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터키, 우리만의 시간으로

— 프롤로그 : 25년 부부, 성스러운 길 위에서 다시 만나다

by Shin란트로

또 다른 '처음'이 시작되는 자리

멀리서 바라보면 여행은 언제나 특별하다. 특히 중년의 경계에 서서 인생의 굵은 이정표를 넘어섰을 때의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묵직한 떨림을 안겨준다.

우리 집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이 집을 지켜온 시간이 어느덧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편안함과 허전함이 묘하게 어우러진 그 시간. 결혼 25주년을 맞아 남편과 단둘이 떠난 첫 결혼기념 여행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아이들 없이, 우리 둘만의 여행이라니!'


그동안 여행은 늘 가족 중심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장소, 부모님이 피곤하지 않을 거리, 가족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음식….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편이 어떤 곳을 보고 싶어 하는지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도전이자 축제였고, 다짐이기도 했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울고 웃으며 꾸준히 살아온 한 남자와 더 오래, 더 깊이 함께 걷고 싶은 내 마음이 담긴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미 시작된 여행

여행이란 준비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고 하지 않은가. 항공편과 호텔, 코스만 고르는 계획이 아니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어떤 도시를 택할지, 어느 길을 달릴지, 어디에서 디저트를 먹을지 두 사람이 고르고 상상하며 설레었던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고르고 또 고른 항공권, 도시마다 다른 렌터카, 터키와 그리스 현지의 사소한 정보,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한 성지의 역사까지. 남들이 대신 짜놓은 여행이 아니라, 오롯이 우리 둘이 디자인한 '자유여행'.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스물다섯,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것이 다시 올라왔다.


낯선 길 위에서 만난 익숙한 옆지기

그리스에 도착한 첫날,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산토리니의 하얀 집들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마치 그림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평소 감성보다 이성이 더 발달한 그가 연신 "와, 정말 아름답다"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터키로 넘어오면서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색으로 바뀌었다. 그리스가 파란 이미지라면, 터키는 빨간색이 떠오른다. 고대 신화와 인류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든 땅. 리디아 문명에서부터 헬라, 로마,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혼재된 역사, 부드러운 차와 향신료 냄새, 활기찬 시장 풍경, 그리고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아침의 골목. 모든 게 낯선 듯 익숙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여행이란 새로운 장소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가는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남편의 진지한 모습,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과 통찰력, 그리고 나를 배려하는 세심함을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알게 됐다.

산토리니 이아(Oia) 마을에서

렌터카 자유여행, 나만의 속도로 걷는 연습

패키지여행이 아닌 우리만의 루트. 산토리니에서 그리스 본토로 갈 때, 그리스에서 터키로 갈 때,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로 갈 때, 이 세 구간은 비행기로 이동하고, 나머지 구간은 남편이 직접 운전해서 다녔다.

렌터카를 타고 섬과 육지, 해안과 내륙을 달렸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넘나들며 마음까지 넓어졌다.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해방감과 성취감이 함께 밀려왔다. 패키지여행이었다면 정해진 시간에 서둘러 사진 찍고 이동하느라 바빴을 텐데, 우리는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고, 피곤하면 충분히 쉬었다. 길을 잘못 들어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특별히 성지순례 구간은 우리 부부가 함께 공부했다. 역사와 문화, 신앙의 결을 따라 순례자의 마음으로 한 곳 한 곳 천천히 밟아갔다. 유명한 바위나 건물 앞에서 사진만 찍고 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머물러 기도하고, 성경과 책에서 읽은 내용을 둘이서 나누었다.


그 과정은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예배이자 성찰이었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이천 년 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감동을 느꼈다. 빌립보의 유적지에서, 카파도키아의 동굴 교회에서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를 함께 달린 겨자색 Peugeot 차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꿈꾸며

이번 여행은 여느 다른 여행과 다르게 마치고 돌아와서 글로 남기고 싶었다. 단순히 어디를 갔고 무엇을 봤다는 기록이 아니라,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써보고 싶었다.

오십 대가 되어서도 새로운 나를 만나는 법, 스물다섯 해를 함께 살아온 부부가 다시 연인이 되는 법, 아이들을 모두 키운 중년에 인생 2막의 꿈을 꾸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앞으로 another 25년도 잘할 테니, 또 준비하옵소서."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또 다른 청춘으로 안내하는 새로운 인생의 서막. 이 여행이 그랬다.



방문한 도시들이 역사가 오래되어 고대에 불렸던 이름과 현재의 지명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본 에세이에서는 혼용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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