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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환 Jul 12. 2020

식초가 되면 뭐 어때 (feat. 실패)

3. Vinegar 식초

 1. Vintage (빈티지) : 라틴어 vindemia(와인을 따)에서 유래

 2. Vinegar (식초) : Vin (와인) + aigre (신맛)     


 “지금까지 내 삶은 실패일까 성공일까?”     


 이번 공모전(나의 실패, 나의 두려움)을 준비하면서 제가 여태까지 살았던 삶을 돌이켜봤습니다. 이제 겨우 34년 살았지만 그래도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더군요. 이루고자 했던 것을 성취한 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사실 지나고 보면 사소한 것들인데 당시엔 결과 하나하나에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거나 좌절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솔로몬 왕자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라고 이야기하며 모든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마라고 조언해줬지만, 직접 그 상황에 직면하니 이런 좋은 문구가 쉽게 와 닿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특히 탈락에 대해선 말이죠.     


 아무래도 이전까지는 대입이나 취업 등 살면서 반드시 통과의례식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에서 많은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합니다. 학창 시절 유일한 목표였던 ‘육군사관학교’ 탈락, 입사하고 싶던 회사의 서류 탈락 등을 겪을 때마다 방황했었죠. 당시엔 통과 혹은 탈락 두 가지 길만 보였어요. 그 외 다른 길은 ‘패배자의 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탈락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는 요즘도 소소한 좌절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몇 번 삐끗해도 깊은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들지는 않더군요. 아마도 예전과는 다르게 조급함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마음이 급한 상태에서 열심히만 하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빨리 마시기 위해 인공적으로 급하게 숙성시키면 깊은 맛이 나올까요?     


 와인 숙성 과정을 살펴보면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오래된 느낌으로 인해서 그 가치가 더 높아지는 물건 등을 가리킬 때 빈티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빈티지라는 단어가 와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네요. Vintage는 라틴어 vindemia에서 유래된 단어로, 이는 vinum(와인)과 demere(취하다, 따다)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습니다. 즉, 의미 그대로 해석하자면 ‘와인을 따다’는 뜻이 되지요.

    

 와인의 경우 그 해 수확된 포도의 상태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데, 이를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와인 생산연도를 표시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와인(Vin)의 나이(age)라고 생각하시면 조금 더 쉽게 와 닿을 수도 있겠네요. 보통 와인은 숙성될수록 깊은 맛을 내기 때문에 포도 수확 연도가 오래되었고 그 해 농사가 풍작이었으면, 그 포도로 만든 와인의 가격은 급등합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서 더 빛이 나는 것들을 묘사할 때 빈티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프랑스 디종의 어느 와인가게 (출처 : 직접촬영)

 그런데 ‘식초’를 의미하는 vinegar도 와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이는 와인을 의미하는 단어 vin과 ‘신맛’을 뜻하는 aigre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와인과 식초는 모두 포도를 숙성시켜서 만드는데, 그 숙성 과정에 따라 결과물이 완전히 다르게 나옵니다. 와인이 알맞은 환경에서 잘 숙성되면 빈티지 와인이 되는 반면에,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신맛이 나며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되지요. 실제로 와인 테이스팅 할 때 신맛이 나면 “It’s vinegar”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Men are like wine – some turn to vinegar, but the best improve with age”
(남자는 와인과 같다. 몇몇은 식초가 되지만, 좋은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맛과 가치가 증가한다)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는 이러한 와인의 특성을 이용해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도 일명 '줄리엣의 비서' 중 한 명이자 남편 문제를 다루는 도나텔라가 "Husband is like wine. They take a long time to mature (남편은 와인 같아. 숙성하는데 오래 걸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Men을 남자나 남편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와인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죠.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나이가 들면서 깊은 향기와 품격 있는 잘 익은 와인이 되고 싶어 하지, 어딘가 서투르고 시큼한 맛이 나는 식초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식초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식초는 물김치나 장아찌 등 여러 음식 제조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조미료입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피로 회복이나 다이어트, 피부미용 등에서도 활용되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식초를 단지 와인 제조 과정에서 실패한 결과물로 치부하기에는 그 활용가치가 너무나도 높지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제 삶이 성공이냐 실패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서 “앞으로의 내 삶은 성공일까 실패일까?”라고 자문해본다면, 제 대답은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공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흔히 생각하는 물질적 혹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한 성공(“Doing something well, 즉 뭔가를 잘하고 있다”)에 가깝지요.


      

 지금 제 현실적인 목표는 ‘책 출판’이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영어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글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한 뒤 정식으로 책 출판하고, 이를 토대로 제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저는 ‘빈티지 와인’이 될 수 있겠지요. 물론 9,000만 원 이상의 초고가를 자랑하는 ‘로마네 꽁띠 2006’가 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만 원 정도 하는 ‘샤또 슈발블랑 1984’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꿈만 꾸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삶을 산다는 법은 없습니다. 숙성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조미료가 되어 음식의 감칠맛을 돋우는 식초와 같은 존재가 되면 되니까요. 영어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소소한 지식이라도 전달해주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일말의 기여라도 한다면 식초로서의 제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것 아닐까요?


- 2020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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