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헤이그의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항우울제를 삼킨 주인공 노라는 안개가 자욱한 도서관에서 눈을 뜬다. 시간이 자정에 멈춰있는 이 도서관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중간 지대이다. 그곳에는 노라가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살아볼 기회가 담긴 책들이 꽂혀 있고, 책을 골라서 펼치면 자신이 선택한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소설처럼 여러 선택지 중에서 이런 삶과 저런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의 삶은 단 한 번뿐이며, 삶의 많은 부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부모님에게서 받은 유전자를 통해 고정값으로 주어진다. 내가 받은 고정값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나의 "아스피(고기능자폐)" 성향은 부모님 중 한 분에게서 나에게 전달된 고정값이었다. 이 성향의 정체를 내가 미처 명확히 깨닫기도 전에 이 고정값은 내 아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아이의 삶이 잘 작동하지 않은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내게 이 유전자를 전달한 사람은 아빠이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듯하다. 돌아가신 친할머니께서는 엄마가 시집왔을 때 "얘가 지 애비를 똑 닮아서 네가 마음고생 좀 할 거다"라며 보약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아빠는 이런 성향의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하고 평온한 삶을 사셨다. 반면, 엄마는 할머니의 우려대로 긴 마음고생을 하셨다. 일명, "카산드라 증후군". 친밀해야 할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을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하여 아스피들의 배우자들에게 생기는 마음의 병이다. 엄마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공감 능력이 없고, 배우자를 배려할 줄 모르고, 소통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무시하고, 남 걱정만 하고 사는지,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딸들, 특히 장녀인 나에게 알알이 쏟아내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아빠는 분명히 다정다감하고 네 딸에게 서운한 말 한마디 내뱉지 않는 딸바보였는데, 그런 아빠가 엄마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새 아빠는 나에게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미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빠를 빼닮은 나 자신도 밉고 수치스러웠으며, 아빠와 나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 엄마도 오랫동안 가까이하기 싫었다. 엄마의 카톡 전화가 울리면 오늘은 어떤 아빠의 만행을 듣게 될까 무서웠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이 내게는 인간으로서 따르기 힘든 잠언처럼 보였다.
어느 해인가 부모님이 미국 우리 집에서 한 달 정도 머무셨다. 아빠는 내 아들 방에서 주무셨는데,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지내는 모습이 참 묘했다. 일단 아주 조용했다. 둘 사이에 실용적인 질문과 답변이 아주 가끔 오가긴 해도, 대체로 각자 컴퓨터나 책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부딪힐 여지가 전혀 없어 평화로우면서도, 피를 나눈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을 때 마땅히 기대되는 어떤 교류도 일어나지 않는 적막감. 남편은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르고, 어딘가 매우 비슷하다"라고 했다. 나는 화가 벌컥 났다. 느끼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킨 걸까. 두 사람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걸. 아들은 그걸 일찌감치 느끼고 뭔지 잘못되었다는 답답함에 괴로워했고, 아빠는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완강히 부인했을 뿐.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한 기능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사는 삶은 어렵다. 고기능 자폐인의 자살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월등이 높다는 것이 이 사실을 방증하다. 고기능이라는 단어 때문에 레인맨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천재를 떠올릴 수 있지만, 지능 장애가 없는 자폐라는 의미일 뿐이다. 생활에 지장이 없어 진단을 받는 비율이 높지 않다고 추측할 수 있다. 최근 연구들은 자살 시도 또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고기능 자폐로 진단된 사람의 비율이 일반 인구에 비해 20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1). 고기능 자폐와 우울증의 상관관계는 자살과의 상관관계보다 낮은 약 3~4배 정도로 추측된다 2). 아스피로서 관계 형성의 어려움이 우울증으로 이어지기 쉽고, 우울증에 빠진 아스피는 자살로 더 쉽게 간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아스피의 자살에 반드시 우울증이 선행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조차 힘든 심한 무기력감을 동반하는 주요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어 심한 우울감의 느낌을 주관적으로 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서른이 훨씬 넘은 후였고 우울증을 촉발할 만한 여러 상황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죽음을 자주 떠올리기 시작한 때는 심한 우울감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인 열 살 전후부터였다. 모든 삶이 죽음으로 마감하는데 그걸 잊고 지내는 삶에 그냥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것은 아들도 비슷했다고 추측한다. 둘 다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
무자비한 솔직성이라는 아스피 성향이, 삶의 어떤 모순을 완전히 모른 체하고 살아갈 수 없도록 하여 심한 우울감이나 촉박 상황 없이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기여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나와 아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모순들이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아들이 대학 원서를 준비할 때였다. 식물 기르는 걸 좋아하니까 농학을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아들의 대답은 "No"였다. "농업은 식물을 사랑해서 기르는 게 아니잖아요. 먹으려고 기르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도 고기를 먹을 때 문득문득 평화롭게 풀 뜯는 소와 도살되는 장면이 오버랩되어 구토를 느낄 때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 안 쓰는 듯 보이는 잔인한 모순이 조영제를 머금은 암세포처럼 보이는 걸 어쩌라고. 그렇다고 모든 아스피들이 인생을 블랙코미디로 보는 건 아닌 듯하며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고기능 자폐는 전체 인구의 0.5~2%가량으로 추정되는데 남녀 비율이 4:1~9:1로,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3) 4). 실제 남성에게 많을 수도 있지만, 여성의 경우 이런 성향을 감추는(Masking) 행동과 사회 순응 기능이 더 뛰어나서 진단까지 오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아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나도 이 사실을 직면했을 것 같지 않다. <Aspergirls: Empowering Females with Asperger Syndrome>(아스퍼걸: 아스피 여성을 위한 실질적 조언)을 쓴 루디 시몬(Rudy Simone)은 저자 본인이 아스퍼거스로 진단을 받았다. (2013년 DSM-5부터 아스퍼거스라는 진단 분류가 없어지고 자폐스펙트럼 내에 통합되었다.) 저자의 자전적 경험뿐 아니라 진단을 받은 여러 여성들의 사례가 풍부하게 들어있어서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매우 공감 가는 책이었다. 딸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다 읽은 뒤 물어봤다.
"엄마는 어떤 거 같니?"
"엄마 아스피 맞아. 긴장 해소 행동(Stimming behavior) 진짜 많이 하거든. 의미 없는 소리를 중얼거릴 때도 많아."
그것뿐이었을까. 아스피 엄마에게서 이 아이가 답답함을 느낀 적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슴이 저린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과거이지만 한번 돌아본다. 내가 억압하고 살았던 내면세계가 아이가 보는 세상에 투영되었을 과거. 모든 아이는 연극의 2막 한가운데서 태어난다 5). 어떤 연극이 상연 중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 자신이 오른 무대가 어떤 곳인지 서서히 배워간다. 아이는 부모가 오랫동안 억압해 왔거나 현재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직관적으로 감지한다. 융 심리학자 위키스(Wickes)는 "아이들은 우리가 자신 안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무시하는 모든 것의 분위기를 우리에게서 흡수한다"라고 했다 6). 의식적으로 긍정과 확신을 전하더라도 내면의 억제된 두려움이 있다면 아이의 예리한 감각은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엄마가 되지 말아야 했을까,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는 왜 결혼해서 나를 낳았고, 나는 왜 아이들을 낳아서 괴로운 삶을 물려주었는지. 유전자의 속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에 원통하기도 했다.
그런데 완벽한 고정값이 주어진 사람만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인간은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내 외할머니는 "모든 부모는 죄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이제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부모는 완벽할 수 없기에 때로는 의도치 않게 자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지 못하여 깊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고 유전자를 통해 내가 물려받은 괴로움을 내 자녀도 짊어져야 함을 알기에 또 죄인이다. 모든 부모는 죄인이다.
나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책 한 권을 뽑을 수 있다면, 내 삶이 괴로운 것이 아스피 성향 때문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인정하고, 나의 부족한 점을 끌어안고 사는 법을 아는 엄마가 되었다면. 현실의 삶에서 뼈아픈 비극을 통해 이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는 오히려 아스피로서 내 모습을 끌어안게 되었다. 그런 진단명이 있는 줄 조차 몰랐던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적당한 대답을 지어냈던 내 모습을 위선적인 가면이 아니라 노력으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어른이란, 사회가 용납하는 모습의 가면을 적절히 골라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아스피로 태어나서 꿋꿋이 살아온 내 모습을 대견한 눈으로 봐주고 싶었다.
<황금방울새>에서 보리스는 "어떤 사람들은 악함과 실수를 통해서만 선에 다가갈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과오를 통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성장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에게 이런 비극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비극을 통해 배운 걸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아들이 내게 남긴 소중한 선물을 풀어보지도 않고 내다 버리는 것이니까. 내가 배운 건 아들이 남긴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모님을 용서하고 싶어졌다. 아스피로서 직장 생활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얼마나 큰 괴로움을 견뎌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딸들에게 아들 없는 서운함을 내색 한 번 안 하고 각자의 재능을 세심히 보아주고 최선을 다해 키운 아빠. 지금은 상담이라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공감할 줄 모르는 남편과 평생을 산 엄마에게 진정한 연민을 갖게 되었다. 엄마가 내게 준 훌륭한 가르침들은 몇 날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이다. 비로소 두 분에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1) María Arqueros et al., "Camouflaging and suicide behavior in adults with autism spectrum condition: A mixed methods systematic review", Research in Autism, Volumes 121–122, March–April 2025, 202540.; Cassidy, S et al. Autism and autistic traits in those who died by suicide in England. BJPsych; 15 Feb 2022
2) Barbara FC van Heijst et al., "Autism and depression are connected: A report of two complimentary network studies", Autism 2020, Vol. 24(3) 680–692
3) Zeidan et al., 2023. “The global prevalence of autism spectrum disorder: A three-level meta-analysis.” Frontiers in Psychiatry (2023)
4) Loomes, Hull & Mandy (2017). “What is the male-to-female ratio in autism spectrum disorder?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Child & Adolescent Psychiatry.
5) Robert L. Powers, "Myth and Memory." Alfred Adler: His Influence on Psychology Today,
edited by Harold H. Mosak, Noyes Press, 1973, pp. 271-290.
6) Frances G. Wickes, The Inner World of Childhood, Prentice-Hall, Ine.,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