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비행기 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고, 집을 나서던 그 순간이 벌써 아득하기만 하다. 일상의 삶은 서서히 뒤로 하고, 눈앞에 펼쳐질 낯선 도시와 바다를 상상하며 설렘과 기분 좋은 두려움을 동시에 품었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의 현관문을 다시 열었을 때, 내 삶이 익숙한 듯 어색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처럼 말이다. 처음엔 아늑한 소파가 어색했다. 부엌의 음식 냄새, 저녁나절 창밖의 노을, 심지어 집 앞 작은 화분까지도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게 새삼 아름답게 보였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여행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오히려 여행은 내가 뒤로 두고 떠났던 삶과 사람들, 그리고 나를 다시 사랑하라고 속삭여줬다.
25년 한 남자와 손을 잡고 살아낸 인생, 그리고 함께한 그리스와 터키의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새로워졌다. 결혼의 무게와 농도가 더해짐에 따라, 서로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했고 더 깊어졌다. 남편의 설익은 농담에 새삼 웃음이 났고, 작은 걱정도 작은 기대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여행은 우리 사이에 새로운 대화의 물꼬를 틔워주었다.
25주년 결혼기념으로 갔던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 여행은 그저 달콤한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의 '후반전'을 다시 시작하는 조용한 출발 신호였다. 내가 떠났던 그 길은 결국 나에게로, 그리고 내 일상으로 부드럽게 돌아오는 별의 둘레 같았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여행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나 '해방'이라 말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좀 달랐다. 도피가 아니라, 다시 일상으로 건강하게 돌아오기 위한 '나그네의 산책길' 같았다.
나그네가 된다는 건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처음 마주하는 공간과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둔다. 여행지가 내 속에 스며드는 동안, 내 안의 경계도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생소한 풍경, 낯선 언어, 작은 친절 앞에 나는 세상의 너그러움을 다시 배웠다.
사실 여행이 항상 새로운 장소일 필요는 없다. 매일 오가던 골목길도, 스쳐 지나던 동네 카페도 충분히 '여행'이 된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전지적 작가 시점’의 눈만 가지면 된다. 제삼자가 나를 바라보듯, 내 삶을 틀 너머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오랜만에 설렘과 호기심을 느끼게 될 테니까.
이런 여행은 평범한 내 일상에 감사를 끌어당겼다. 언제나 있던, 그래서 잊고 살았던 관계와 순간들이 다시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여행은 일상의 당연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시선을 선물해 준다.
내가 멀리까지 떠났던 이유는 결국 내 자리, 내 세계, 내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나 보다. 호텔 창밖의 새벽빛, 새로운 음식 한 입, 돌길에 부딪치던 발자국 소리, 그 모든 게 내 세계의 경계를 조금씩 넓혔다. 타인의 시선과 낯선 방식에도 마음을 열고 좀 더 유연해졌다.
어쩌면 여행의 진짜 목적은 내 안에 숨은 나를 만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삶의 반복된 페이지 속에서 새로운 한 줄을 시작할 용기를 내 안에서 꺼내 놓았다.
렌터카의 흔들림 속에서,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오래된 돌길 마을에서,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여행이라고 해서 꼭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긴 비행과 먼 나라, 대단한 모험만이 여행은 아니다. 오늘, 집 근처 낯선 골목을 걸어보는 것, 평소 들어가지 않았던 음식점에 들어서는 것, 그런 용기가 모두 여행을 시작케 한다. 일상을 조금 벗어난 자리에서, 익숙함 대신 새로움에 마음을 열 때,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나만의 여행’을 시작해 보길 권한다. 떠나고 싶지만 망설여졌다면, 용기 내어 한 번쯤 나그네가 되어보자. 그 길 위에서 당신은 분명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테니까.
25주년 부부여행, 그리고 성지순례에서 나는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충전했다. ‘하프타임’ 같은 여행 덕분에 인생의 '전반전'에 갇혀 있던 마음이 열렸다. '후반전'이 더 즐겁고, 더 사랑스럽고, 더 소중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전반전’이 끝나버렸다고, ‘경기’가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든, 삶은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
함께 걷는 동행이 있다면, 그 감사함은 더 크다. 하지만 혼자라도 상관없다. 다시 한번 나를 사랑할 용기를 낸다면, 다시 한번 걸어보자는 맘이 든다면, 이미 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내일, 가까운 곳이라도 '나그네의 용기'를 꺼내 한 번 걸어보자. 그 발걸음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감사와 사랑, 새로운 시작의 힘을 이 글의 끝에서 건넨다.
그대, 오늘도 좋은 여행길 위에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