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시작, 듣기가 전부다(1)

파닉스를 배우는 어린아이들


영어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 중에 파닉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학원에서 파닉스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첫 시작을 한다. 파닉스는 알파벳의 음가를 배우는데 목적이 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해서 발음기호를 배우던 학습법이랑 똑같은 학습법이다. 단지 학습자의 연령이 낮아져서 좀 더 재미있게 구성이 돼 있고 발음기호를 직접 가르치며 읽게 하지는 않을 뿐이다. 중학교 때 발음기호를 익히며 단어를 발음하던 시절로부터 한 발도 나가지 못한 학습법이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79년에 발음기호를 처음 만났으니 그 이전에 영어를 배운 사람들을 다 뺀다고 하더라도 벌써 42년도 더 지났다. 42년이 지난 지금도 영어학습법은 나 때의 학습법과 같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파닉스를 배우는 자체를 문제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배우는 그 첫 시작이 파닉스 학습이라는 것이 문제다. 아기들은 태어나서 무차별적인 모국어 소리에 노출되고 귀가 열리며 옹알이를 하고 말을 한다. 글자를 배우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모국어조차도 이럴진대 외국어를 듣기 없이 읽기부터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영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파닉스로 시작하던 소리 듣기로 시작하던 그 도착점이 서울이면 된다는 것인데, 그 도착점이 서울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소리를 시작으로 귀를 먼저 트이는 학습법과, 문자로 시작해서 글을 먼저 트이는 학습법의 도착점은 결코 같은 서울이 아니다. 영어를 소리 듣기로 시작해서 귀를 열게 되면 자연스럽게 입이 열린다. 즉 듣고 말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영어를 문자 읽기로 시작하면 눈이 열리고 글을 읽게 된다. 말을 하는 거와 글을 읽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들을 수 있으면 말하고 읽을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듣지 못하면 말할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읽기가 힘들다.

예전에 어느 티브이 프로에서 백종원 씨가 일본음식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영어 이야기를 하다가 백종원 씨의 일본음식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뜬금없지만, 백종원 씨의 그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 듣고 말하는 것과 읽는 것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백종원 씨는 그의 후배와 함께 일본을 간 적이 있었다. 백종원 씨는 일본어를 알아듣고 말을 할 수가 있지만 아직 일본어를 읽지는 못하고 그 후배는 반대로 듣고 말하기는 못하는데 일본어를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둘이 일본 여행을 가면 백종원 씨가 웨이터에게 이것저것 묻고 그의 후배가 메뉴판에 쓰인 글을 읽고 음식을 주문한다고 했다. 백종원 씨는 아마도 음식 때문에 일본음식 관련 영상을 많이 봐서 자연스럽게 귀도 열리고 말도 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왜냐면, 말로 다 해결이 되니까) 아직 글은 읽지 못하지만 원한다면 글을 배워서 읽기도 할수있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그 후배는 일본어를 글자로 먼저 배웠을 거고 그래서 글은 읽을 수 있는데 소리로 접하는 시간은 절대 부족해서 일본 사람과 말을 주고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백종원 씨는 음식 관련 에피소드를 말했지만 나는 그 에피소드를 들으며 음식 이야기보다는 둘의 일본어에 대한 얘기가 더 귀에 들어왔다. 후배도 맘만 먹으면 곧 귀가 열려서 일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까?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외국어의 글을 깨치는 것보다 귀와 입을 여는 것이 훨씬 더 오랜 시간과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듣기로 시작한 영어와 읽기로 시작한 영어의 결과가 다른데 영어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할 것인가?




왜 책 읽기로는 말하기가 안되는가?


다시 이생망인 나의 영어를 얘기하자면 나는 영어책은 상당히 많이 읽었다. 워낙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인데 대학교 때는 주로 좋아하는 소설의 원서를 읽었다. 밤마다 영어성경 몇 페이지를 읽고 필사를 했던 적도 있었다.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청춘의 삶이 너무도 힘들었나 보다. 영어 성경을 필사하면서 분사구문이나 현재 완료 진행형 또는 과거완료 진행형 등의 시제에 관해서는 중 고등학교 문법 시간에 배운 것보다 더 명확하게 알게 됐다. 영어 원서 읽기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원서를 읽으면 수업시간에 무조건적으로 배웠던 지루한 문법들이 보다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으로 읽은 문장들이 입으로 뱉어지지는 않는다. 언어학자가 아닌 내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예를 들어 어느 외국인이 한글을 깨쳐서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읽고 쓰고 다 해도 이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서 대화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물론 어찌어찌 이어나갈 수는 있겠지만 서로의 의견을 묻고 듣기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글로 쓰는 펜팔은 가능하겠다. 언어와 문자의 4대 영역을 분류할 때도 분명하게 이렇게 분류한다. 듣고 말하기, 읽고 쓰기, 읽기가 말하기가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언어, 문자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까지 들어있다.


인간의 언어는 감정과 미세한 몸짓까지 다 담겨있다. 문자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리에 드러난다.

엄마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의 감탄사 비슷한 옹알이를 다 알아듣는다. 같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같은 소리가 아니다. 기분 좋은 목욕을 마치고 방금 우유 한통을 다 먹고 트림까지 한 후에 요람에 누워서 내는 옹알옹알 소리와 쉬를 해서 젖은 기저귀의 불쾌함을 느낄 때 옹알이, 좋아하는 엄마의 환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가까이 올 때 두 손을 뻗으며 내는 옹알이 등이 모두 같을 수 없다. 엄마는 아이의 옹알이를 듣고 아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아직 누워 있지만 엄마가 자기를 부르는 그 소리의 모든 의미를 알아듣는다.

엄마가 자기를 언제 짧게 뚝뚝 끊어 부르는지 안다. 콧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길게 늘여서 부르는 소리, 소파에 앉아 걱정하며 내는 긴 한숨소리, 이 모든 소리의 의미를 아이는 다 알고 반응한다. 아이는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모국어인 언어를 완성해간다. 언어는 그냥 문자를 읽어내는 소리가 아니다. 거기엔 기쁘고 슬프고 벅차고 분노하는 등의 감정이 실려 있다. 이것이 활자로 된 책 읽기가 말하기로 이어지기가 힘든 이유중의 하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영어에서 원하는 것이 읽기나 쓰기, 그리고 약간의 리텔링이라면 책 읽기만으로도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영어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내 딸이 영어를 읽기는 물론 듣고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명백히 나는 말하는 영어를 원했고 그래서 딸의 영어는 소리 듣기로 시작했고 그 결과로 듣기와 말하기는 물론 읽기와 쓰기는 덤으로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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