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가마, 하늘에 닿은 신들의 도시

by Shin란트로

여행의 마지막, 가장 높은 곳에서

베르가마(Bergama)는 이번 터키 여행의 마지막 도시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이스탄불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게 우리의 일정이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한 베르가마는 기원전 3세기 아탈로스 왕조가 다스리던 헬레니즘 왕국의 수도였다. 고대에는 페르가몬(Pergamum)이라 불렸고, 로마 시대엔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고,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의료 시설은 너무나 유명해서 로마 황제들까지 치료받으러 올 정도였다.

이곳엔 그리스 신들의 신전은 물론이고 황제를 신으로 모신 신전까지 가득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 트라야누스 황제까지. 한마디로 ‘복합 신전 센터’라 불릴만한 도시였다.


붉은 건물의 변신은 무죄?!

베르가마 일정의 첫 시작은 붉은 벽돌 바실리카(Red Basilica)다. 폭 100미터, 길이 260미터, 높이 20미터라니, 한눈에 봐도 압도적인 규모다. 지금은 가운데가 무너지고 천장이 뚫렸는데도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서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붉은 벽돌 바실리카(Red Basilica)

원래는 이집트 신 세라피스와 이시스를 모신 신전이었다. 세라피스는 치료의 신이고, 이시스는 생명과 부활의 여신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간구했었다. 비잔틴 시대가 되자 이곳은 버가모 교회로 변모했다. 그 이후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신전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사원으로. 사람들이 찾는 신은 바뀌었지만, 그들이 갈구했던 바람은 변하지 않았다.


과연 내 마음의 왕좌에는 누가 앉아 있을까. 이 건물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인이 바뀌고 있지는 않나 되돌아보게 된다.


건물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쪽에 작업실 같은 공간이 보였다. 해외에서 왔다는 고고학자들이 지금도 발굴과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계속 걷다 보니 주변에는 부속 건물들이 여럿 있었다. 원래 창고였다는 로툰다 형식의 건물은 현재 모스크로 사용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 바실리카(Red Basilica) 앞쪽으로 로툰다가 보인다
로툰다 건물 내부

강한 햇볕을 피하느라 가로수 아래로 걸었다. 바닥에 빨간 열매들이 보였다. 오디였다. 터키는 가로수로 뽕나무를 많이 심는다.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나라인지라 뽕나무는 오랫동안 친근하면서 삶에 유용한 나무였으리라. 뽕나무 하면 삭개오만 생각났는데, 이제 내 기억 속에는 터키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베르가마의 뽕나무 가로수

영혼육의 건강, 진정한 웰니스를 찾아서

아스클레피온(Asklepieon)은 세계 최초의 종합 치료센터다. 이 병원은 의술과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전쟁에서 다치거나 병든 이들은 콜로나드 돌기둥이 늘어선 '성스러운 길'을 따라 들어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치유를 향한 간절함이 깊어졌을 것이다.

치유를 위해서 ‘성스런 샘물’에서 몸을 씻고 치료 병동으로 연결된 지하터널을 걸어간다. 그 샘물에는 지금도 물이 나오고 있었다. 방사능이 함유된 온천수로 목욕하거나 마시는 치유법은 고대에 흔히 행해졌다. 그때는 물에 신비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마시지 말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성스런 샘물, 뒤로 치료를 위한 공연장이 보인다.

의사들은 터널 위에서 환자를 따라 걸으며 환기구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줬다고 한다.

우리도 뜨거운 햇볕을 피할 겸 터널을 걸어봤다. 적당히 스며드는 밝은 빛줄기, 맑게 공명하는 물소리, 게다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의 말까지 들려왔다면 몸도 마음도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터널이 되기에 충분했겠다.

성스런 샘물에서 물 치료실로 향하는 지하터널

기본 치료는 수술과 약초 치료, 마사지 같은 물리치료였다. 욕탕에서는 따뜻한 물로 심리치료도 했다. 작은 원형 극장에서는 치료 목적의 공연만 열렸는데 희극만 공연했다. 웃음이 최고의 치료제라는 걸 그때도 알았나 보다. 꿈 치료와 아로마테라피, 식이요법도 같이 행해졌다.

수술과 약물로 몸을 치료하고, 연극과 꿈 해석으로 마음을 달래고, 신성한 의식으로 영혼을 회복시켰다. 물론 미신의 흔적도 곳곳에 보였다. 그래도 사람을 영혼육의 통합체로 이해하고 치유했다는 게 인상 깊었다.

물치료를 했던 목욕탕 터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인 '지팡이를 휘감은 뱀'은 지금도 병원이나 보건기구 로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경 민수기의 놋뱀 이야기가 떠올랐다.

독사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둘로 갈렸다. 믿고 고개를 든 이들은 살았다. "말도 안 돼" 하며 외면한 이들은 죽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몸의 치유에는 약만 필요한 게 아니다. 마음도 함께 낫아야 한다. 플라시보 효과를 보라. 똑같은 치료인데도 믿는 사람에게 효과가 나타난다. 신뢰가 치유를 부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까지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살다 보면 상처나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아픔은 반갑지 않지만, 결국 우리 삶의 일부다. 상처받을 수 있기에 치유가 소중하다. 절망할 수 있기에 희망이 빛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아픔을 통과하며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절망의 시간을 지나며 더 간절히 살아가는 법을 익혀간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워지듯, 우리도 그럴 때가 됐다.

남편과 나, 이제 예전 같지 않다. 쉼 없이 달려오느라 아픈 줄도 몰랐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마음에 난 생채기들도 보인다. 부드럽던 영혼이 환절기 내 피부처럼 건조해진 걸 느낀다. 인생의 중간쯤에서 지금까지 쌓인 상처와 피로를 치료하고 보듬어줄 때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반절의 날들을 사랑하며 살다가(well being),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게 마무리(well dying)할 수 있을 테니까.

아스클레피온(Asklepieon)의 상징인 뱀과 아스클레피오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베르가마 아크로폴리스(Bergama Akropolis)는 390미터 높이의 험준한 산 정상에 있었다. 입구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아래로 걸어 내려오며 하나씩 둘러보기로 했다.
케이블카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큰 도시를 세웠다고?’
그 의지도 대단하고, 그 기술도 대단하다 싶었다.

페르가몬 왕국이 가장 자랑했던 건 도서관이다. 페르가몬 도서관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 신전 옆에 터만 남아 있었다. 당시 이곳엔 20만 권 이상의 책이 있었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함께 고대 세계 3대 도서관 중 하나였다. 급부상하는 페르가몬에게 위기의식을 느낀 이집트는 급기야 파피루스 수출 금지를 발표한다.
더 이상 책을 만들 수 없게 된 페르가몬.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나. 그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동물 가죽을 이용한 양피지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 주도형 대규모 기술 투자를 통해 바로 페르가몬의 종이 '페르가메나(pergamena)'를 개발했다. 물에 빠져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했지만, 이 계기로 파피루스보다 훨씬 진화한 기록 수단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양피지(parchment)가 페르가몬에서 유래한 이유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살길은 있었다. 한쪽 문이 닫힌다고 끝이 아니다. 페르가몬 사람들은 파피루스라는 문이 닫혔을 때 양피지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길이 막힌다는 건, 사실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일뿐이다. 단지 내가 예상한 길이 아닐 뿐.


가치를 모르면 잃어버리게 되고

탁 트인 하늘 아래 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Greek Theater)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산비탈을 타고 만들어져서 아찔할 만큼 가파른 경사였다. 그 아래로 평야와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 산맥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 아크로폴리스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던 제우스 신전(TEMPLE OF ZEUS)이 있었다. 높이 10미터에 길이 30미터가 넘는 제우스의 웅장한 제단(Pergamon Altar)은 1878년 독일로 반출되어 지금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텅 빈 제단 터에는 소나무 세 그루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이 씁쓸해졌다. 수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원래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옮겨간 경우가 많다. 유물의 주인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그 시대의 패권 열강들은 그 가치를 알아봤다. 그래서 발굴할 재정과 학자들을 제공했고, 주인 나라들은 그 소중함도 모른 채 헐값에 내주거나 밀반출당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알고 있을까. 익숙해서 소중한 줄 모르는 것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오히려 가장 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늘 곁에 있어서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의 따뜻함은 그게 사라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의 크기를 깨닫는 게 우리 인간이다.

내 안의 달란트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너무 익숙해서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들. "나는 특별한 게 없어"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 하지만 그게 사실은 나만의 보석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부러워할 나만의 색깔인지도.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보석을 캐내자. 먼지 쌓인 달란트를 꺼내 닦아내자. 멀리서 보물을 찾으려 헤매지 말고, 이미 내 안에 있는 것부터 알아보자 싶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최정상이다. 로마의 오현제이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 트라야누스의 신전(The Sanctuary of Trajan) 기둥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한 인간을 위한 건물을 이렇게까지 크게, 그것도 이 산 꼭대기에 지었다니...

뷰맛집임에 틀림없지만, 마음 한구석은 개운치 않았다. 그리스 신들이 총집합해 있고, 신이 되고픈 로마 황제들까지 함께 입주해 있는 '시티뷰 다세대 주택 단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신을 아는 사람은 아래로 아래로

베르가마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산 위에 온갖 신전들이 자리해 있어, 성경에는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사방에서 우상 숭배가 이루어지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버가모 교회를 이끌던 사람이 ‘안디바’다.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는 달궈진 놋쇠 황소 안에서 불태워졌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력한 리더십을 잃은 공동체는 큰 혼란을 겪었다. 이방 종교와 타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에게도 절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

아크로폴리스의 높은 곳에서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겉으로는 높고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여러 가지 다른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진짜 높은 곳은 어디인가

정상에서 베르가마를 내려다봤다. 현대적 빌딩과 오스만 모스크, 전통 저택들까지 한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내 인생 같기도 했다. 어린 시절과 청춘의 때, 지금의 중년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기억의 풍경 같았다.

‘높은 곳’이라는 뜻의 베르가마. 그중에도 가장 높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진정 높은 게 무얼까 질문하게 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베르가마 시내, 붉은 벽돌 바실리카가 한눈에 들어온다.

페르가몬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에 신전을 지었다.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몸부림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거다. 높은 곳에 오르면 뭔가 특별해진 것 같은 착각, 내려다보는 시선이 주는 우월감이 있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신전들도, 신으로 숭배받던 황제들도, 20만 권의 책을 자랑하던 도서관도 결국 시간 앞에서 무력했다. 높이 오른 것들이 더 높이서 무너지는 걸 보게 됐다.


진짜 높은 곳은 어디일까. 물리적으로 가장 높은 산꼭대기일까, 권력의 정점일까. 답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내려갔느냐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안디바를 생각했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옳다고 믿는 한 가지를 삶의 끝까지 지켰다. 흰돌 같이 올곧은 마음 하나 지키는 삶. 그게 진짜 높아진 삶 아닐까.


유적지 한편에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다. 폐허 속에서도 생명은 끈질기게 피어난다. 아니, 어쩌면 폐허라서 더 아름다웠다. 완벽함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은 더 붉고 더 생생했다. 그 모습이 안디바처럼 보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져 내려도, 제자리에서 묵묵히 피어나는 생명. 그게 진정한 승리였다.


실용 여행 정보

베르가마는 이즈미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케이블카(Akropol Teleferik Pergamon)는 왕복과 편도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시간이나 체력적 제한이 있다면, 왕복으로 사서 아크로폴리스 상부만 보고 내려오는 방법을 추천한다. 전체를 보고 싶다면, 4~5시간은 족히 걸린다. 케이블카를 편도로 타고 올라간 후, 걸어 내려오면서 상부와 하부 모두 관람하면 된다. 아크로폴리스 입장료는 케이블카 요금과는 별도이다.

상부 아크로폴리스(Upper Acropolis)에는 아테나 신전, 페르가몬도서관, 제우스 제단, 원형극장, 트라야누스 (Trajanus)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등이 있다. 하부 아크로폴리스(Lower Acropolis)에는 데메테르 신전과 헤라 신전, 하부 아고라, 체육관, 아탈로스 왕궁 등이 있다.

그 외 주요 볼거리는 크즐 아블루(붉은 정원), 아스클레피온, 베르가마 박물관 등이 있다. 아스클레피온은 시내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특산품으로는 베르가마 카펫, 수공예 양탄자, 염색 직물, 천연 가죽제품을 구입할 수 있으며, 기념품으로 양피지 제품을 추천한다.

로컬 식사는 바자르의 전통식당에서 케밥, 피데, 올리브 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카페와 찻집에서는 터키 커피와 홍차, 쿠키와 함께 레모레이드 주스를 추천한다.



여행자의 노트: 생각 한 스푼 더

길 위의 인생


이제 이스탄불을 향해 북진한다. 홈스위트홈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 경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에서 커피와 스낵을 샀다. 터키쉬 커피는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아서 한번 체험해 본 것으로 만족했다. 입맛에 맞는 네스카페 원두커피와 터키 디저트 하나를 골랐다. 참깨 페이스트 타히니와 견과류로 만들어진 헬바(Halva)는 달콤한 과자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꿀타래 같은 맛이었다.

이제 또 달린다. 도로는 넓은데 다니는 차가 많지 않았다. 터키 고속도로는 참 잘 되어있다. HGS라는 고속 통행료 시스템이 있어 통행료를 받는 사람 없이도 지나가면 자동으로 요금이 징수된다. 우리처럼 렌터카 이용자는 차를 반납할 때 자동으로 계산된다. 고속도로를 오랜 시간 달리다 보니, 유적지를 돌아보며 만났던 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거야." 어릴 때는 그 말 뜻을 몰랐다. 길이야 당연히 사람이 만드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특히 고대의 위대한 길들을 알게 되면서,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실크로드, 왕의 대로, 비아 에그나티아. 이 세 길은 다른 대륙, 다른 시대를 대표하지만, 모두 인류 문명의 혈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길들은 우리 인생과 닮아있었다.


실크로드, 꿈과 모험의 길

실크로드(Silk Road)는 길이라기보다 하나의 꿈이었다. 장안에서 시작해 사막과 산맥을 넘어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상인들은 비단과 향료뿐 아니라 문화와 종교, 기술과 사상까지 실어 나르고 돌아왔다. 한 줄기의 도로가 아니라, 수많은 갈래로 나뉘고 또 합쳐지는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집안 대대로 무역을 해온 마르코 폴로 역시 이 길을 따라 새로운 사업을 꿈꿨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관찰력과 말솜씨까지 뛰어났다. 몽골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을 만나 사업 기회를 얻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특사 겸 관리로 몽골 곳곳을 돌아다닐 기회를 거머쥐었다.


우리 인생의 청춘은 실크로드와 닮아 있다. 아직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찾진 못했지만 미지의 꿈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다. 때로는 사막의 모래바람에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오아시스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목적지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함께한 경험들, 그리고 그로 인해 달라진 내면이 더 가치 있는 시간이다.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돌아오면서 가져온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그 길을 떠나기 전과 다녀온 후,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세계를 보고, 또 다른 문화를 접했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실크로드는 마르코 폴로에게 동방견문록을 남겨 주었다. 나의 청춘은 성공과 실패, 정답과 오답이 모두 담긴 종합 선물 세트를 선물해 주었다.


왕의 대로, 권력과 질서의 길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대로(Persian Royal Road)는 실크로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길이었다.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2,700여 킬로미터를 직선으로 곧게 잇는 이 도로는 효율과 통제를 상징한다. 왕의 명령을 제국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권력의 동맥이었다.


이 길에는 111개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왕의 전령들은 밤낮으로 말을 갈아타며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기마 우편 제도를 보고 "눈도, 비도, 더위도, 어둠도 페르시아 전령들의 신속한 임무 수행을 막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 말은 훗날 미국 우편청의 모토로 쓰이기도 했다.


우리 인생의 중년은 왕의 대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청춘의 방황을 뒤로하고, 이제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효율적으로, 책임감 있게 달려가는 시기. 가정을 돌보고,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다하며,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 전해야 하는 사명감도 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 길이 너무 직선이다 보니, 때로는 답답할 때가 있다. 왕의 전령처럼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리다 보면, 길가의 들꽃을 볼 여유도, 잠시 쉬어갈 그늘도 놓치게 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비아 에그나티아, 연결과 소통의 길

로마의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는 아드리아해에서 흑해까지, 동서를 연결하는 로마 제국의 대동맥이었다. 이 길은 군사도로였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민족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로마인과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과 트라키아인이 이 길 위에서 만나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나누었다.

특히 이 길을 통해 기독교가 전해졌다. 사도 바울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복음을 전했고, 그의 걸음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었다. 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된 것이다.


우리 인생의 노년은 비아 에그나티아 같다. 이제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다. 혼자만의 성공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세대 간의 소통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비아 에그나티아가 단순히 두 지점을 이어주는 길이 아니라 문명과 문명을 연결하는 다리였던 것처럼, 내 인생의 후반부도 과거와 미래를, 경험과 희망을,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시간으로 채워가야겠다.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거야

몇 년 전,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몇십 년 만의 재회였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참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예전에 장래희망으로 써냈던 꿈과는 완전 다르게 살고 있잖아."


그녀의 말이 맞다. 스무 살의 나는 지금의 내가 있을 자리를 상상조차 못 했다. 마치 실크로드 상인이 처음 집을 나설 때는 그저 비단 몇 필 팔 생각뿐이었는데, 돌아올 땐 동방의 탐험가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거야"
그 의미는 이런 거였을까. 우리가 걷는 길이 곧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우리 모두 이 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길은 사람이 만든다. 그리고 사람은 그 길이 만든다. 우리가 어떤 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모험가도, 책임감 있는 시민도, 지혜로운 연결자도 될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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