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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Oct 22. 2022

아스퍼거 남편 사용설명서 1-5

아스퍼거 남편 사용설명서


1. 비위가 약합니다.


조금만 역한 것을 보면 쉽게 구역질을 해요. 우리 남편은 첫째 딸의 똥기저귀를 가는 도중 바닥에 토를 한 적이 있어요. 아이가 음식을 먹을 때도 아니고 이유식을 먹을 때도 아니에요. 신생아 때, 심지어 모유만 먹던 시절이에요. 모유 먹은 똥 기저귀를 갈다가 토를 하는 남편을 보고 그 이후로 둘째가 다 클 때 까지도 남편에게 기저귀 가는 걸 맡겨본 적이 없어요. 어른 토를 치우느니 아기 똥기저귀를 제가 갈고 말지요. 


아! 오바이트 에피소드가 또 있어요. 연애시절인데요. 우리 남편을 대학 동기들에게 처음 소개한 자리였어요. 동기 중에 술을 강요하는 꼰대 같은 놈이 있어서 그날 엄청 마셨어요. 1차를 마치고 밖에 나왔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거예요. 걷잡을 수 없이 폭발적으로 오바이트가 나왔어요. 


"오마이갓! 아유 오케이?" 하고 구 남친/현 남편이 달려왔어요. 역시 내 남친. 등을 두드려주고 나를 케어해주겠지 기대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내 토사물을 보자마자 바로 뒤돌아 자기도 토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많이 역했나 봐요. 그날 제가 안주빨을 좀 세웠거든요. 종로 3가 한복판에서 그렇게 서로 등을 맞대고 우리 커플은 피자 라지 사이즈 두 판을 부쳤어요. 꼰대 친구 놈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어요. "너네 뭐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사람(이하 아스퍼거인)은 모든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요. 결혼을 고려하신다면 자녀 기저귀와 음쓰(음식쓰레기) 버리기는 평생 본인이 한다고 미리 마음먹으시는 게 좋아요. 


근데 반전인 건 자기가 깨끗하지도 않다는 거예요. 자기 몸이 음쓰보다 더 더러우면서 음쓰는 못 버리는 게 완전 모순이에요. 

 

2. 행동이 굼뜹니다. 


아스퍼거들은 행동이 굼뜨고 신체적 움직임이 어색한 특징을 갖고 있어요. 주토피아 보셨나요? 거기 나무늘보 나오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걔보다는 우리 남편이 더 빠른 것 같긴 한데... 가끔씩 걔보다 더 느릴 때도 있긴 하니까 평균적으로 나무늘보의 현생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우리 집은 이케아 같은 자체 조립 물건은 아예 들이지 않아요. 그런데 가끔씩 완제품인 줄 알고 샀는데 조립 전 상태로 물건이 배송되는 황당한 경우가 있죠?  


그런 경우 남편에게 조립을 맡기고 저는 집을 나갑니다. 조립과정을 지켜보면 꼭 부부싸움이 나거든요. 오래 걸리긴 해도 주어진 미션은 꼭 클리어 하니까요. 작은 책장이라면 5시간 정도 외출이 적당하고요. 더 복잡한 전자기기 종류라면 1박 일정으로 친정에 다녀옵니다. 과정만 안 보면 됩니다. 내 정신건강은 소듕하니까요


3. 관리직으로의 승진은 퇴사를 의미합니다. 


아스퍼거 배우자의 승진을 기뻐하지 마세요. '매니저' 과장급이 되는 순간은 퇴사 시기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아스퍼거인은 변화나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상황을 극도로 힘들어합니다. 이직 시 새 직장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지 3개월 정도는 아스퍼거인에게 말 그대로 헬입니다. 매일 밤 죽상을 하고 들어와서 한숨을 쉬고 두통약을 달고 살고 출근 전에는 구역질도 할 거예요. 


어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내일 아침에 눈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아스퍼거인은 자기중심적인 특성이 있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뱉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때 '야, 이 인간아, 아비가 돼서 자식들 앞에서 할 말, 안 할 말이 있지. 그러고도 니가 아비냐?'라고 다그치지 마세요. 그만큼 자기가 힘들다는 건데 그 감정을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하는 거예요. 할 말, 안 할 말 가려할 수 있는 상호작용 신경회로가 부서져서 태어난 사람이라 그렇다고 넘어가 주셔야 됩니다. 이런 말을 곧이듣고 물고 늘어지거나 상대를 몰아붙이면 그는 정말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초 3개월 정도의 적응기간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직장 자체가 아스퍼거인에게 루틴으로 자리 잡습니다. 아스퍼거인은 반복되는 루틴을 지키며 살아갈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거든요. 폭풍 같던 적응기가 지나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매우 성실하게 루틴을 지켜며 잘 일합니다. 승진이 거듭되기 전까지는요. 


승진이 거듭되어 관리자 직급으로 올라가는 순간 또 한 번의 위기가 옵니다.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루틴 내에서 수동적인 실무자로 일할 때 아스퍼거인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순간순간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관리자로서 실무자 팀원들에게 일을 분배해야 되며 그 과정에서 팀원들의 크고 작은 불만사항들을 처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해야 되는 관리자 직급이 되는 순간, 아스퍼거인에게 직장은 또 다시 헬이 됩니다. 


이번에는 몇 개월 기다리는 것이 답이 되지 못합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애초에 없는 능력이 시간만 보낸다고 해서 생기지 않으니까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의 경우라면 당장 그만두지 못하고 버티긴 하겠죠. 운이 좋으면 버티는 중에 관리자로서 나름의 생존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습니다. 관리자라는 새 역할을 지고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업무 루틴을 또 만들어 낸다면 직장생활이 연장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이 오래 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관리자는 팀원들이 바뀔 때마다 새 사람에게 적응해야 되는데 이 부분이 아스퍼거인을 지속적으로 소진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무자일 때는 전체 환경에 나 혼자만 적응하면 됩니다. 관리자는 변화하는 세부 요소들에 끊임없이 대응해야 하고 적응해야합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 입니다. 사측과 협상하여 더 이상의 승진을 거부하고 실무자로서만 근속하거나, 독립이 가능한 직종이라면 프리랜서나 1인 기업 형태로 독립해야 합니다. 


우리 남편의 경우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헤드 티쳐 Head Teacher /관리자가 된 후 폭풍 같은 1년을 버티다가 끝내는 오래 몸담은 직장에서 퇴사를 했습니다. 퇴직금과 연말 보너스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퇴사를 했을 것이나 꾸역꾸역 1년을 버티어냈습니다. 현재는 1인 교습소를 열어 자유로울 '자',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4. 아이컨택트를 못합니다. 


아스퍼거인은 눈 맞춤을 못합니다. 가족이나 매우 친밀한 사이가 아닌, 낯선 상대와 눈 맞춤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의를 지키고 상대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이마를 본다거나 주변에 있는 물체를 응시하여 눈 맞춤을 하는 듯 연기 합니다. 하여 아스퍼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어요. 가끔 사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시는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상대를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하고 눈 맞춤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배우자의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전화번호를 따셔도 좋은 타이밍입니다. 


 5. 타고난 공감능력은 없지만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을 기억해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아스퍼거인도 사랑의 감정을 당연히 느끼기에 자식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인 거죠. 우리 부부를 보면 남편이 아스퍼거라서 사랑을 표현 못 하는 거나 제가 경상도 상여자라서 표현을 못하는 거나 도긴개긴인 거 같아요. ㅋ  


세부적인 상황까지 들어가 보면 아스퍼거 남편이 공감능력이 없어서 아이들의 입장을 완전히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공감능력을 가진 배우자가 잘 중재해주면 됩니다.


놀랍게도 가끔씩 엄청 높은 공감능력을 아이들에게 발휘해주기도 하는데요. 쇼핑센터에 가면 발생하는 일입니다. 장난감이나 군것질 거리를 사주는 것에 인색한 저와 달리 우리 아스퍼거 남편은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베푸는데 매우 후합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면 엄하게 꾸짖는 저와는 달리 '나는 쟤 마음을 알아.' 'I can feel him.'라는 전혀 아스퍼거 같지 않은 대사를 남발하며 장난감을 기어이 사줍니다. 스크루지 못지않게 소문난 수전노 시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남편은 어릴 때 갖고 싶었던 물건을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험으로 체득된 감정의 기억으로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아스퍼거인도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아스퍼거신드롬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인생에서 많은 것을 지레 포기하지 마세요.




아...'아스퍼거 남편 사용설명서'에 10가지 넘는 항목이 있는데요. 5가지밖에 못 썼는데 방언이 터졌네요. 시리즈 연재물로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을 원하신다면 좋아요 꾹 누르셔서 표현해주세요♥ 


여러분의 피드백은 글쓴이를 춤추게 합니다. 

 Peace~

이전 14화 아스퍼거 배우자와 사는 것은 포기와 체념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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