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편한 자신과의 친절한 면회 I

by 글벗

아주 어릴 때부터 안개가 낀 듯, 늘 머리가 답답했다. 그 단어가, 그 정보가 분명 내 머릿속 어디쯤 있는 걸 아는데, 아무리 쥐어짜도 떠올릴 수 없었다. 내 두개골을 쪼개면 곱창처럼 구불구불하고 기다란 뇌에 이끼 같은 물질이 잔뜩 끼어있을 것 같았다. 뇌의 내용물을 몽땅 쏟아놓고 뇌를 뒤덮은 더께를 칫솔로 깨끗하게 닦아내는 상상을 줄곧 했다. 그 사건이 있고, 또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더욱 뿌옇게 된 느낌이어서 이 상상은 요즘도 가끔 한다.


답답한 건 머리만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몹시 불편하고 답답했다. 교실 안에는 영롱하고 화려한 컬러의 아이들이 무리 지어 앉아있고, 나는 그 틈에 엉뚱하게 놓인 무채색 존재 같았다. 재치 있고 야무진 말을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회색빛 관찰자. 주위에서 지금 벌어지는 분위기를 알아채고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이 나에겐 없었다. 입만 열면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오는 내 모습이 그저 바보 같고 싫었다. 초등학교 때 낯선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한 아이가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그 아이와 점심시간에 밥도 같이 먹고, 집에도 함께 걸어갔다. 2학기 반장 선거 때 후보에 내 이름이 오르자 그 친구가 무척 놀라며 말했다.

"난 네가 바보인 줄 알았어."

내가 왜 바보 같고 이상한지, 어떻게 하면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있는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평범한 아이가 되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살았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이상하다"는 피드백은 꾸준히 나타났다.

어떤 날은 짝꿍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짝꿍은 점심시간에 교실에 들어와서 담임선생님과 울면서 뭔가 한참 이야기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네가 짝꿍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면서? 왜 그랬니?"

내가 짝꿍에게 말을 안 걸었던가? 기억에 없었다. 짝꿍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나도 말을 했을 텐데. 난 그저 당황스러웠다.

어떤 날은 반 친구에게서 쪽지를 받았다.

"네가 이상해서 못된 아이인 줄 알았어. 오해해서 미안해"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얼굴조차 모르는 국민학교 동창에게서, 자신의 누나가 집에 오면 같은 반의 "정서불안" 아이(나를 일컬음)의 흉내를 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이상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멀쩡하네."

언젠가는 자폐아동 캠프 자원봉사를 다녀온 친구가, 자폐가 있는 아이들은 밥 지을 때 밥물을 못 맞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쩌지? 나도 못 맞추는데.) 아직까지 나는 밥솥을 살 때 따라온 눈금컵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어서 그 눈금컵을 잃어버릴까 봐 늘 전전긍긍한다. 내가 정상 범주 바깥에 있다는 피드백을 받을수록 그 안에 드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무던한 척했고, 상황을 모두 이해하는 척했고, 가장 알맞은 반응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찾아냈다. 애처로운 노력 덕분에 나는 비교적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아들에게는 나의 "이런" 답답한 모습이 보였다. 삶을 무진장 힘들게 하는 모습. 어떤 모습이 "이런" 모습인지 어렴풋이 느낄 뿐,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드러나는 공통점을 꼽아보면, 운동을 극도로 싫어하고 키가 작다는 신체적 특징, 주사 맞는 것을 심하게 두려워해서 거의 발작 수준의 반응을 보이고 병원에서 뛰쳐나갔던 일들, 롤러코스터 앞에서 극한 공포를 느껴서 못 타는 점, 죽음을 늘 진지한 현실로 생각했던 점 정도랄까. 딸은 내가 못 보는, 또는 애써 숨기는 면들을 보았는지 "기본적으로 엄마와 오빠는 동일 인물"이라고 한 적도 있다. 딸에게는 이점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엄마는 오빠의 마음은 다 이해하면서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렇게 나와 비슷한 아들이 나처럼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을 늘 품고 살까 봐 걱정스러웠다.


아들을 보낸 뒤, 나의 "이런" 모습을 더 이상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두세 달 후부터 심리치료사를 만나면서 평범의 가면 아래 숨어있는 나의 지긋지긋한 내면의 짐을 모두 덜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원을 불행하게 잃은 가족이 또 다른 비극을 맞거나 해체되는 일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가족보다 흔하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비극에 기여했던 그 어떤 과오의 원인도 모두 바로잡고 싶었다.


심리치료사는 그 이야기를 차차 하자고 했다. 지금은 자신에게 친절할 때라고.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경향이 있는데, 좀 친절하게 대하세요."

한 조문객이 해준 말도 마음에 남았다.

“더 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많은 후회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아무리 애써도 바꿀 도리가 없어요.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건,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죠.”

(You surely have a lot of could’ves, would’ves, and should’ves, but they’re all in the past. No matter what you do, you can’t change it. Don’t waste your energy on things you have no power to alter — they’ll only consume you.)

비애에 젖어있던 시기에 들었던 사려 깊은 조언들은 내가 단숨이 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그때 서둘러 자책하고 후회와 죄책감에 빠지지 않은 덕분에 나는 마음을 천천히 추스를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내면의 다락방 정리를 시작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아마 삼 년쯤 지난 뒤였던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프리솔로>라는 다큐 영화를 우연히 본 것이 계기였다. 요세미티의 엘 캐피탄을 맨손으로 등반한 알렉스 호놀드를 다룬 이야기인데, 이 등반가의 성격과 행동이 묘사된 부분이 어딘가 나의 아들을 많이 닮아있었다. 알렉스의 어머니가 이혼한 뒤 자살한 남편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묘사한 남편의 모습이 특히 그랬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 같으면 남편은 아스퍼거스로 진단을 받았을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꽤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정신건강과 심리에 관해 쓴 많은 책을 읽었지만 우리의 상황과 정확히 관련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은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만일 나와 내 아들에게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다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나와 아들은 자폐스펙트럼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꽤 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이 사실이 아들의 죽음을 전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자폐스펙트럼이 있어도 훌륭하게 아이를 길러내는 부모도 많고,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 아들도 나 자신도 공감 능력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부족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심리적 바운더리가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주위의 감정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편이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불충분한 정보만 가지고 장애가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