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 속 풍요

트리아 카스텔라_사모스_사리아

by 푸시퀸 이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햄릿처럼 오늘 내 앞엔 '정통이냐 우회냐'라는 실존적 질문이 던져졌다. 목적지 사리아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산실(San Xil)을 거치는 18km의 정통 길은 고저 차가 있지만 짧고, 사모스(Samos)를 경유하는 길은 25km로 멀지만 아름다운 숲과 수도원을 품고 있다. 그동안 갈림길은 한참을 걷다 묻곤 했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운명이 청기백기 게임을 걸어왔다. 나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미학을 따지자면 게임이 안 되는 대조군이라 생각했건만, 듣자 하니 순례자의 7~80%가 지름길을 택한다고 한다. 빨리 가는 이들이 문제라기보다, 평소 '보편성'과 '공감력'의 범주에서 다소 멀게 느껴지던 나 자신을 또 다시 만난 듯했다.


산실을 택한 길도 이런 분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출발 길목에서 만난 순례자 동상은 마치 내 선택에 힘을 실어주듯 어둠 속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본격적인 숲길에 들어서자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소리가 격한 환영사를 건넸다. 콧구멍 같은 곳에서 중력을 따라 쏟아지는 물줄기는 왈츠 리듬이었고, 강줄기를 따라 걷는 길은 한국의 인공적인 수변로와는 또 다른 날 것의 맛이었다. 폐가인지 민가인지 분간 안 가는 집들이 이어질 땐 오싹함이 밀려왔지만, 적막 뒤에 나타난 전등갓과 짐승의 기척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졸인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귀가 트였다. 산속 메아리처럼 목이 쉬어라 우는 당나귀 소리와 바람의 운율에 맞춰 바닥을 쓸어대는 낙엽 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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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에서 갓 튀어 나온 지니만큼이나 거대한 고목들이 줄을 지었고, 어쩌다 보이는 집들은 덥수룩한 머리에 콧수염까지 기른 듯 온통 풀로 덮여 있었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배경이 눈밭이었다면, 이곳은 단풍 바닥 위에서 그대로 뒹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나무 사이로 산란하는 빛과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고개 들고 사는 나조차도 꽤 괜찮은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담벼락 어깨에 푸른 숄을 걸친 담쟁이와 벽을 뚫고 나온 고사리들이 정겨웠다. 길 위에 수북한 낙엽들은 누군가 양옆으로 정성껏 치워둔 덕분에 걷는 맛이 더욱 깊었다. ‘여기는 갈리시아입니다’라고 선언하듯 사방이 밤 천지였다. 한국에선 큰맘 먹고 사야 할 밤들이 발에 차이고 밟혔다. 흐드러진 수국을 보니 예전 회사 간담회 날 귀하게 준비했던 기억이 스쳤다. 여유란 건 어쩌면 이렇게 차고 넘치는 자원 속에서 자연스럽게 깃드는 것일까. ‘옹졸한 나’와 보색을 이루는 ‘넉넉한 자연’ 앞에서 마음이 한 뼘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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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사모스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 좋게 가이드 투어에 바로 참여할 수 있었다. 입장료 5유로에 돈을 더 얹어 통역비라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6세기에 지어져 다양한 문화가 층층이 쌓인 이 거대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아 보였다. 가이드의 말과 걸음 속도엔 1,400년의 무게가 녹아 있었다. 특히 1층 약방과 2층 벽화에서 발길이 멈췄다. 수도사들이 직접 약초를 재배해 이웃을 돌봤던 약방을 보며, 지초(芝)라는 내 이름의 정체성과 '건강한 삶'을 전하는 나의 사명을 짐짓 연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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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회랑 벽화는 멋지다는 차원을 넘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노동이 곧 기도"라는 정신으로 밭을 가는 성 베네딕토의 모습은 입체적인 감동으로 다가왔다. 원칙의 베네딕토와 사랑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사이에서 벌어진 ‘디퍼런트 미라클’ 이야기도 가슴에 남았다. 수도원을 나와 바를 들르고 한창 기분 좋게 걷다가 급경사 오르막을 만났다. <오 세브레이로>의 악몽이 떠올라 화가 치밀 뻔했지만, ‘등산도 곧 기도’라며 허벅지를 악물었다. 위로라도 하듯이 여성 순례자 동상이 나타났다. 숲길 한복판에 쓰러진 거대한 밤나무를 만났을 땐 마음이 애처로웠다. 누워 계신 어른을 타 넘는 불경을 저지르는 기분이었지만, 그 굵은 몸통을 짚고 건너야만 했다. 예고 없이 쓰러지는 나무는 어쩌면 우리네 삶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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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양떼 모는 개가 내게 다가와 눈빛을 한참 보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보란 듯이 눈을 맞추니, 녀석은 뒤돌아 마구 달리더니 풀을 뜯던 양떼를 반대쪽으로 몰아버렸다. 늑대 같은 성격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딜 가든 티가 나나 보다. 통상 동물이 가까이 달려들면 황당하기 마련인데, 나를 경계하며 멀리하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숲길을 빠져나오니 쓰러진 나무를 잊을 정도로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리아 마을 입구, 문어 요리인 ‘뽈뽀’ 맛집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늘 나를 챙겨주던 동료들을 위해 이번엔 내가 뭔가를 하고 싶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영업 종료가 3시 30분. 수도원까지 들러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사랑의 힘이었을까, 그간 걸음 페이스에 따르면 불가능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3시 정각에 스트라이크를 찍듯 도착했다. 마지막 남은 한 테이블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앉자마자 문 밖으로 대기 줄이 늘어졌다. 올리브오일과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문어의 정수는 초고추장에 찍는 숙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뜨렸다. 그 국물에 찍어 먹는 빵 맛은 세상의 모든 갈등을 녹여낼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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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분은 알베르게까지 이어졌다. 1층 침대에 아름다운 정원과 빨래 너는 옥상까지, 풍요로운 풍경이었다. 저녁 식사 후 주인장이 피워준 모닥불 앞에서 직접 담근 술을 나누었다. 타오르는 불꽃 앞에 모두가 하나 된 시간, 동료의 선창과 외국인들의 답가가 밤하늘로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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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고통스러울 때 ‘하루가 한 달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풍경과 감동으로 꽉 찬 오늘, 나는 기쁨에 겨워 이 하루가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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