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소중한 사람은 그냥 지나칠 글이니 참고하세요.)
호두껍질같은 뇌에는 수많은 주름들이 있다. 주름의 표면은 쉽게 눈에 띠지만 접혀진 갈피갈피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골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생각, 고놈이 어느 갈피에 숨어들었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뇌에는 숨을 곳이 너무 많다. 숨기 전에 재빨리 잡아둬야 하는데 내 손끝은 그저 더디기만 하다. 작은 수첩에 펜을 대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생각을 찾아 뇌 갈피마다 더듬는다. 찾기 어렵다. 펜을 던져버린다.
랩톱 서페이스의 자판위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고, 지금쯤 뇌주름 속 어딘가에서 술래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잠들어버린 생각을 찾아다닌다. 랩톱을 덮어버린다. 펜처럼 던져버릴 수는 없다. 망가지면 아까우니까.
독일에 온 지 한달이 넘었다. 이제 남은 날들은 24일. 때가 되면 이곳을 떠난다.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떠난다. 1994년 8월18일에 들어와 30년이 흘렀다. 상시 거주기간은 4년, 그 후로는 드나들기로 세월이 흘렀다. 여러 해동안 출입을 안 한 적도 있었고, 일년에 여러 번을 오간 적도 있었다. 이번엔 이곳 살림을 완전히 정리하고 어쩌면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를, 그럴 확률이 큰, 독일을 떠난다. 역향수에 잠겨, 푹 빠져 허우적거리며 내 기억은 자주 이곳을 더듬을 것이다. 대도시가 아니어서, 감자밭 옥수수밭 밀밭 딸기밭이 있는 시골이라서 더 잊지못할 작은 도시 Erding이다.
이번에 온 뒤로 가장 큰 이벤트는 옆지기의 친구들이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고 어깨 인대가 찢어질 정도로 서류가방과 트렁크를 들고 유럽 출장을 다니던 옆지기가 생전 처음으로, 정말 말 그대로 ‘생전 처음’으로 순전히 놀고먹는 여행을 한 것이다. 친구 3명과 함께. 비즈니스 스트레스 없이, 목적없이 먹고 노는 여행! 그래, 당신에게도 이런 날이 있어야지!
집을 비우기 위해 틈틈이 짐을 버리고 있다. 기부할 것은 기부하고, 우리에겐 소중하지만 남들에겐 묵은 것일 뿐인 물건들은 버린다. 여러 회사들의 카달로그가 잔뜩 쌓여있다. 옆지기가 전시장에 다니며 얻어온 것들이다. 대개가 그렇잖나. 카달로그는 좋은 종이로 만들어서 얇아도 무거운 책인걸. 이젠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 자판을 누르면 휘익 날아갈 그것들을 무거운 종이에 인쇄해서 들고다녔던 시절을 보냈다. 이 많은 것들을 직접 들고다녔구나, 뒤늦게 새삼 안쓰러움을 느낀다.
궁극적으로는 無로 空手로 돌아갈 인생인데, 유형의 것들은 모두 버릴 것이다. 그러나 머리속 가슴속 창고에 가득 담긴 것들은 좀 챙겨두고싶은 마음이다. 이곳에 와서 있었던 많은 일들, 사실 글로 남긴다해도 타인에게는 참 별것도 아닌 것이 될 게 뻔한데...
감탄할만한 사진과 흥미진진한 여행 에피소드, 여행 계획에 크게 도움이 될 정보들이 온라인과 출간된 책에서 넘쳐나는 세상 아닌가. 내 이야기를 쓸까말까 망설여진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계속 쪼그라들고 있는 나의 뇌속 갈피갈피를 맴돌고 있는데 이 생각들을 붙잡아 꺼내놓을까 말까.
곧 점심 시간이다.
양배추와 토마토, 적색양파, 삶은 달걀 ,피망을 섞어 샐러드를 준비할 생각이다.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를 소스로 하고. 식초를 좀 많이 넣으면 그 자극으로 뇌속에 있는 생각들이 다시 기어나올지도 모른다. 그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