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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닭고기

by 고양이삼거리

심야식당 ‘어제의 카레’ 편, 냉장고에 넣어둔 차가운 카레를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녹여 먹는다. 차가운 음식을 맛보는 것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맛을, 내 안에서 살살 달래며 깨어나게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뭐랄까, 온도와 밀도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찰나, 차가움부터 체온, 내 안의 변화를 함께 맛보며 즐기는 게 아닐까. 화려한 어제의 날을 여유 있게 되새기는 것, 남은 열기와 차가운 한 조각 요리. 한 스푼 담아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맛을 풀어내는, 이건 어쩌면 삼켜질 때까지 이어지는 요리의 과정, ‘그리고’의 순간.


그리고,


집에서 특별하게 어제의 카레가 맛있는 이유는 ‘요리하지 않아도 되는’ 캬, 진정 꿀맛 같은 휴식의 식사. 카레는 아니고, 우리에게는 어제의 닭고기가 그런 메뉴다. 큰 토종닭, 백숙하고 남은 고기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결을 따라 잘게 찢어서 마른 팬에 볶는다. 껍질에서 기름이 나오면서 바삭하게 익고, 맛이 담백하다. 보통은 그냥 볶는데, 소금이나 후추를 약간 더하는 날도 있다. 옛날 통닭 먹고 남은 것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꺼내서 볶는다. 머금고 있던 기름이 나오면서 바삭하게 구워지는데 이때 신선한 올리브오일을 조금 넣어주면 오래된 기름 맛을 지워준다. 간장양념한 닭구이도 그렇게 먹는데 찬 기운만 가시게 살짝만 볶아도 여름에 먹기 좋다. 이것들을 파스타에 곁들이거나 토마토소스 바른 토르티야에 치즈, 채소와 함께 접어낸다. 이건,


어제의,

시간에 기대어있는 오늘의 식사.


오래전 겨울마다 우리는 눈보라를 헤치며 주문진에서 며칠 묵곤 했는데, 그 해는 강릉에서 하루를 보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른 저녁으로 토종닭 백숙 하는 식당을 찾아서 그리갔다.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국도를 따라가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 개울 다리를 건너니 작은 집, 마당 있는 식당이 나왔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마루에 잘 차려진 식탁이 있었다. 냄비에 넘치게 담긴 큰 닭과 채소들, 따뜻한 식사에 몸이 녹고 밖은 어둑하고, 갈 길은 멀고 집은 조용하고, j는 물었다.


“사장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나요?”


우리는 그렇게 평창 어딘가에서 잘 자고 개울 옆 큰 나무아래 수돗가에서 얼음물로 세수를 하고 남은 닭백숙을 실어 서울로 돌아왔다.


‘어제의’라는 건 모든 것 일 수 있다. 먼 곳에서 이어지는 사건들, 만들어놓은 반찬, 김치, 장, 마련해 놓은 제철 재료들, 방법들, 도구들, 내 집과 부엌 그리고 나와 우리가 만들어간 규칙과 질서들, 그걸 지키는 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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