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기술, 예술의 응답
5부 기술과 이미지, 인간 이후
22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와 백남준 - 기억의 기술, 예술의 응답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형성하는가?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예술은 기술 비판의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그 가장 섬세한 내부인가?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 1952-2020)는 기술을 ‘기억의 외주화’로 사유했고, 백남준(1931-2006)은 기술을 ‘놀이와 명상의 장치’로 변주했다.
30년 전, 영상매체는 이미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고,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영상 매체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담은 책으로 출간되었다(1996년).
<에코그라피,텔레비전에 관하여>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지음. 김재희, 진태원 옮김. 2002년 번역초판. 민음사.
기술은 인간 이후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음 문장을 요구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기술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은 화면에 저장되고, 서버에 누적되며, 알고리즘에 의해 호출된다.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기억하는 법을 잃어간다.
스테글레르는 텔레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방송 매체가 제기하는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 특히 흐름의 문화라고 이야기되는 텔레비전의 문제는, 사람들이 멈추기[집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실제로 갖게 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145쪽
백남준은 그 위험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경고문을 쓰는 대신, 전원을 켰다. TV를 숭배하지도, 파괴하지도 않고, 앞에 앉아 느리게 바라보는 법을 제안했다. 화면에는 뉴스보다 나무가 많고, 메시지보다 침묵이 길다.
스티글레르는 '외기억'이라는 말로 인간의 취약성을 논한다. 기억을 맡긴다는 것은 곧 통제권을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백남준의 예술은, 통제권을 내어준 뒤에도 '우리는 다르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를 묻는다.
기술은 이미 인간의 내부에 있다. 문제는 ‘인간 이후’가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이다.
사유를 단락시키는 이미지의 시대에, 백남준은 이미지로 사유를 회복시켰다. 스티글레르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은 우리를 잊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기억하게 할 것인가.
스티글레르에게 기술은 도구가 아니라 시간의 조직자다. 인간의 기억이 신체(내기억)와 사회(집단기억)를 넘어 외부 매체에 저장되는 순간을 ‘외기억(외재적 기억)’이라 부른다. 문자, 사진, 영상, 디지털 데이터는 모두 기억의 기술이다.
기술은 인간을 가속화하지만, 동시에 망각을 낳는다. 약이자 독(파르마콘)이다. 치료도 파괴도 가능하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배치되고 교육되는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시대를 스테글레르는 어떻게 정의했는가 살펴본다.
디지털 사진은 아날로그 사진이 지니고 있었던 자연스러운 어떤 믿음을 중지시킵니다. 실제로 디지털 사진을 볼 때는, 내가 보는 것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의 사진이기 때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모든 (아날로그) 사진에서 내가 본 것은 항상 이미, 미리 있었고, 인화지 위에 찍힌 것은 실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날로그 사진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반면에 조작은 디지털 사진의 본질, 즉 규칙입니다. 그런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는 디지털 사진 이미지의 이 본질적인 가능성은 두려움을 줍니다. --- 사진에 대한 디지털 처리 방식의 가능성들이 증가함에 따라 참과 거짓을 구별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234쪽
이미 있었던 것을 증명하고,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미리 끌어와 한데 버무리는 작업이 움직이는 비디오 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움직이는 화면이 사람의 발걸음을 잡아둔다. 잠시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백남준 <TV 가든> 1974(2000년 버전). 컬러 영상(음성 포함), 29분, 최소 30대의 텔레비전과 생화 사용.
© 백남준 재단. https://www.guggenheim.org/artwork/9537
열대 식물 사이에 놓인 텔레비전들은 방송을 전달하지 않는다. 자연의 리듬 속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TV는 정보 산업의 말단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생태적 존재다. 스티글레르가 말한 ‘기술로 외주화된 기억’은 이 정원에서 속도를 잃는다. 이미지는 소비되지 않고, 자라난다. 기술은 인간을 앞질러 가지 않고, 인간의 시간에 맞춰 호흡한다. 백남준은 기술 비판을 말로 하지 않는다. 기술을 다른 장소에 놓음으로써 사유하게 만든다.
백남준 <전자 고속도로: 미국 본토, 알래스카, 하와이> 1995. 51개 채널 비디오 설치(폐쇄회로 텔레비전 영상 포함), 맞춤형 전자 장치, 네온 조명, 강철 및 목재; 컬러, 사운드, 약 4.5 x 12 x 1.2m ,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 © 백남준 재단.
네온으로 둘러싸인 미국 지도 위를 질주하는 영상들. 속도, 과잉, 분절, 반복. 이 작품은 디지털 네트워크 이전에 이미 이미지 산업의 신경계를 시각화했다. 스티글레르가 경고한 ‘기억의 산업화’는 여기서 찬란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픈 이 지도는 우리를 고속도로 위에 잠시 멈춰 세운다. 우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순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백남준은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한 현재를 노출시켰다.
백남준 <Zen for TV> 1963(1981 폐기). 개조된 허브 세트. 58 x 43 x 36cm. © 2026 백남준
https://www.mplus.org.hk/en/collection/objects/zen-for-tv-2015647/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수직선. 내용도, 메시지도, 서사도 없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TV를 가장 급진적으로 비운다. 스티글레르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는 기억의 장치가 사유를 중단시키는 순간이 아니라, 되돌려주는 순간이다. 이미지의 과잉이 아니라, 이미지의 절제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이 TV 앞에서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응시자가 된다. 기술은 다시 인간의 내적 시간으로 되돌아온다.
스티글레르는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에서 텔레비전은 현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성 자체를 인공적으로 생산한다고 한다.
'현재성'이 준거하고 있는 '현실(Réalité)이 아무리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럽거나 비극적이라 해도, 이는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한다. 21쪽
어떤 기자나 정치가가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또는 그녀)는 다른 시간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심지어는 일군의 익명적인 문안 작성자들에 의해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텍스트를 '프롬포터'가 화면에 비춰 주는 대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21쪽.
현재는 구성되고 생산된다는 뜻이다. 매체는 현존을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한다, 실시간이 자연적이지 않다. 백남준의 <Zen for TV>는 비어있는 화면, 인공적 현재를 멈추는 이미지로 스티글레르의 이론과 결을 같이 한다.
스티글레르가 기술을 사유의 문제로 만들었다면, 백남준은 그 사유를 이미지로 실행했다. 백남준 이후의 미디어 아트는 기술을 묻는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미 사용법을 보여주었다.
도슨트로 일하던 미술관에 백남준의 텔레비전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관람객들은 기계(모니터)에 대한 질문을 자주 한다. 작품의 의미 못지않게 이것이 참 궁금한 모양이다. 주로 작품 설명만 하고 이 부분은 관람객이 질문하기 전에는 설명하지 않았다.
"모니터가 고장나면 어떻게 하나요?"
"고장나면 교체하거나, 교체 불가능하면 동급의 다른 장비로 대체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백남준의 오리지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나요?" “원래 쓰던 TV”는 의미가 없나요?
"아니요. 의미는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직접 손댄 장비, 특정 전시에 사용된 장비는 아카이브적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본은 아니다. 미디어 아트는 음악과 닮았다. 악보는 같고, 연주는 매번 다르지만, 곡은 동일하다.
고장난 모니터를 교체할 때 무조건 새것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기준이 있다. 작가의 의도에 따른다. 몇 대의 모니터인가, 어떤 배열인가, 어떤 화면이 어느 위치에 오는가, 색감·깜빡임·노이즈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것이 작품의 핵심이다. 또한 작품 설치 지침서(Installation Instructions)가 있다.
백남준 작품 대부분에는 작가 본인의 문서, 생전 인터뷰, 작업 노트, 재단이 정리한 설치 가이드가 존재한다. 이 문서가 ‘오리지널의 기준’ 역할을 한다.
대체는 허용되지만, 임의 변경은 불가하다. CRT → LCD → LED로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화면 비율, 빛의 질감, 공간 내 위치가 바뀌면 작품 훼손으로 본다. 백남준은 이 문제를 미리 알고 있던 작가다. 생전에 이미 "기술은 낡는다. 그러니 작품은 계속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백남준의 작품에서 TV는 소모품이지만, 작품은 소모되지 않는다. 그의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사용법에 의해 보존된다. 기술은 낡지만, 관계는 남는다. 백남준의 작품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개척한 예술가이자, 기술 시대를 가장 먼저 예술적으로 사유한 인물이다. 텔레비전을 정보 전달의 매체가 아니라, 사유와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기술을 비판하기 위해 파괴하지 않았고, 숭배하기 위해 미화하지도 않았다. 다르게 사용했다.
백남준의 작품에서 TV는 늘 어딘가 어긋나 있다. 화면은 비워지거나, 느려지거나, 자연 속에 놓이거나, 과잉으로 폭주한다. 어긋남 속에서 관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응시자가 된다. 그의 예술은 기술을 멈추게 하지 않고, 기술 앞에 머무는 시간을 회복시킨다.
백남준은 기술의 노후화와 소멸을 이미 알고 있던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그는 ‘인간 이후’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기술의 유한성을 전제로 한 인간적 사용법을 제시한 예술가였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나 외부 환경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사유한 철학자다. 인간이 기억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언제나 기술과 함께 형성되어 왔다고 보았다. 문자, 인쇄, 영상, 디지털 매체는 기억을 저장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재조직하는 장치다.
스티글레르 철학의 핵심은 기술의 이중성에 있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지만, 동시에 사고를 위탁하고 감각을 마비시킬 위험을 지닌다. 이를 고대 그리스어 파르마콘, 약이자 독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기술은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고 교육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에서 스티글레르는 텔레비전과 이미지 산업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외부화되고 관리되는지를 분석하며, 기술 비판을 넘어 기술에 대한 책임과 사용 윤리를 묻는다. 그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로 수렴한다.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누가 어떻게 조직하는가.
백남준이 기술을 ‘놀이’로 다뤘다면, 비올라는 기술을 명상과 의식의 장으로 사용한다. 느린 영상과 반복은 이미지 소비를 중단시키고, 관객을 시간 속에 머무르게 한다.
주소를 클릭하여 작품을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https://www.guggenheim.org/artwork/4392
빌 비올라 <더 크로싱> 1996, 2채널 컬러 비디오 설치, 4채널 사운드; 10분 57초;
퍼포먼스: 필 에스포지토, 4.9x8.4x17.4m (구겐하임 미술관) © 빌 비올라
https://publicdelivery.org/bill-viola-raft/
빌 비올라 <The raft 뗏목> 2004. 벽에 컬러 고화질 비디오 프로젝션. 396.2 × 223cm.
빌 비올라의 <더 크로싱>과 <더 래프트>는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 상징적인 슬로우 모션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더 크로싱>은 한 화면에는 불길에 휩싸인 인물을, 다른 화면에는 물에 잠긴 인물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파괴와 평화로운 초월이 뒤섞인 작품으로 다양한 신념 체계에서 가져온 모호한 영적 과정을 활용하고 있다.
<더 래프트>는 거대한 파도에 갑자기 휩쓸린 다양한 낯선 사람들을 묘사하여 집단적인 투쟁과 회복력을 드러낸다.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3-1824)의 <메두사의 뗏목>과 같은 미술사적 맥락에서 영감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몰입감 넘치는 어두운 공간과 강렬한 사운드를 활용하여 위기, 인간성, 그리고 영적인 주제에 대한 본능적이고 명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5부 기술과 이미지, 인간 이후
23화 도나 헤러웨이와 이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