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환 Oct 04. 2020

버팀벽이 없는 구조물

27. La Sagrada Familia 사그라다 파밀리아

1. Flying buttress (플라잉 버트레스) : Flying(떠다니는) + buttress(안정감을 주기 위해 벽에 부착된 건축물). "건물 외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치하는 버팀벽" (출처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2. Sagrada Familia (사그라다 파밀리아) : Sagrada(성스러운) + Familia(가족, 가정). "성(聖)스러운 가족 성당"


  2019. 05. 14(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2)

 

 ‘와... 말이 안 나오네’


 바르셀로나 여행 둘째 날이자 유럽 여행 마지막 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가우디 투어였다. 투구 쓴 기사 모양의 옥상 굴뚝으로 유명한 카사 밀라(Casa Milà)와 해골 모양의 발코니가 있는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등을 구경한 뒤 가장 마지막은 바로 가우디의 미완성 건축물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La Sagrada Familia)이 장식했다. 이 성당은 보자마자 바로 탄성이 나왔다. 마치 피렌체에서 처음 두오모를 구경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같이 갔던 동행들도 다 비슷한 감동을 받았는지 가이드님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사진기 셔터 누르느라 정신없었다. 가이드 분이 조금 있다가 포토 스폿으로 안내해준다고 기다려달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존재만으로도 그 위상이 대단하다. 현재는 미완성 상태이지만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가면 성당 앞뒤로 크레인과 인부의 모습이 보인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원래 이 성당이 당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지 않았던 불법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착공되기 시작한 1822년 이후 137년 만인 2019년 6월이 되어서야 시(市)의 공식 허가를 받았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상징적인 건축물이 현재까지는 입장료와 기부금만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완공기간이 길어진 것도 이것과 연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출처 : 직접 촬영)


 사실 미완성인 현재 모습만으로도 해당 건축물이 주는 아우라는 엄청나다. 특히 가우디 생전에 건축이 진행되었던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çade)를 직접 보면 어떤 수식어구로 묘사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 '와~'라는 짧은 감탄사만 백번은 내뱉은 것 같다. (참고로 façade는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인데, 쉽게 생각하면 그 건물의 얼굴(face)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바로 앞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공원 내 호수에 비친 성당의 모습도 환상적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보는 야경은 비현실 그 자체다.


 그런데 혹시 Flying buttress(플라잉 버트레스)라는 개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서는 이를 고딕 양식의 건축물에서 사용되던, ‘건물 외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치하는 버팀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buttress라는 단어는 ‘안정감을 주기 위해 벽에 부착된 건축물’을 의미하는데, 이는 ‘~에 대항하여 밀다’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bouter에서 유래했다. 즉, 높은 건물의 수직적인 압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으로, ‘서로 미는 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는’ 개념인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플라잉 버트레스일 것이다. 이 버팀벽은 원래의 기능적인 측면 외에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외관 디자인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플라잉 버트레스 (출처 : 직접 촬영)


 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수직적으로 높고 거대한 건물을 가우디는 의도적으로 플라잉 버트레스 없이 건축했다고 한다. 건축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것 자체가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원리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정확히 전달할 수는 없지만, 실제 하중 지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제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이런 실용적인 이유보다 더 놀랍고 감동적인 사연이 숨어있다고 한다. 과연 무엇일까?  


 가우디는 건강상의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녔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이 크게 회복되지 않았기에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는 수많은 건축물들을 남긴다. 그중 가장 혼신을 다해 만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도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버팀목의 기능을 하는 플라잉 버트레스를 없애려고 노력했던 사연과 관련되어 있다. 거의 평생을 지팡이라는 버팀목에 기대어 살았던 그이기에, 혼신을 다해 만든 이 건축물에서 만큼은 버팀목 없이 홀로 우뚝 서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가우디 외에도 자신의 힘들었던 삶을 작품으로 승화한 예술가들은 많다. 그중에는 영화 <인셉션>에 수록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를 부른 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있다. 그녀는 빈민가에서 태어난 뒤 부모에게 방치되고 버림받았으며, 영양실조로 인해 작은 키와 좋지 않은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고로 잃었을 뿐 아니라, 그녀 또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맞던 모르핀에 중독되었고, 그로 인해 약물 중독으로 일찍 삶을 마감했다. 그런 그녀가 부른 노래 제목이자 그녀의 삶을 그린 영화 제목이기도 한 <La vie en Rose(라비앙로즈)>는 ‘장밋빛 인생’의 뜻이다. 우리는 보통 ‘장밋빛’이라는 수식어를 아름답고 찬란한 것에 많이 사용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빨갛다’는 색깔의 속성을 토대로 해석하자면 ‘핏빛 인생’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는 마치 프리다 칼로의 유작 ‘Viva la vida(비바 라 비다)’를 떠올리게 한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에도 에디트 피아프 못지않게 많은 굴곡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으며 18살 때에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여 9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이후에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몸이 많이 불편하였으며, 남편이었던 천재 화가 리베라는 그녀의 여동생과도 외도할 정도로 심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동생과 외도라니! 장모님과 외도하다 걸린 라이언 긱스와 더불어 거의 최상급 ‘뜨거운 토끼’인 것 같다) (참고 : 열다섯 번째 글 <쓰레기 같은 인간!>) 심지어 그녀는 수차례 유산까지 겪기도 했다. 그로 인해 큰 고독과 상실감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 격동의 삶을 보낸 그녀의 제일 마지막 작품은 다름 아닌 수박 그림이었다. 그녀는 반을 잘라서 시뻘건 속이 다 보이는 수박을 그려 넣은 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새겨 넣었다. 그 문구는 그녀 유작의 제목이자 콜드플레이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Viva la vida’, 즉 ‘인생이여 만세!’였다. 수박은 속이 굉장히 시뻘겋지만 그 맛은 달다. 그녀는 수박의 이런 특성을 자신의 삶에 비유한 것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녀의 삶은 피로 점철이 되었지만 그 삶조차도 달콤했다고 이야기하며 ‘인생이여, 만세!’라고 외치는 것이다.


 가우디는 자신이 제일 공들인 건축물에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버팀목을 없앰으로써, 그의 건축물에서만큼은 평생 자신이 의지했던 ‘지팡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으며 큰 사고를 당했던 피아프의 삶은 ‘핏빛’으로 물들었지만, 그녀의 노래에서만큼은 ‘장밋빛’으로 가득 찼었다. 또한 장애와 사고로 인해 몸이 불편했고 수차례 유산까지 했던 프리다 칼로는 비록 속은 ‘붉게’ 타들어 갔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수박의 맛처럼 ‘달콤’했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건축물, 그림 또는 노래 등의 작품에는 아픔과 기쁨, 슬픔 등의 삶의 애환(哀歡)이 녹아져 있다.


 물론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에 쉽사리 공감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 있다. 쉽게, 아니 어렵게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독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확인한 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면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조그만 선물이 되지 않을까?


이전 26화 빨래 품평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