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namorphosis (왜상) : 그리스어 ana(위) + morphosis(형태). "위로 형태가 올라오다"
2.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 라틴어 Memento(기억하다) + Mori(죽다). "죽음을 기억하라" (당장 오늘이라도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라)
2019. 04. 18(목) 영국 런던에서 (3)
‘죽음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
산책하고 간단하게 아침 챙겨 먹은 뒤 본격적으로 런던을 구경하기 위해 지하철 타고 시내로 향했다.우선 중심가에 위치한레스터 스퀘어 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과 정원 등을 대충 구경하고 난 뒤 바로 내셔널갤러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니 뭐니 해도 런던 시내 구경의 하이라이트는 그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별로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첫 유럽 시내 구경이기도 했고 날씨도 좋았기에 왠지 마음이 들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진으로만 보던 내셔널 갤러리에 도착했다. 일행 모두 감격에 젖어 온갖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찍어댔었다.
입장료가 무료인 내셔널 갤러리 (출처 : 직접 촬영)
사실 내셔널 갤러리에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잘 몰랐지만, 유명한 박물관을 처음 둘러본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대감이 컸었다. 하지만 제대로 아는 그림들이 거의 없다 보니 자연스레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거의 무지에 가까우니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별로 구경도 안 했는데 집중도 안될뿐더러 답답하기도 하고 다리도 슬슬 아파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아는 작품이 하나 나왔다. 바로 한스 홀바인의 <The Ambassadors(대사들)>이었다. 이 그림은 예전에 공부한 적이 있었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에 왠지 모르게 반가웠었다.
몇 년도 작품이고 누가 그렸는지, 각각의 소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그림과 관련된 정보들을 많이 들었었으나, 막상 실제로 보니 그런 내용은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었다. 다만 단 한가지는 또렷이 기억났었다. 바로 이 그림에서 가장 특이점이라고 할만한 ‘해골’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다. 그림 중간 하단 부분에 그려져 있는 이 해골은 정면에서 보면 대각선으로 길게 찌그러져있지만, 신기하게도 오른쪽에서 보면 입체적으로 모양이 살아난다. 너무나도 신기했기에 이 그림을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들 붙잡아서 '여기서 보면 해골 하나가 쑥 올라와요'라며 설명해주고 싶은 욕심까지 생겼었다.
이러한 표현방법을 ‘실제와 다르게 만들어진 왜곡된 형상’의 뜻에서 ‘왜상’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anamorphosis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위’의 뜻을 가진 ana와 ‘형태’의 의미를 가진 morphosis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다. 어원 그대로 해석하자면 ‘위로 형태가 올라오다’는 뜻인데, 정면에서는 찌그러진 형태로 되어있어 어떤 모습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조금 각도를 이동하면 정확히 그 모습이 ‘위로 올라오는’ 효과가 나타난다.
정면에서 본 그림(좌)과 오른쪽에서 본 그림(우) (출처 : 직접촬영)
이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메시지를 ‘왜상’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엉뚱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기에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고개를 돌려 관점을 바로 잡은 뒤 죽음을 바라보자’고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닐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영생의 삶을 살 수는 없으며, 언제 우리 삶이 끝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당장 내일이라도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운명’을 뜻하는 영어단어 fate는 사람의 숙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Clotho, Lachesis, 그리고 Atropos)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수명의 베를 짜고 실마리를 풀며 또 그것을 자르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그들이 내 수명의 실타래를 얼마나 풀었으며 또 언제 자를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생명보험에 가입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제 우리 삶이 끝날지 알 수 없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자는 의미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라틴어 문구 ‘Carpe Diem(카르페 디엠)’은 ‘현재 지나가는 시간을 의미 없이 흘러 보내지 말고 꽉 잡아라’고 이야기 한다. 이 뜻은 워낙 이곳저곳에서 인용되었기에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전제조건이 숨어있다. (오히려 카르페 디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Quam minimun credula postero', 즉 '내일(postero)을 최소한으로 믿어라'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내일이 안 올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해, 여름 손님>의 올리버처럼 ‘나중에(later)’라는 말만 반복하며 지금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후일을 기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시간의 유한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중이다. 다른 분들도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오른쪽에서 보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 죽음과 현재의 삶, 그리고 그것의 소중함에 대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이 깊은 문장을 가볍게 여기지 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