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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삶

by 글벗

유부모의 삶은 "유부모"라는 단어만큼이나 어색한 면이 있다. 해가 떠오르고 밥 먹는 일상조차 낯설게 하는 초기의 충격과 격렬한 비애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 일을 겪지 않은 가족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가족이 공유한 시간과 공간 곳곳에 깃든 아이의 추억을 빈자리 그대로 품고 가기 때문이다. 아들의 자리를 어떻게 아프지 않게 품고 살면 좋을까. 우리 가족이 평생 해야 할 숙제이다.


아들이 지내던 방과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은 가족마다 다른 듯하다. 십 년이 넘도록 아이가 쓰던 방을 그대로 두는 가족도 있고, 49일 또는 장례식이 끝나고 정리하는 경우도 보았다. 우리는 4개월 정도 지나고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들의 방은 우리 집에서 가장 단출한 방이었다. 옷가지가 별로 없는 옷장을 정리하면서, 이 아이가 세상에 이렇게 조용히 왔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아렸던 마음이 떠오른다. 아이의 물건들은 대부분이 나와 딸이 물려받았다. 내가 글을 쓰는 책상도 아들이 쓰던 책상이고 아이패드도 아들이 쓰던 것이다. 여행 갈 때에는 아들 물건을 여행 가방에 하나 가지고 가곤 한다. 여행을 좋아하던 아들이 기뻐할 것 같아서. 이사를 들어간 새 집에서는 아들의 방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이 좋아하던 물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거나 계속 사용하고 있다.

특히 책은 내셔널지오그래픽, 타임스 등 몇 년 동안 모은 잡지만 굿윌 스토어에 갖다주고 대부분은 내 책장에 옮겨 꽂았다. 한동안은 아들이 읽으라고 권해준 책 중에 못 읽은 책들을 읽었다. 마음이나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은 자신이 읽고 마음에 드는 책을 나에게 자주 권해주었다. 아들이 권한 책을 읽으면 아들의 마음이 엿보였다. 어릴 때는 길지 않은 책들이어서 쉽게 읽고 책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고등학생쯤 되자 그 일이 쉽지 않았다. 책이 두꺼워지기도 했고 내가 하는 일이 프로젝트 성격이 짙다 보니, 읽다가 일이 들어오면 중간에 읽기를 멈추고 마치지 못하는 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들이 권해주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면 아이의 생각을 뒤늦게 알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다.


가족 중에서 삶이 가장 달라진 사람은 갑자기 외동이 된 딸이라고 생각한다.

딸이 5학년쯤 되었을 때인가, 조그만 아기들이 정말 귀엽다며 SNS에 뜬 아기 사진들을 들이대길래 "동생 낳아줄까?" 하고 장난 삼아 물었다. 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며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내가 동생인데?"

이젠 동생이 아니다. 함께 떠들고 장난치고 티격태격하던 오빠가 없는 외동이 되었다.

딸이 아들이 떠난 나이가 될 때까지 가슴 죄는 날들을 보냈다. 자살은 어쩌면 남은 가족들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기는 폭력이다. 가해자 자신도 알 수 없는 장난의 희생자이므로 미워할 수조차 없는 폭력. 대개 폭력이 그렇듯,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더 큰 희생자가 된다. 이 점이 조마조마했다.

아들의 빈자리에서 느낄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그해 연말에 강아지 우디를 데려왔다. 8주 된 주먹만 한 말티푸 우디는 처음에는 잠만 잤지만, 곧 대단한 까불이가 되어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주었다. 요즘도 조용하고 순한 테디와 지칠 줄 모르고 장난치는 우디를 보면 아이들이 어려서 놀던 모습이 떠오른다.

세 사람이 된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도 생각해했다. 고스톱이었다. 다행히 승부욕이 강한 딸은 이 게임을 금방 좋아하게 되어, 때로는 몇 판만 칠지 미리 정해놓고 시작해야 할 정도였다. 셋이 둘러앉아서 고스톱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많은 밤을 보냈다.

딸의 친구들을 보는 마음도 달라졌다. 내가 낳은 아이들은 아니지만, 딸 곁에 있어주는 아이들이 그저 고마워서 마음을 활짝 열고 대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 편하게 놀러와서 냉장고에서 먹고 싶은 것 찾아 먹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여행을 갈 때에도 가능하면 친구들을 함께 데리고 갔다. 도로를 달리며 자동차 뒷좌석에서 조잘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뭉클하기까지 했다.

종종 친척들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 세상 어디엔가 나의 피붙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덜 외로울 테니까. 때로는 내 조카들, 즉 딸의 사촌동생들과 영상통화도 틈틈이 연결해 주어 태평양 건너편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모습을 함께 마음으로 응원한다. 한국에도 자주 방문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이 딸의 마음에 스며들기 바라면서.

무엇보다 딸에게 미안해, 사랑해 말을 아끼지 않는다.


매년 돌아오는 아들의 생일과 기일은 아직도 쉽지 않다. 인터넷에는 자녀를 기억하며 기일을 보낼 수 있는 많은 활동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무, 꽃, 또는 추모 정원을 가꾸기

아이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작품, 시, 또는 음악을 의뢰하거나 직접 만들기

아이 이름으로 장학금, 자선 기금, 또는 봉사 프로젝트 시작하기

사진, 이야기, 가족과 친구들의 메시지를 모아 추억의 책이나 영상 만들기

촛불을 켜고 아이가 좋아했던 추억이나 이야기 나누기

가족이 함께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을 요리하고 나누기

의미 있었던 장소 방문하기

풍선이나 등불에 메시지를 적어 날려 보내기

편지 쓰고 소리 내어 읽거나 특별한 상자에 보관하기

아이가 사랑했던 가까운 가족, 친구들과 모이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지지 모임에 참석하기

비슷한 상실을 경험한 다른 가족들과 교류하기

작은 추모 모임이나 편안한 추모 식사 주최하기

하루 종일 아이의 이름으로 무작위 친절 행위 실천하기

아이가 관심 가졌던 단체에 기부하기

아이의 관심사나 열정을 반영하는 단체에서 봉사하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선물이나 돌봄 상자 전하기

평화로운 자연에서 산책하기

집에 사진, 기념품, 의미 있는 물건들로 특별한 공간 만들기

자신의 감정, 기억을 일기에 적기

메시지를 달아 연 날리기

물 위에 꽃이나 종이배 띄우기


우리는 아이에게 메시지를 적어서 특별히 마련한 보관함에 넣는 걸 한두 번 해봤는데 쉽지 않았다. 가족이 각자 틀어박혀서 메시지를 적는 시간이 적막하고 아파서 견디기 어려웠다. 음악이라도 틀었다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잘 맞지 않는 활동이었던 것 같다. 단, 여행지에서 엽서나 쪽지를 쓰는 코너를 만나면 아들에게 쓰곤 한다. 한 번은 딸과 함께 '먼저 보낸 사람들을 기억하는 걷기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받는 묘한 위로가 있었다. 남편과는 기일에 함께 추모공원에 가는 정도가 그날을 견디는 최선의 방법이다. 생일에는 그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하며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는지.


아들을 추억하는 일은 아니지만 연말에 달력을 만들어서 고마운 이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그날 도와줄 사람에게 연락하라는 경찰의 말에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최신통화 버튼을 누르던 황량한 마음이 생생하다.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시간을 홀로 견뎌낼 수 있었을까?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꽃이나 즉석식품이 든 장바구니를 보내준 사람들 중에는 얼굴조차 모르거나 지나치면서 눈인사만 나누었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라면 마음만 아파할 뿐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손길을 내밀지 못했을 텐데. 세상에는 나보다 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에 초롱불을 밝힌 듯 온기가 스며들었었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도움도 이해 가능한 상부상조의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같이 울어주고 어깨를 내어준 친구들에게서도 찢어진 마음이 보였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말한다. "한번 마음을 봐버리면, 그다음부턴 모른 척이 안 돼." 나도 사람의 마음을 보아버렸고, 안 본 걸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조문객의 말이 사려 깊지 않게 들려도 그 마음은 똑같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려고 조문 가는 사람은 없다고. 아들을 떠올리면, 벼랑 끝에 선 우리 가족을 붙잡아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길어 올려진다. 매년은 아니지만 달력을 만들어 보내면서 그 고마움을 기억한다.


유부모의 삶은 어색하다. 사전에는 유가족, 유자녀, 유족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유부모는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도 없는 어색한 단어. 흔히 고아나 과부라는 말은 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은 그 고통이 표현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고통의 크기를 모두 한 줄로 늘어놓으면 자식을 잃는 고통이 가장 커서 그 단어를 차마 만들지 못한 걸까?

사실 자식을 잃은 부모를 가리키는 표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어권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빌로마(Vilomah)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다는 뜻으로, 듀크대학의 한 교수가 자녀를 잃은 뒤 사용하여 영어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히브리어에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일컫는 샤칼(Sh"khol)이라는 단어가 있긴 하다.


각 문화권에서 유부모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는 건, 어쩌면 오래 전에는 그런 아픔이 드물지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민족별로 언어와 문화가 형성되던 시절에는 자녀를 잃는 것이 부모나 배우자를 잃는 일보다 훨씬 흔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자녀가 다섯 살을 넘기기 전에 병마에 빼앗기는 일도 흔했을 것이고,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놀고 일하고 싸우다가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 않았을 테니까, 자식을 잃었다고 별도의 명칭을 붙여줄 명분이 크지 않았을 지 모른다.


또 하나는, 부모는 자식을 잃어도 처지가 바뀌지 않으니까 별다른 명칭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는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처지가 된다. 남편을 잃은 여자도 생업을 이어가면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며 보살핌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아내를 잃은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밥상이 부실하고, 이부자리와 아이의 차림이 눈에 띄게 꼬질꼬질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 고통이 눈을 뽑는 고통이거나 창자를 끊는 고통이거나 처지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남은 가족을 위해 일자리로 가야 하고 어머니는 남은 가족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한다.


어느 순간 이 생각이 들자 나의 고통이 견딜만하게 느껴졌다. 달라진 삶이 어색하긴 해도 가슴에 꽉 끌어안고 살면 살만 한 삶이라고. 내 아들의 기억은 내 삶의 길이만큼, 내 삶의 품질만큼 이 세상에 존재할 거니까 내 삶을 이전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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