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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Sep 12. 2020

글 뭉치를 풀다 - 문학 1

북아트 <풀다>

 글 뭉치를 풀다 – 문학 1


누구에게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묻어두고, 누군가는 발표하고 공유한다. 하고싶은 이야기는 참 많은데 실제로 글로 쓰고 엮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래도 나는 흰 종이와 펜을 보면 첫눈 오는 날처럼 설렌다. 늘!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 by George Gordon Lord Byron

청년기를 지나면서 시 한번 안읽어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읽지는 않았더라도 유명 시인 몇몇은 알고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국내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그 때 외웠던 시는 수십년이 지나서도 잊혀지지 않고 저절로 읊을 수 있다. 시의 운율 덕인 것 같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우리 인생의 갈림길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일 것이다. 누군가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할 때 측근들은 그를 위로하려고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읊어주기도 한다.

낙엽질 무렵이면 괜한 센티멘털리즘에 빠져서 테니슨(알프리드 테니슨)의 <눈물이,부질없는 눈물이>를 속으로 웅얼거리기도 했었다. “부질없는눈물의 이유를 나는 모르네---“ 정말 그때는 왜 괜히 눈물이 나고 그랬었지? <율리시즈>가 더 유명했지만 나는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를 애송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했을 때 남쪽 수랑 시인들 코너에 안장된 시인들의 명단을 보면서 테니슨의 이름을 접했어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이 흔한 때도 다 시절이 있는 모양이다.

로버트 브라우닝, 하인리히 하이네, 프리드리히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든 바이런 ... 시인 이름대기 게임을 하면 끝도없이 많은 시인들을 들춰낼 것이다.


바이런의 시를 주제로 북아트 작품을 만들었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4편 179연 ~184연 <대양>을 이미지화하고 시를 적언어넣었다.



낡은 책 표지 바꾸기 – 키에르케고르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첫 북아트 개인 전시회를 할 때 낡은 책 표지를 바꿔서 선보였었다. 완전히 해체하여 다시 꿰맨 것은 아니고, 다만 표지만 바꿨을 뿐이다. 정통 복원은 아닌 셈이다. 

눈치 채셨나요? 세로로 인쇄한 책입니다. 표지 여는 방향이 다르죠.

그런후 겨울에 모이는 고교 동기동창 총회에서 뜻 밖에도 나의 책 이야기가 나왔다. 

등학교때 이과 반장을 하던 동창생인데 앞에 나와서 나의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표지를 바꿔서 전시했던 안병욱 선생님의 <키에르케고르>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때 나는 관람객들이 책을 들춰볼 수 있도록 손잡이 클립을 책 표지에 꽂아 두었었는데 그곳에 한 줄 멘트를 기록해두었다. "젊은 날의 그가 심취했던" 이 짧은 한 마디였다. 

그 동창생은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탕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젊은 날 심취했던 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가, 키에르케고르, 살아오는 동안 그 책은 잊혀졌던 책일 뿐,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가 있구나, 이런 생각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젊은날의 꿈이 무엇이었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의 북아트 전시회가 한 사람의 젊은 날의 꿈을 회상해 볼 기회를 주었다니 뜻밖의 성과라고나 할까.....  동창회에 모였던 여러 친구들도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고등학교 또는 젊은 날들을 잠시나마 회상해 보았을 것이다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책에는 "소녀시절 즐겨 암송하던" 이라는 멘트가 붙어있다. 내가 아끼는 책이다.

깊은, 깊고 푸른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고교때 접했던 글이 좋아서 나중에 구입한 것이다. 교과서에 나왔었고, 오랜 세월동안 여러 번역본이 나왔지만, 나는 옛날 교과서에 나왔던 번역(그것이 내가 처음 접했던 것이니까 )에 익숙하고 좋아한다.

안톤 슈낙, 그가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 글을 좋아한 이후 아주 오랜 후에 알게 되었지만, 소녀시절의 아름다웠던 감성을 팽개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치에 협력한 전과와는 무관하게 좋아하는 수필일 뿐이다.


남편의 책 <키에르케고르>는 염소가죽으로 했는데 아쉽게도 나는 금박을 할 줄 몰라서 책 제목이 좀 허술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가죽 책을 만들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시절(?)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이런 책을 사서 미친듯이 밤을 새우며 읽곤 하였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 책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읽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서가에 꽂혀있으니까 책구경을 좀 하고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베이지색 가죽표지는 책의 낡은 색깔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데, 블루톤의 책에는 못봐줄 정도로 밉상이어서 삼면을 모두 푸른 색으로 칠했다.



코덱스 바인딩 소설책 – <肖像, 박춘자>

비록 습작이지만 책으로 묶었다.

소설의 분량이 있으니 일반 책처럼 코덱스 북으로 만들었다. B5용지 인쇄에 반을 접은 크기, 겉크기는 13Cm, 19cm. 표지포함 100쪽짜리 책이다.


수채 색연필로 직접 그린 원화를 넣어 편집했다. 그림이 글의 내용과 비슷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문장 자체를 여성적 글쓰기 연습으로 썼기 때문에 책에 그린 그림도 다분히 여성적인 꽃 그림을 택했다.

인쇄용 편집은 한 번 해두면 여러 권을 만들 수도  있어서 편하다. 그런데 그림은 원화를 넣은 책은 딱 한 권 밖에 없다. 두 번째부터는그림을 스캔해서 넣은 인쇄가 될 것이다.


중편소설 <肖像, 박춘자>는 브런치 북에 연재되어 있다.




문학 관련 글

<나의 글쓰기 연습>

달걀로 바위깨기가 가능할까?


바위에   없이 많은 달걀을 던지면 오랜 세월이 지나며 깨진 달걀 굳은 것을 새들이 와서 쪼아먹고, 더깽이  찌꺼기들이 햇빛에 갈라지다 비에 불어나다 그러면서 바위를 못살게 굴어 바위에 눈꼽만큼의 영향이라도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소설쓰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소설을 쓰는 것은 가능할까?
달걀로 바위깨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나를 지레 질리게 만든다.
그래도 나는 소설쓰기를 시도해본다. 갖은 방법을  동원한 소설 만들기를 시작했다.

소설에 대해 오래전부터 남몰래 꾸어오던 꿈이 있다.
배우지 않고, 길들이지 않고도 순전한 감성으로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 패배하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울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는 일이다. 만사 제쳐놓고, 살림 팽개친  매달리지 않고도 온전히 내게 주어진 한가로운 시간만  챙겨서도 실한 열매를 맺을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는 일이다. 배움의 길에서 혼신을 다한 지식인들에게, 하루 25시간을 투자하는 성실파들에게 가소롭게 들릴,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나의 수줍은 꿈이다. 세상  살고  후에 무덤 가에 피어나기도 어려운 아주 요원한 꿈이다. 가소롭고, 황당하고, 요원한 꿈을 위해 나는가끔  방식 대로 습작을 한다. 미련한 곰의 재주부림 같은 습작이리라.

사물을 하나 정해 정밀 묘사를 한다.
나뭇잎에 대한 색깔을 적어나가기 시작하면, 초록에서부터 한도 끝도없는 온갖 색깔을  쓰게되는데, 붉은 녹슨 빛깔이라거나, 우거지  오이지 빛이라거나, 애벌 칠한 철제품의 은빛이라거나, 백여가지도 넘는 나뭇잎 색깔들을 적어낸다.
어찌 색깔 뿐일까.  모양새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수십가지 형상을 연습장에 적어본다. 이러면서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나뭇잎 하나에  두가지 색깔을  들여놓는 채색을 이해하기도 했다. 점묘법으로 화폭을 채운 쉐라의 그림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적어놓은 나뭇잎의 색깔, 내가 적어놓은 나뭇잎의 모양을 화폭에 그리자면, 온갖 색깔들이  필요하고,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으려면 수없이 많은 점들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다.


나무 하나의 모습을 공책  쪽인가를 채우며 쓰는 연습이 끝나면 전체적인 얼거리를 만들기 위한 연습을 한다.인터넷의 여기저기에 소설쓰기 교실이 산재해있지만, 콘텐츠를 보는 것에 그쳤을 , 한번도  문을 열어본 적은 없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은 한다. 우선 소설이 무언지 가르쳐 줄테고,  짜임새를 가르쳐주며, 골격 만들기에  붙이고  입히기까지 친절히 가르쳐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에도 갖춰야할 필수적인 구조가 있고, 그것에 벗어나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것이 소설이리라.
가끔은 나도  비법을 배우고싶다. 들여다보고싶은 유혹을 무시할 때의 기분은  당선될것만 같은 복권을 사지않고 돌아서는 기분이다.
나는 아직 누구의 그림도 들여다  적이 없는 어린 아이가 끄적끄적 장난질하는 연필장난의 그림, 미술학원에발을 들여놓지 않은 아이의 그림을 좋아한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아이 자신만의 표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글을 쓰고싶다. 처음 잡아본 연필로 그린 그림 같은 , 누구도 손질해주지 않은 크레파스의  색칠 그림, 순전한 아이의 그림처럼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글을 쓰고싶다.
그러나   나이. 아무리 부정한다해도이것 저것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그림이나 글에는 데쟈뷰 현상이 나타나리라. 남이  글들도 이미 많이 읽었으니 무의식 중의 흉내내기가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흘깃이나마 들여다보았던 이론서들의 귀절들이  글쓰기를 간섭하기까지 한다. 연주를 듣고 ‘,  사람은 아무개에게서 사사받았구나하고 금방내 알아차리게 되는 악기 연주, 역시 같은 결과의 그림, 그런 모양새를 남에게 확연히 나타내는 글이 아니라, 도대체 이건  알기나하고 쓴거야 뭐야,하는 황당함을 듣더라도 나는 순전한 나의 글을 쓰고싶다.

 나름대로의 글쓰기 연습 계획을 짠다. 예를 들어 ‘나뭇잎같은  단어의 정밀묘사 연습이끝나면 소설습작에 들어간다.
여자인 내게 가장 유리하고 편안한 여성적인 글쓰기로 중편소설을 쓴다. 단편보다  것이 중편이라는 오류를 경계하며 중편에 합당한 구조물을 세우고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야무진 집을 짓는다.  글쓰기가 방금 끝났다. 탈고후에 드는 허전한 마음은 감히 작가연(作家然)하는 건방짐이리라.
전혀 이질적인 것에 대한 적응을 위해서, 그리고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그려낼  있는지 실험으로 남성적인 글쓰기를 연습한다. 일인칭 남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으로 단편을 쓴다. 곁눈질로 보아온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테마로 잡고 시작했는데 완성까지 끌고가기엔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상상력을 풍부히 하고, 파스텔조의 빛고운 묘사를 위해 동화쓰기도 연습한다. 동화를 쓰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해왔다.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자들이 부러웠다. 나도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싶다는 생각을 자주했으나 어른의 찌든 때를 벗겨내기란 쉽지않은 일이었다.
실제 습작에 들어가기 이전의 계획짜기도 나혼자로선 힘에 겨운 일이다. 슬쩍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는다면 진일보하련만,  고집은 터무니없이 미련할 때가 있는데, 바로  글쓰기 연습에서도  미련한 고집을 부리며 혼자 끙끙 앓고 있다. 중편, 단편, 동화를  작품씩 쓰고나면 다음엔 시나리오를  것이다.
소설속에서의 대화를 매끄럽게 표현할  있도록 시나리오를 쓰면서 훈련한다. 시나리오는   컷도 빗나가선 안되고, 글을 읽는 이가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져야하므로 아주 능숙한 글쓰기가 요구된다. 글로서 영화의 화면을 그리는 것이니 어려울  밖에.

배움도 짧은 내가 글쓰기 연습부터 혼자 꿍꿍이 속으로 계획을 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글쓰는 작업이 피를 말리는 치열한 작업이라고 한다.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사람들도 많다. 허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찌어찌해서 어디까지 쓰기 연습을 하고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이런 계획안을 세우는 일부터가 아주 즐겁고 행복하다. 쓰는 일이 고통이면 당장에 집어던져버릴 것이다. 잡문을 쓰든 작품을 쓰든  때의 내마음은 행복에 젖어있다. 써내려가는 동안 무지몽매한  머리를 쥐어뜯는 일이 자주 생기지만,  순간을 극복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아이가 젖을 먹으며 영양가를 따지고 자신의 체격이 어떻게 자랄 것인가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나는 글쓰기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쓴다. 글을 써서 발표한  내게 다가올 어떤 결과는 쓰기가 끝났을때 부수적으로 오는 것이지,  결과를 위해서 쓰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 아니라 행복한 유희인 나의 글쓰기 연습이다. 성공한 대가들이  소리를 들으면 가소롭게 웃어넘길 ‘글쓰기가 즐겁고 행복한 유희라는 말은 방금 마악 입문한 초보자들이나 느끼는 감정일는지.



<하늘과 땅 사이>

교회 생활중에 쓴 글들을 모아 코덱스북으로 만들었다.

제목 <하늘과 땅 사이>는 이 책에 수록된 글 중에 하나, 아주 짧은 글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무엇이 있냐”는 질문에 <과>가 있다는 실없는 농담은 40여년 전의 농담이다. “비의 온도는?””5도다!”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이런 농담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배중에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과 나 사이에 있다.”라는 말씀을 들으며 연상작용으로 즉각 떠올랐던 생각을 적었다.


하늘과 땅 사이, 당신과 나 사이에서 <과>는 사이를 연결시키는 조사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 있다는 천국은 당신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과>가 있는 것처럼 천국이 있고.........

<천국은 우리 모두를 한 문장 안에, 한 삶 속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 중에 이렇게 엉뚱한 연상의 긴 꼬리를 '잇'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다음 말씀도 '잊'지 않았으며, 나는 항상 말씀 안에 '있'도록 노력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의 개념과 꼭 맞는, 네모진 형태에 각 페이지들이 순서대로 차곡차곡 있는, 그리고 글이나 그림으로 첫 쪽부터 끝 쪽까지 꽉 들어있는 그런 책이다. 인쇄책과 다름없는데 다만 그 제본을 손으로 직접했다는 것이 다를 뿐.


내용의 글들은 모두 다 내가 직접 쓴 것들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정말 내가 쓰고 내가 만든 책이다. 처음에 북아트를 배우고 만들기 시작한 이유가 <내 책>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진정한 나의 생각, 나의 글, 나의 그림, 나의 작품이 담긴 나만의 책 !

나이들면서 바깥 활동이 줄면 좀 더 여유있는 생각을 할 수 있을테고 글을 쓸 시간도 많아질 것 같다. 300쪽 정도의 코덱스 북을 적어도 다섯 작품 이상은 만들고 싶은데...............(꿈깨라,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



세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를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들을 간략히 줄여서 함께 엮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돌아다니는데 길을 잃지 않을 정도,  밥 먹는데 먹고싶은 대로 잘 챙겨 먹는 정도, 잠자는 방 내 뜻대로 맞춰서 고를 수 있는 정도, 물건 살 때 말 안 통해서 바가지 쓰지 않을 정도로 겨우겨우 버틴다.

그래도 런던에서는 <햄릿> 공연을 본다. 일단 내용은 알고있으니 내가 아는 내용에다 영어 대사를 꿰맞추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난감한 것은 고어가 나올 때이다. 아니, 현대영어도 못하는데 옛날 영어까지? 이럴 땐 그냥 졸면 된다.

이런 나를 위로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사람들도 나처럼 잘 못 알아듣는 영국 연극 대사니까. 나는 미국사람도 아니고, 그냥 졸음에 의지한다.

어쨌든 그래도 문학쪽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영국에 가서 세익스피어 연극 하나는 봐야할 것 같아서 돈지랄에 가까운 관람을 하는 것이다.


말광량이 길들이기, 십이야, 한 여름 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에 속한다. 이 희극들은 통쾌하고 유쾌한 내용에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페이소스를 간과할 수는 없다.



다음은글뭉치를 풀다 – 문학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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