 것 같다. 내 인생 세 번의 편의점 시기에 모두 나를 키워준 점장님들이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