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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유의 조용한 조력자(1)

  동쪽에서 시작된 새벽이 정발산 위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나무들이 깨어나고 요 며칠 무차별 내리던 비에 흙을 벗어난 지렁이는 

도로가 뜨거워지기 전에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몸을 움직이며 도로를 가로질렀다.

이미 죽어서 말라 붙은 지렁이들을 피해서 곡예하듯 걸었다.










  어젯밤에 또 한 번의 난장이 있었다.

근 1년 만에 또다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보듬고 위로하고 맘껏 울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상처는, 외로움은 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호시탐탐 튀어나왔다.

튀어나올 때 아무도 없으면 괜찮다.

하지만 튀어나올 때 누군가 앞에 있으면 그는 가장 큰 표적이 되고 피해자가 된다.

나의 경우 대체로 그 앞의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답을 알기 전 까지는 문제가 뭔지도 몰랐다.

가장 복잡한 문제,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그 문제가 스르르 풀렸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 간단한 답을 몰랐던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누군가 풀어줘야 하는 문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 풀어줘야 하는 문제였다.













영화 굳 윌 헌팅의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런 영적 맞짱뜸이 있어야 했다.

굳 윌 헌팅의 로빈윌리암스는 고통으로 밀어내는 맷 데이먼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맷 데이먼은 피식 웃으며 로빈윌리암스를 밀어냈다.

로빈 윌리암스는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말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맷 데이먼은 로빈 윌리암스를 밀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뒤는 벽이었고 맷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 순간 온몸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로빈윌리엄스의 진심을 느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로빈 윌리엄스 이전에 만났던 심리치료사들도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로빈 이전에 누구도 맷을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말이었다.

맷 데이먼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계부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천재였으나 갈길을 잃고 방황했다.

mit 공대의 복도를 어슬렁 거리며 청소부 일을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세상에서 오직 한 명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아무도 모르게 풀고는 동네 건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패싸움을 했다.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랑하는 여자를 가혹하게 밀어내고 먼저 떠나버렸다.

다른 치료사들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 나도 알아요"라고 말했다.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맷 데이먼은 아직 울고 있는 어린애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스스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 내 잘못이야" 자기 잘못 같았다. 

나는 맞아 마땅한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좀 더 끝까지 집요하게 자신의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로빈윌리암스는 맷 데이먼의 모든 심리분석은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그 말 한마디

네 잘못이 아니야, 뿐이란 걸 알았다.









   그 말을 할 때 로빈 윌리암스에겐 엄청난 사랑과 용기가 필요했다.

분명히 저 어린아이가 자신을 밀칠 것을 알았다.

자신의 말이 피상적으로 들릴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갖고 집요하게 용기를 내서 그 울고 있는 어린애에게 다가가야 했다.

예상한 대로 맷은 시니컬하게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두 번째 다가갔을 때 그는 로빈을 주먹으로 치며 거칠게 밀쳐냈다.

자신의 상처를 끝까지 대면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이 원망스럽다.

맷 데이먼은 로빈을 두 번 밀쳐냈다. 

그래도 온몸과 마음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 사랑과 진심을 느꼈다. 

거짓말처럼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맷은 로빈의 품에서 처음으로 어린애처럼 울며 무너졌다. 

맷 데이먼은 무너지고 다시 살아났다.













  어젯밤 남편이 부산에서 올라왔다.

오후 6시에 퇴근하고 부리나케 ktx를 타고 왔으나 도착 시간은 밤 10시,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신이 나서 길 건너 치킨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굶은 채 늦은 시간에 마시는 맥주에 나는 취했었나 보다.

어린 시절 상처와 외로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이미 발동은 걸리고 그것들은 튀어나왔다.

내 어린 시절의 외로움은 남편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어서 남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즐겁게 시작한 술자리가 엉망으로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고질병이 도졌다.


너무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화를 내며 돌아서서 아무 쪽으로, 아무 길로나 가 버리는 것이 나의 고질병이다.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난 뒤로 돌아서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운 것 같지는 않고 화가 나서 씩씩 거렸다.

뒤에서 남편이 나를 부르며 쫓아왔지만 나는 더 빠르게 다음 건널목을 건너서 사라져 버렸다.

어제밤일을 쓰고 있자니 정말 부끄럽다. 

겁이 많은 나는 한참 걷다가 24시간 문을 여는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또 이런 짓을 하다니, 내 인생은 노답인 것 같아 절망적인 심정이 들었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얼른 받고 싶었지만 맘과는 다르게 냉정하게 전화기를 꺼버렸다.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를 자극하는 남편의 한마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작적이고 파괴적인 반응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희망 없는 마음으로 테이블에 엎드려 버렸다. 

이미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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