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鑑賞)과 감상(感想).
작품을 감상한다고 할 때 말하는 <감상>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두 가지 풀이를 생각해본다. 우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이다(感想). 그리고 또 주로 예술작품을 이해하여 즐기고 평가한다는 뜻도 있다(鑑賞). 언어로 사용할 때 이런 한자를 밝히며 뜻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냥 다 감상이라고만 한다.
작가의 마음에 감상(感想)이 일어야 작품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작가의 감상(感想)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감상鑑賞, 또는 감상感想한다. 감상感想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느낌이다. 그림 속 빨간 노을을 보고 '저쪽 동네에 불이 났나?' 이렇게 말을 해도, 하늘을 바다라고 해도, 전신주를 나무라고 해도 괜찮다. 그건 개인의 느낌이기 때문에 누가 뭐랄 수 없다.
감상鑑賞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작가 자신이 작가노트와 여러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밝혔고, 전문 지식을 갖춘 여러 명의 비평가나 학자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작품에 대한 사실들을 발표한 것이다.
미술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글을 보면 그 내용이 여기저기 거의 비슷한 이유가 바로 객관적인 감상鑑賞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혜안을 가진 사람이 공증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밝혀내지 않는 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다 같다. 이미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공증된 사실이다. 다만, 글의 내용이 깊고 얕음, 넓고 좁음, 진실과 왜곡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수집한 자료의 나열이냐, 자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표현되었느냐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미술 감상(鑑賞)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보고, 읽고, 해석하는 과정이 합해져서 미술감상이 된다. 작품을 보는 것에야 아무런 선지식이 필요 없지만 그림 읽기에 들어가면 아이콘(Icon, 도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과정을 지나 해석까지 하자면 미술사의 지식이 동원된다. 작품이 탄생된 때의 시대적 배경(역사)이나 작가의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보고, 읽고, 해석하는 통합적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그림 하나 보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대로 보고 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관광 가기 전에 여행 책에서 사전 지식을 습득하고 가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이해된다. 그림을 보는데 미리 알고 가면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예술 장르들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감상(鑑賞)을 위한 과정이다.
이러한 그림읽기와 그림해석은 이제 미술사 전공한 전문가들만의 지식이 아니다. 발달된 정보통신 덕분에 조금만 수고하면 모든 궁금증을 풀 수 있다. 관심있는 그림을 웹에서 찾아보면 전문가의 논문에서부터 일반인들의 감상평까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정보가 넘쳐난다. 특히 그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미술관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작가 이력, 작품 히스토리(소유자), 전시 이력, 작가 노트, 작품해설 등등 모든 것이 기록되어있고, 다른 어느 곳보다 신뢰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을 촬영하여 게시한 사진 퀄리티도 좋다.
미술작품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여러 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관심 작품에 대해 이미 풍부한 사전 지식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작가 자신이 기록한 “작가노트”와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 스스로 말한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평론가들은 그들대로 논평이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직접적이고, 작가를 떠난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을 선택하는 방법은 주로 원화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그림이 좋아 미술관 관람을 위해 여행을 했었고, 유럽에 거주하게 되어서 미술관을 찾아 다녔었다. 이제는 책상 앞에 앉아 원화를 봤을 때의 감동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아본다. 그런 과정 중에 원화를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내 안에 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남아있게 된다.
그 기억의 창고에서 작품을 하나씩 꺼내어 다시 보는 것이 요즘 나의 미술작품 감상이다. 원화가 걸려있었던 자리와 주변에 함께 걸려있던 다른 작품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림 하나로 출발한 나의 추억은 그 도시의 기억을 소환한다.
사진 감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풍크툼PUNCTUM>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세운 개념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 무의식에서 오는 순간적인 강렬한 자극을 뜻한다. 개인의 사상과 생각과 경험등을 총동원하여 사진의 의미를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풍크툼이다. 주관적인 해석인 셈이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있던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찾아봤을 때 그 사진은 바르트의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맞닥뜨렸을 때 순간적인 찌름이 풍크툼이다.
풍크툼이 출발은 사진감상에서 시작된 개념이지만 다른 예술 작품에서도 풍크툼을 느끼게 된다. 작품의 창작자인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만나는 첫 순간에 내 가슴에 던져지는 단어들이 바로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이 된다.
내가 쓰는 명화 감상문은 감상(鑑賞)이 아닌 나의 주관적인 감상으로서 감상(感想)이다.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마루 깎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옛날 학교 복도를 걸레질하던 생각이 떠오르고, 프란츠 마르크의 <푸른 말>을 볼 때 우리집 콜렉션인 말이 생각나고, 반 고흐의 <첫 걸음>을 보는 즉시 떠오른 것은 우리 아기들 첫 발 뗄 때의 기억이었다.
메리 카사트의 <바느질>에서는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바짓단을 내어주던 시절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고, 사이 톰블리와 월렘 드 쿠닝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우리집 냉장고에 마그네틱으로 붙여놓은 손주들의 자유로운 그림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주관적인 이야기들인가!
어느 미술 평론가도, 미술사 학자도 나처럼 이런 감상(感想)을 발표하지 않는다. 나의 감상문은 작품을 보는 순간 든 연상작용으로서의 내 이야기이다. 작가에 대한 무례한 도발과 작품에 대한 비이성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미술 작품의 감상(鑑賞)이 보고, 읽고, 해석하는 단계를 거치는데 나는 그저 “보는” 단계의 이야기만을 쓴다. 이 한 단계뿐이니 아주 원시적인 셈이다.
앞으로도 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感想)문을 쓸 것이다. 감상(鑑賞)은 벗어날 수 없는 지식의 틀 속에 갇힌 채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웹사이트마다 넘쳐 흐르고 있으니 나 한 사람 더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읽거나 해석할 줄은 모르고 그저 보는 것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많은 용기를 북돋워주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끝.
https://brunch.co.kr/magazine/morge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