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걷다
어제 저녁은 그럭저럭 잘 잤다. 꼴랑 빅데이터 '이틀'로 '든든한 저녁 속에 깃드는 꿀잠'이라 결론 내렸다. 빗소리도 밤새 코골이 화음을 집어삼켰다. 새벽에 뜬 눈으로 보초를 서지 않은 것 만으로도 성공이다. 비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소낙비가 와도 괜찮을 컨디션이었다.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면 큰일이니 7시 넘어 출발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보다 시차가 느려 그런지 태양도 늦게 뜨고 늦게 졌다. 사람 여유도 자연 따라 가는 모양이다. 첫 발 내딛으니 미끄러질 발보다 빗물에 단장한 풍경이 시원했다. 날씨는 흐리지만 공장(마그네슘)은 맑았다. 모처럼 개운한 마음으로 (고작) 평균거리 21.1km인 수비리(ZUBIRI)에서 팜플로나(PAMPLONA)로 향했다.
그동안 내게 구름은 산 위에 떠 있는 존재였다. 어느새 내려와 산 어깨를 감쌌다. 구름은 산을 덮고 풀은 우릴 에워쌌다. 걸음걸이가 포근했다. 오늘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았다. 21km를 얕잡아 봤더니 갈지자 비탈이 힘겨웠다. 군데군데 나오는 마을이 위로 했다. 집들 앞에만 서면 할머니가 아픈 배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 보던 기와 지붕, 어릴 적 도화지에 그린 모습이라 편안했다. '2km 더 가면 <라라소아나> 마을이 나온다'는 표지판이 이제 눈에 들어왔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나를 알아차렸다. '화장실=bar' 정의에 입각해 오르는데 옆길 금지 표지판도 보였다. 얼마나 질렸으면, 집주인까지 보였다. 역시 세상은 체력으로 보는 것.
세상에나. 일 년치 '초록'을 일시불로 받았다. 갈색빛 가을을 연상해서였을까. 괜히 내가 회춘한 듯했다. 초록을 폭식 했다. 내 몸도 엽록체로 물들었다. 초록은 이지(芝)답게 하는, 나를 평온으로 이끄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탈 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강물 마저 초록빛이었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노래가 절로 터졌다. 비린내도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쉴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비는 '적당히' 내렸다. 몸은 축축하지 않게, 마음은 촉촉할 만큼. 살면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적당히'였다. 비는 몸소 보여줬다. '적당히'가 뭔지, 기분좋을 만큼 일하는 게 어느 정도인지. 분위기 잡고 걸을 빗물이었지만 가방이 애처로워 판초우의를 꺼냈다. <수리아인> 다리 지나 9km 만에 bar가 등장 했다. 첫 정이 무섭다더니 첫 bar, 줄이 길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동시 다발적이기보다는 순차적인 하나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조직에서 일을 떠넘기는 사람에게 보란듯이 멀티로 일을 해내려는 나 자신이 떠올랐다. 오기로 더 많은 일을 해 보이려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한 사람 한 사람, 일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어제 반한 음식인 '또르띠야'. 이번에는 시금치 들은 걸로 시켰다(에스피나카스). 역시 훌륭했다. 헌데 그걸 능가하는 음식이 있었으니. 테이블 코 앞은 무화과 천지였다. 나무에 매달린 무화과 하나 맛 보고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순식간에 여덟 개를 따 먹었다. 이거야말로 에너지바였다. 성경에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 이름을 '이지영'에서 '이지'로 개명한 것도 열매 맺지 못하는 '영'자는 영 아니라서 뗐다. 무화과 먹는 데 합리화 같지만.
돌, 풀, 흙. 평온함들을 한 데 모은 담장이 나왔다. 건물이 아름다워 발템포가 질질 늘어졌다. 앞에서 서성대는 걸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독일인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 '투게더'를 외쳤다. 죄에 무뎌졌는지 멀찌감치 달린 길가 포도나무에도 손을 댔다. 팜플로나 도시 과일값은 비쌀 거라는 얄팍한 생각과 함께. 무화과가 유산소운동을 위했다면 포도는 크로스핏을 해도 좋을 맛이었다. 포도 에너지바로 얼추 다 왔다 싶었을 때 가장 심한 오르막이 등장했다(네르발산). 이젠 오렌지 등장. 난 주스를 먹지 않는다. 설탕물로 간주해서. 단박에 4유로를 지불했다. 한 컵에 무엇이 얼만큼 들어가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본 이상 저버릴 수 없었다.
갈지자로 오르내린 길을 대변하듯 다리도 갈지자였다. 이어 아치형 다리까지. 다리는 도착지를 알리는 예고편이리라. 일자 다리만 보던 내 눈엔 작품이었다. 작은 성당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팜플로나 대도시로 진입하면서 신호등과 차량이 많았다. 자연에 이끌려 걷던 발걸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중간에 맥 끊기는 걸 난 참 싫어했다. 유럽도시를 휘둥그런 눈이 아닌 게슴츠레 쳐다보는 걸 보니 난 도시여자는 아닌가 보다.
스페인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음식은 순례길과 더 끈끈하게 했다. 강력한 동기였다. 여러 맛 보도록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건 그래서 더 축복이다. 길에서 만난 이는 모두가 친구란다. 학연, 지연, 성별, 연령, 가치관... 다 필요 없고 나와 템포 맞으면 친구다. 길에서 본 친구가 식당에 혼자 들어왔다. 함께 했다. 파파고도. 번역기 덕에 가족, 일, 삶 이야기까지 할 수 있었다.
오늘도 먹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팜플로나 대도시에서 화살표 찾는 시간까지. 알베르게에 도착해 짐 풀고 자리 맡고 볕 좋을 때 샤워하고 빨래를 해도 부족할 판에. 고통을 줄이는 데 1차적 욕구를 사용하는 걸 보니 아직 난 1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알베르게 점 찍고 부리나케 팜플로나 대성당으로 향했다. 저녁 미사는 드리지 못하고 영혼의 향기만 맡았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등장하는 거리를 걸었다. 매년 7월6일부터 14일까지 산 페르민 축제(소몰이)가 열린다. 상점에 붙은 사진으로도 충분했다. 내겐 순례가 축제이기에. 아르하 강을 따라 걸으면 소몰이 투우장도 있고 헤밍웨이 동상도 있단다. 나는 순례자다. 관광객이 아니다. 헤밍웨이가 다녀간 '이루나' 카페에서 저녁을 먹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호강이었다. 다음 날 걷기에 밑천이 되고도 남을 과분한 음식이었다. 식당에 사람이 워낙 많아 주문하고 광장 한 바퀴를 돌았다. 소몰이축제는 없어도 도서축제는 있었다. 큰 건물조차 마을처럼 디자인이 가지각색이었다. 개성대로 사니 참 좋았다.
헤밍웨이는 인생을 '바다'로 봤다. 난 인생을 '길'로 봤다(헤밍"웨이"는 이미 이름에 '길'이 나 있다). 카페 안은 <노인과 바다> 에서 사투를 벌이던 눈빛이 느껴졌다. 낯 두껍게 눈빛 주고 받는 사진을 찍었는데 음료 주문 후 찍으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식당과 별개). 무식해서 용감한 나의 눈빛과 마주친 셈. 헤밍웨이를 떠나 이토록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한 소리인데 이러다 계속 환생할 것 같다. 순례길의 8할은 먹는 힘, 이라 믿고 싶다. 샐러드, 콩스프, 대구요리에 자연 만큼이나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설거지 하기 좋게 싹 비웠다. 누가 보면 한국에서 쫄쫄 굶다 온 사람인 양. 디저트로 선택한 애플파이도 달지 않은 꾸덕함과 많은 양에 스페인 진심을 또 느꼈다(사진은 뱃속에).
오늘은 마음이 걸음을 좌우 했다. 마음 속에 원망, 한, 야망, 욕심이 들어설 땐 발걸음이 퉁명스러웠다. 걸음이 빨라졌다. '감사'로 풍요로울 땐 걸음이 느려지고 풀, 나무, 향기, 소리에 시선이 닿았다. 오감은 걸음 과속방지턱이었다. 그 어떤 기념품보다도 값진 '알아차림'을 챙겨 넣었다. 몸이 멘탈을 부르기도 하지만 멘탈이 몸을 움직였다. 걸음은 순례길 화살표였다.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할 때 말이 빨라졌었다. 제어할 수 있는 걸음을 장착했으니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