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에 젖다

팔라스 데 레이에서 아르수아

by 푸시퀸 이지


기상예보에 비 소식이 떴다. 한국에선 준비성도 철저하지 않은 데다 예보를 잘 믿지도 않아 그냥 나갔을 테지만, 이번엔 미리 우의를 챙겨 입었다.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입는 고통이 미리 입고 걷는 불편함보다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판초우의를 괜히 입었나 싶은 의구심이 대여섯 번 치밀 때쯤 비가 쏟아졌다. 계획이 현실과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묘한 희열과 함께 하루를 열었다.


아르수아로 향하는 길목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오레오(Hórreo)'다. 지면과 떨어뜨려 기둥을 세운 곡식 창고인데, 이름이 과자와 같아 기억하기 쉬웠다. 외부 기후나 벌레로부터 곡식을 보호하는 오레오를 보며 내 마음도 저러하기를 바랐다. 방수 안 되는 운동화는 빗물에 속절없이 당해도, 내 마음만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깨달음을 저장하는 단단한 곳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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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적막을 깬 건 발소리였으나 오늘은 우의 모자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인공이다. 어둠 속을 가르는 '두두두둑' 떨어지는 선율은 비 오는 포장마차 안에 있는 듯 웅장했고, 거추장스럽던 우비는 어느새 아늑함으로 돌변했다. 불빛에 모여드는 나방처럼, 홀린 듯 들어간 첫 번째 바(Bar)는 벌써부터 내게 성취감을 안겨 주었다. 6.9유로의 값어치를 충분히 해낸 또르띠야와 내가 동일시되는 느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달걀, 감자, 양파, 그리고 흰자와 노른자까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화합하는 풍미와 푸짐한 양, 사장님이 직접 테이블까지 와서 서빙하는 사명감까지 더해진 완전체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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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꽉 찬다, 는 말은 든든한 속에 기인한 넉넉한 마음인지 남의 집 담장 넘어 심어 놓은 채소까지 눈에 들어왔다. 길은 내게 무언의 '공감'을 가르쳐주었다. 같은 방향을 걷고, 같은 풍경 앞에서 멈추고, 같은 지점에서 쉬는 모든 행위가 느슨한 연대의식을 만든다. 비에 젖은 소나무 숲에서 양팔 벌려 비를 즐기는 나무들과 기쁜 표정의 당나귀를 만났다. 질퍽한 땅은 태양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흙 내음을 끈적하게 뿜어냈다.


바지 젖는 데 예민하고 곱슬머리 유전자를 들키기 싫어하던 나는 어디 가고, 이제는 젖은 낙엽 쿠션을 즐기는 순례자만 남았다. 어제까지는 비가 없어 편히 걸었다며 햇빛과 죽이 맞았었다. 막상 비를 맛본 후에야 '비의 부재'가 가렸던 단면을 본다. 이래서 하나가 제아무리 좋더라도 다른 하나를 경험해봐야 진정 좋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나 보다. 자연은 ‘유일무이’만 쫓던 나의 맹목적인 태도를 바꾸어, ‘양자택일’의 상황에도 한 뼘 더 마음을 여는 시선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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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라는 숫자. 습관을 만드는 데 한 달은 걸린다는 그 30일이 지나자 디테일한 회고가 시작되었다. 작은 나뭇잎일수록 더 많이 흔들리는 그 미세한 떨림이 눈과 가슴에 박혔다. 초반엔 스틱에 기대 네 발로 걷던 내가 이제는 허리 힘으로 당당히 걷는다. 사람 한 살이 서른 살 먹은 개의 시간과 같듯, 이 30일의 시공간은 가속도가 붙은 세월이었다. 산티아고까지의 기대여명은 이제 고작 57km. 몇 가닥 남지 않은 이파리를 나부끼는 앙상한 나무에서도 세월이 느껴져 곁에 잠시 머물렀다. 돌기둥과 철사에 의지해 버티고 서있는 나무, 갑갑한 건 질색이라는 듯 꼿꼿하게 서있는 나무들을 발견하며 내 몸뚱이만 챙기느라 바빴던 시간을 지나, 이제야 나무의 각질과 갈증을 헤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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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 마을에 들어서니 문어 요리 '뽈뽀' 맛집이 나타났다. 말기술 좋은 첫 번째 집을 지나, 원조 정신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집을 택했다. 외국인, 한국인 남성분들과 합류해 뽈뽀와 랑고스티노(새우 튀김)를 즐겼다. 실은 <포르토마린> 알베르게에서 ‘감바스가 맛있었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엿듣고 남모르게 샘이 났던 터였다. 결국 뽈뽀 맛집에서 혼자 감바스를 주문해 길게 뻗은 테이블 끝에서 ‘사심’을 채우려 들었다. 하지만 세상 이보다 더 짤 순 없다를 증명하듯 소금 테러를 가하는 감바스에서 나를 구출해 준 건, 옆 테이블의 외국인들과 그 가게의 자랑인 뽈뽀와 랑고스티노를 기꺼이 베푼 한국인 남성분들이었다.


졸지에 한 팀이 되어 나눈 점심 식사는 ‘사심 말고 본질’을 일깨웠다. 멕시코인 마르셀로가 열변을 토한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의 위상에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졌고, 화이트 와인 잔이 댕그랑댕그랑 부딪칠 때마다 마음 점수는 10점 만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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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즐거운 대가로 다리는 무거워졌다. 점심을 베푼 남성분들의 선행에 마음마저 묵직해져 <보엔테>의 어느 바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곳은 "일 보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듯 주문을 해야만 사장님이 리모컨으로 화장실 문을 열어주는 요새 같은 곳이었다. 나는 ‘목마른 자는 내게 오라’는 기개로 맥주를 한 턱 냈고, 덕분에 우리 팀은 당당히 화장실을 통과했다. 퍼붓는 빗소리에 맞춰 이번에는 남성 세 분과의 맥주잔 종소리가 보엔테를 울렸다.


바 문을 나서자 강줄기를 따라 지독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내 몸은 솜을 등에 이고 가다 물에 빠져버린 당나귀 같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쯤 70대 J님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하며 억지로 걸음을 보탰다. 내가 대화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발을 내딛으면, 상대는 보폭을 줄여 템포를 늦추어 주었다. 서로의 한계로 결국 간격은 더 벌어지고 비와 취기가 뒤섞여 후진하는 기분이 들 때쯤, 무릎에 밴드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걷는 외국인 순례자를 보았다. 30km를 우습게 본 ‘식탐 유희’의 죗값을 멀쩡한 다리로 쥐어짜며 치르는 중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을 보며 남은 힘을 확인하는 게 인간인가 보다. 그렇게 마침내, 리바디소 다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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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알베르게는 오늘의 온갖 시름을 한 방에 씻어내 주었다. 화이트 톤의 깔끔한 분위기, 개별 칸막이와 견고한 침대, 호텔처럼 풍족한 욕실과 화장실. 침대 머리맡의 전등과 콘센트, 드라이기 같은 소품 하나하나에 담긴 디테일과 배려가 지친 순례자를 다독였다. 비록 비 때문에 빨래를 마당에 널지는 못했지만, 물방울이 맺힌 창을 투과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그 자체로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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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어쩜 그리 좋냐며, 역시 한국은 화장품의 나라라고 말을 건넨 브라질 여성의 추천으로 저녁엔 오징어 먹물 빠에야까지 해치웠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우수에 젖고, 30일간의 추억에 흠뻑 젖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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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랜턴도 켜지 않았다. 코앞만 비추는 랜턴의 불빛이 오히려 내 한계를 짓는 좁은 테두리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테두리를 넓혀준 오늘의 비를 기억하며, 내일은 달빛과 기꺼이 협업해 어둠을 정면 돌파하리라 다짐해 본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우수에 젖고, 30일간의 추억에 흠뻑 젖는 날이다. 오늘은 랜턴도 켜지 않았다. 코앞만 비추는 랜턴의 불빛이 오히려 내 한계를 짓는 좁은 테두리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테두리를 넓혀준 오늘의 비를 기억하며, 내일은 달빛과 기꺼이 협업해 어둠을 정면 돌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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