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환 Oct 04. 2020

도대체 뭘 샀길래 짐을 그렇게 바리바리 싸는 거야?

28. Souvenir 기념품

기억

1. Souvenir (기념품) : 라틴어 Sub(아래) + venire(오다). "(어떤 기억들이 마음의) 아래에서 올라오다, 생각나게 하다"
2. Proust Effect (프루스트 효과) : "향기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 (사람의 기억력과 가장 밀접한 관련 있는 감각은 후각)


  2019. 05. 15(수) ~ 여행을 끝내면서 (1)


 “와 도대체 어디에 구겨 넣어야 하지 ㅜ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짐 싸는 데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다들 캐리어 여기저기 빈 공간을 찾아 여태껏 샀던 물건들을 끼워 넣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어찌해서 겨우 가방에 다 넣으면 옆사람의 도움을 받아 터지기 일보 직전의 가방을 압박하여 자물쇠로 잠그는데 까지 성공한다. 하지만 또 한 번 머리를 쥐어뜯는다. 비행기 수화물 무게 제한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물건들을 그렇게 사는 것일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여행 가기 전에 ‘어디서는 벌꿀을 사고, 또 저기서는 와인이랑 신발 사고, 나중에 넘어가서는 주방용품도 사야지’하며 미리 리스트를 정리해 둔다. 그런데 뭔가 이 구입목록의 면면을 확인해 보니 기념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치 마트에 장 보러 가기 전에 살 물건들을 노트 정리한 느낌이라고 할까)     


 기념품은 프랑스어로 ‘기억, 추억, 회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souvenir에서 차용한 뒤 그대로 영어단어처럼 사용하는데, 이는 ‘아래’를 뜻하는 sub와 ‘오다’의 뜻을 가진 venire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라틴어 subvenire에서 유래했다. 즉, ‘(어떤 기억들이 마음의) 아래에서 올라오다, 생각나게 하다’의 뜻이 된다. 이 정의대로 생각해보면 기념품이라는 것은 굳이 특별히 비싸거나 고급스러울 필요는 없다. 여행지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게끔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면 그것이 souvenir, 즉 기념품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념품이라고 하는 것은 프루스트의 ‘마들렌’ 빵 조각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모티브로 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을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폴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후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두 이모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렀다가 차와 ‘마들렌’ 빵을 먹는데, 이를 통해 잊고 살았던 과거를 보게 된다. 원작인 책에서는 마들렌 빵의 ‘맛과 냄새’가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되었는데, 영화에서는 차에 곁들여 빵을 먹는 행위 자체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를 ‘Proust Effect(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 실제로 ‘사람의 기억력과 가장 밀접한 관련 있는 감각은 후각’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주인공은 이 과정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제대로 되살려내면서 상처를 치유받는다. 버림받고 학대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기념품은 맛만 봐도, 아니 향기만 맡아도 과거의 좋았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큰 캐리어를 면세점이나 아웃렛 등에서 구매한 값비싼 물건들로만 채워오면, 그것들로부터 어떤 기억이 떠오르겠는가.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이 날 수도 있겠다. ‘땀 뻘뻘 흘리며 짐 싼 뒤 낑낑대며 캐리어 끌고 고생했던’ 기억 하나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당시 동행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 중 하나는 자석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기념품은 그나마 그 정의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해당 여행지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자석을 냉장고 등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다. 이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한번 상상해보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지쳐가던 어느 날, 냉장고를 지나쳐 화장실 가는 길에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본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치 자석이 쇳조각을 끌어당기듯 내 몸을 냉장고 앞으로 이끈다. 날 끌어당긴 그 자석을 아련히 바라보며 잠시 회상에 빠진다. 그러자 당시 여행지에서 겪었던 좋은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쫙 눈앞에 그려진다. 그 순간 감정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행복에 젖는다’ 괜찮은 시나리오 아닌가? 자석은 가격도 보통 1유로 내외 정도로 저렴하고 무게도 가볍기에 크게 부담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구매했던 기념품인 런던 마그넷 (출처 : 직접 촬영)


 자석만큼 효과 있는 기념품은 아무래도 사진이 아닐까 싶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이야기와 ‘사진기의 앵글이 아니라 눈으로 담아라’는 의견 사이에서 조금의 고민을 하다가 사진 찍는 것을 주저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 책을 쓰면서도 느꼈던 것은 아무래도 사진이 당시 기억들을 가장 생생히 떠올려 주는 매개체 중 하나라는 것이다. 후각이 사람의 기억력과 가장 밀접하다고 하지만, 시각적으로 직접 보면 더 즉각적으로 회상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기념품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각 나라에 있는 스타벅스 텀블러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지역에서만 살 수 있는 특산품들이 가장 소중한 기념품일 수도 있다. 물론 니스 바닷가에서 건진 모래 한 줌도, 파리 튈리르 공원에서 주운 떨어진 나뭇잎도 기념품이 될 수 있다. 사실 종류는 크게 상관없다. 그것이 당시 여행할 때의 추억들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이라는 것은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요리가 아니라 다시 데운 음식”이다. 만약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안 나고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것들이 있으면 그냥 버리도록 하자. 냉장고에 있는지 여부도 몰랐을 정도로 방치해둔 음식은 어차피 다시 데워도 못 먹을 것 아닌가. 다시 데워도 맛있을, 의미 있는 기념품들로 내 방과 머리를 채우기에도 벅차지 않을까?

이전 27화 버팀벽이 없는 구조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