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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Oct 24. 2022

아스퍼거 남편 사용설명서 6

찔러서 받으면 어때요?

아스퍼거 배우자 사용설명서 2


6.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령 요망


어릴 때는 꽃 선물이 싫었어요. 데이트할 때 꽃다발을 들고 거리를 거닐면 우쭐한 기분이 드는 건 좋았는데 하루가 지나면 처지 곤란이라 버릴 때면 괜한 죄책감도 들고 돈도 아깝더라고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더 실용적인 선물로 주고받자고 남편에게 이야기까지 해놓았었죠. 꽃 선물은 사귄 첫 해 밸런타인데이 때 딱 한번 받아보았네요.


그런데 웬걸? 세월은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나 봐요. 마흔이 되고 보니 계절마다 아파트 단지에 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에도 시선이 가고 가을이면 알록달록 물드는 단풍에도 눈이 가더라고요. 엄마들이 왜 그렇게 카톡 프로필에 꽃 사진만 올리는지 이해하는 나이가 된 걸까요?


어느 날 남편에게 말했어요.

 

"나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 나도 꽃 선물을 받고 싶어. 다음 내 생일에는 꼭 꽃을 선물해줘."


올해 생일 전 날, 남편이 6시 30분에 퇴근했어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꽃집이 없으니 저녁에 꽃을 사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어요. 근데 남편이 빈 손으로 왔네요.

 

'내 말을 잊어버렸나? 내 생일날 자기가 11시 출근이라 오전에 꽃을 사려고 하나? 오전에 꽃을 받아오려면 미리 예약 주문을 해야 되는데...'


한국말을 못 하는 남편이 예약 따위를 했을 리 없습니다. 동네 꽃가게가 예약 없이 오전 10시에 영업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 올해는 꽃 선물을 못 받고 넘어가나 봅니다. 그나저나 아이들 등교를 위해 오전 8시에 집을 나선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네요. 


'이 인간아, 오전 8시에 아무리 돌아다녀봐라. 문을 연 꽃집이 있겠냐? 귀찮고 피곤해도 전 날 미리 사 왔어야지.'


오늘은 늦게 출근이라 10시 퇴근이니 이제는 아예 기대를 접습니다. 그래도 아침부터 꽃 사려고 돌아다니고 있는 정성을 갸륵하게 생각해주어야 되나, 바가지 박박 긁어서 없는 센스를 장착시켜야 되나 혼자 고민하며 남편을 기다립니다. 

 

'삐삐삐빅~~~~'


현관 도어록 소음이 들리고 남편이 들어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한 시간 정도 뺑뺑이 돌다 돌아오나 봐요. 남편이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식탁 위에 무언가를 놓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음이 터진 저를 남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꽃을 사 오긴 사 왔습니다. 

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일단 꽃 종류가 카네이션이고요. 

꽃이 화분에 심겨 있습니다. 


고맙다고 못 받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꽃집을 찾았냐고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꽃집 찾아 삼만리를 찍은 모닝 썰을 소상히 풀어냅니다. 자기가 염두에 뒀던 동네 꽃집들은 모두 문을 닫아서(당연하죠. 오전 8시니까요.) 이마트에 갔다고 합니다. (호주는 대형마트에서 꽃다발을 팝니다.) 이마트에서도 허탕을 쳤는데 언뜻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에 꼭 하나씩 있는 대형 온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다육이 식물들을 전문으로 파는 대형 비닐하우스 직판장 아시죠? 그 기억이 퍼뜩 나서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으로 갔더니 다육이 직판장들은 여러 곳 영업 중이었다고 하네요. (거기서 사장님들이 상주하시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다육이 직판장에 카네이션이나마 꽃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죠. 

카네이션 꽃도 참 예쁘긴 했는데요. 기분이 좀 그랬어요. 

제가 남편의 어버이는 아니잖아요. 

'내가 니 애미냐?'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조의용 국화를 사 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스퍼거인들에게는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령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꽃'다발' (A bunch of flowers) 이 아니라 그냥 꽃(flowers) 이 받고 싶다고 말한 제 불찰입니다. 내년에는 100% 만족할 꽃 선물을 받기 위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미리 메시지로 전달해놓을 예정입니다.


>> 2023년 아내 생일 선물 지침

 

1. 꽃 종류는 큰 상관은 없지만 국화와 카네이션은 제외할 것.

2. 다양한 꽃 종류를 한 가지 컬러 콘셉트로 묶을 것. ex) 노랑이 콘셉트이면 노랑 장미+노랑 튤립+프리지어 등을 섞고 핑크가 콘셉트이라면 핑크 장미, 핑크 수국, 핑크 아무 꽃 등을 섞는 등의 방식. 

3. 안개꽃은 절대 섞지 말 것. 안개꽃 안 좋아함. 

4. 화분 (Pot) 아니고 다발 포장일 것.

5. 예시 사진 2장 참조하기.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마음에 드는 꽃다발 사진 2가지 정도 같이 전송)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겠냐? 안 받고 말겠다.'라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씀도 맞습니다. 저 역시 10년 넘게 엎드려 절 받기는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찔러서라도 받고 둘 다 만족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을 받고 실망하거나 아예 선물을 못 받고 신세 한탄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내 팔자에 무슨' 이라며 사랑받고 싶고 챙김 받고 싶은 욕구를 포기한다면 몇 년은 괜찮을 수 있겠죠. 장기화되면 아스퍼거신드롬을 가진 배우자만큼 나까지도 아파질 수 있습니다. 아스퍼거신드롬을 가진 배우자들의 상당수는 그때 그때 공감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들을 해소하지 못해서 깊은 우울에 빠지게 되는 '카산드라 신드롬'을 겪게 된다고 하니까요.

 

찔러서 받으면 어때요? 물론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서 준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보다는 감동의 정도는 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남편은 최수종이 아니고요. 나도 나긋나긋한 절세미녀 하희라는 못 되니까요. 한 발 물러서 줍시다. 


찔러서라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받으니 내 기분이 좋고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스퍼거 남편도 성취감을 느끼고 뿌듯해합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윈윈의 상황입니다. 


내년 제 생일에 받을 꽃다발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꽃이 정말 예쁠 것 같아서도 기대가 되지만 그 예쁜 꽃 어딘가에 반드시 아스퍼거 구멍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 구멍이 무엇일지가 더 기대가 되네요.




아스퍼거 배우자 사용 설명서는 장기 연재물이 될 것 같네요.ㅎㅎ

꾸준한 글쓰기 약속드릴게요!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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