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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Sep 14. 2020

글 뭉치를 풀다 - 문학 3

북아트 <풀다>

글 뭉치를 풀다 - 문학 3



봄 앓이

봄철에 쓴 수필집, 팜플렛 바인딩.



<생각의꼬리잡기 놀이>


화창한 날이다.

마당 구석구석에 핀 꽃들이 모처럼 제 색깔로 빛난다. 곱게 빛나는 진주홍색의 튤립이 유난히 시선을 끈다.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던 꽃이 오늘 특별히 빛남은 웬일일까. 꽃보다는색깔에 마음이 머문다. 색깔이라, 빛깔이라….
색깔은 수동적인 운명을 지녔다. 제가 지닌 색깔을 자기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수동적인 운명.   누군가가 비춰줘야만 나타날 수 있는 슬픈.
마당의 튤립은 어제보다 한결 진한 색깔로 빛나고 있다. 화창한 날씨 때문이리라. 정원을 서성거리다가 나는 예기치 않았던 복병, 색깔에 붙들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미로를 헤맨다. 색깔은 원래 무슨 색깔일까, 이런말은 궤변이려나? 색깔은 도대체 원래의 제 빛이 어떤 것일까? 달빛에 비추인 색깔, 햇빛에 비추인 색깔, 형광등에 비추인 색깔, 백열등에 비추인 색깔… 어느 것이 제 색깔일까?
꽃은 우중충한 어제보다 햇빛이 화려한 오늘 더 크게 벌어졌다. 함초롬하던 송이가 부끄럼 없이 활짝 벌어져 오히려 바깥쪽으로 꽃잎이 젖혀지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수업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더 넓어지고 커졌으니 색깔은 약간 더 흐려져야 한다. 그러나 어제 주황색이던 꽃이 오늘은 진주홍 색으로 선명해졌다. 빛 때문이리라. 우리 가까이 바짝 다가온 햇빛 때문이리라.
그럼 원래의 색깔은 무슨 빛이었을까?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짓누르면 그 협박에 숨죽이고, 햇빛이 따사롭게 보듬어주면 그 사랑에 기고만장하여 뽐내고. 그럼 원래의 색깔은 무슨 빛이었을까.
색깔에 사로잡혀 출구없는 미로를 헤매노라 한나절이 그냥 지나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생각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한나절을 보낸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일이라면 한나절 동안에 너무너무 많은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게으르고 느리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산다. 혼나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싫지만 게으른 건 사실이기 때문에 억울할 것도 없다.
내가 아이일 때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른들은 왜 몸을 움직여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게으르다고 야단을할까?  나는 일손을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멍청히 있는 시간이 좋다.
하릴없이 논다고 혼날 때 마다 나는 참 답답했다. 어른들이 팔 걷어붙히고 여럿이 달라붙어 일년 내내 지어도 못 짓는 집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 몇 번 끔벅끔벅하면 멋지게 지을 수 있는데. 버스를 타고 차멀리로 토하면서 다섯 시간을 가야 갈 수 있는 서울을 나는 잠시 눈만 감고 있어도 삽시간에 갈 수 있는데. 빨리 빨리 크라고 밥 많이 먹이고 키워도 억지로 건널 수없는 나이를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어른이 되어 선생님도 되고 그러는데.
나는 늘 게으른 천덕꾸러기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 때, 우리 아이들은 일 않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어도 게으르다고 혼내지 않겠다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겆이를 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주 큰 일인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단단히결심을 했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
일 안하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끊임없이 바스락대며 무언가를 한다. 눈과 귀, 손과 발, 잠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고 움직인다. 한꺼번에 몇 가지 일을 동시에 부지런히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컴퓨터를 하며 tv를 보고, 설겆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돌리며 전화를 하고, 이런 식으로 잠시도 가만 있는 걸 볼수가 없다.
다 이해해 줄 수 있는데. 저희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게 일 안하고 게으른 것이 아니고,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다 이해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우리 애들은 끊임없이 바스락대고, 잠시도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일이 없으니 걱정이다. 지금 나는 우리 어머니가 하던 걱정하고는 반대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안 움직이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걱정하셨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억울해서 나중에 내 아이들이 생각하고 일 안 해도 야단 안치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지금도 나는 몸 안 움직인다고, 게으르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애들은 내가 게으름을 용서해 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우리아이들은 마음 속으로 이런 다짐을 하고 있으려나? 나는 이 담에 어른이 되면 애들이 한꺼번에 이것저것 떠벌리며 수선을 떨어도 가만히 있으라고 성화대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


햇빛은 지금도 황홀하게 빛난다. 꽃 색깔을 더욱 선명하게 빛내준다. 그러나 뽑아 버려야 할 잡초까지도, 털어버려야 할 먼지까지도 아주 섬세하게 비춰준다. 이제 더 이상 생각의 꼬리잡기 놀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나를 부추긴다.
애들은 생각의 꼬리같은 건 잡으려고 쫓아다니지 않는다. 굴러가는 축구공을 쫓아 벌써 저만큼 가있다.
아, 화창한 봄날!



<고향 산>

시인의 작품. 제목이 <고향 산>이어서 산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중첩된 아코디언 접기.

친구 이 희열 시인의 시 <고향 산>



낙엽에 쓴 시


좋아하는 연암 책을 읽다가 "옛날에는 감잎에 과정록을 써서 항아리에 보관했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힌트를 얻어 그 해 가을 낙엽을 주워 가을 시를 적어보았다. 

유치원생이나 학생들이 가을이면 이런 작업들을 많이 하지만 그것들은 어떻게 보관되고 있는지..........


낙엽을 연결하기 위하여 구멍을 뚫고 구멍 뒷 부분은 한지를 덧대어 보강하였다. 

글씨는 가는 펜으로 쓰고싶었으나 낙엽이 찢어지는 바람에 굵기가 있는 펜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글씨를 쓴 다음엔 파스텔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뿌리는 픽사티브를 스프레이 하였다. 

모든 낙엽은 마치 책의 페이지처럼 연결되어있고, 그렇게 엮은 낙엽줄은 책등에 붙인 나뭇가지에 묶어두었다.



조가비에 쓴 시

전분으로 만든 인조 조가비에  바다 관련 시를 썼다.


시와 관련된 나의 수필

<詩는 풍경 소리가 되어>


척박한 땅이나 기름진 땅이나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노오란 꽃다지로 뒤덮였는데 시 한 편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지는 온통 초록으로 무르익는 단내가 진동하는데 시 한 수라도 읊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를 짓는 것은 하고싶다고 쉽게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남들이 지은 시라도 읽을 마음으로 시집을 뒤적거렸다.

나는 시에서 풍경(風磬) 소리를 듣는다. 가끔, 때로는 자주, 또는 줄곧 풍경 소리를 그리워한다. 왜 시에서 풍경 소리가 들려올까.
아마도 <詩>라는상형문자 때문인 것 같다. 사리분별 할 줄 모르던 시절에 <詩>라는 글자를 접했고, 다른 궁리 없이 상형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사물의 첫 인상은 살아가는 동안 불현듯 떠올라 권태로운 일상을 살짝 흔들어주거나, 흔들거리는 일상을 차분히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시의 첫 인상이 그렇게 나를 지배한다. 그래서 시를 떠올릴 땐 늘 풍경 소리도 함께 듣곤 한다.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산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풍경 소리. 풍경엔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태생지인 물에서부터 멀리 떠나와 산사의 처마끝에 매달려있는 물고기가 숲을 떠도는바람과 만나는 작은 소리가 시에서 들려온다.
시인은 물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의 은빛 번쩍이는 생명을 싱싱하게 그려내고, 숲속 허공에 매달린 생명 잃은 물고기의 슬픈 몸짓을 애잔하게 그려낸다. 뿐만아니다. 시인은 절간 처마끝 허공에 매달린 죽은 물고기에게 숲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슬쩍 가르쳐 주기도한다. 바람에 거부하지 말라, 바람에 몸을 맡겨라, 네가 바람과 하나될 때 너는 소리로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시인은 물고기에게 주술을 건다. 그리하여 물을 떠나온 물고기는 바람과 함께 산사에서 살아간다. 가끔, 때로는 자주, 또는줄곧 내게 풍경 소리를 선사하며.

시는 말(言)의 사원(寺)이다. 사람들이 절에서 무언가 기원을 하듯 시에는 소망의 언어들이 모여있다. 간절히 기구하는 많은 말(言)들이 절(寺)안에 가득 쌓이면 그것이 바로 시(詩)가 되는 것이다. 시(詩)는 말(言)의 사원(종교)이고 종교는우리의 삶을 지배하니 시는 곧 우리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시적(詩的)”이란 말을 참 아름답게 생각한다. 시적인 사랑, 시적인 꿈, 시적인 장면, 시적인 삶, 그렇게 시적인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면 어찌 아름다움만 표현하겠는가?
나의 시적인 삶에는 잔인한 고통도 있고, 차가운 질시도 있고, 찌든 얼룩도 있다. 쎄라비(c'estla vie).

거듭거듭 행이 바뀌어 진행되는, 페이지를 넘겨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사시적인 삶이다. 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시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자주 시를 읽는다. 소리 내어 읊는다. 그런데 시를 짓지는 못한다. 벽돌로 집을 짓자면 담쌓는 일에 거들기는   있겠으나, ()로사원() 짓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다. 멋진 () 사원() 짓고 싶다.  () 풍경 소리가 되어 숲속 옹달샘으로 찾아가리라. 몸은 절간 처마끝 자락에 매달려 있어도 소리는 얼굴까지 비추이는 명징한 옹달샘 맑은 물에 닿으리라. 살아야 하니까.
산사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아니어도 시는  다른 생명을 지니고 있다. 생명엔 온기가 있다. 온기가 추위에 굳은 어깨를 따뜻이 보듬어 안아주리라. 시는그렇게 체온을 나누어 준다.
, 봄날이어서 따뜻한가, 시가 있어서 따뜻한가, 오늘은  따뜻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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