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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y 25. 2022

불행은 가난한 집에 먼저 찾아온다

 우리나라처럼 의료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은 외국살이를 안 해 본 사람들이라도 한 번쯤 다 들어보셨을 것 같다. 의료에 관한 신속한 업무처리와 높은 서비스를 국민의료보험에 힘입어 아주 낮은 가격에 받을 수 있는 것은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이곳 파키스탄의 의료시스템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병원 자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시설이나 장비도 한국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되며, 무엇보다 국민 소득 대비 병원비가 엄청나게 비싸서 일반인들은 죽기 직전에 평생 한 번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는 곳이 병원이다.


 청소부, 운전사 등 비교적 단순하고 저임금 직종이 우리 회사처럼 일정 규모를 갖춘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될 때, 개인 고용이나 작은 규모의 사업장 고용 대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 중 하나는 의료보험이다. 임금 수준은 사회 평균을 추종하기 때문에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으나 복지 혜택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어느 날 월요일. 경영지원 매니저가 나를 찾아온다.

 회사 직원 중 그린팀에 근무하는 M직원의 어린 딸이 주말에 화상을 입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가 없댔다. 굳이 보고 싶지는 않다는 나한테 화상 입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팔이랑 다리가 넓게 데었다. 팔은 이미 죽어버린 피부가 검게 변했다.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아이 엄마가 뜨거운 요리를 바닥에 잠시 놓고 다른 것을 준비하는 동안 바닥에 있는 것을 못 보고 엎어버린 모양이다. 아니, 그 뜨거운 걸 왜 바닥에 놓았대요? 하니, 중하층 서민들의 집에는 가구가 별로 없고 간단한 취사도구에 식사도 방바닥에 놓고 하는 게 일반적이라 이런 류의 화상사고가 잦은 편이라고 한다.


 허긴. 우리 집도 나 어릴 때 식탁이 어딨었나. 매번 밥상 펴고 밥 먹었지. 이 나라는 가구 품질도 열악한데 가구 비용은 우리나라보다 더 비싸서 깜짝 놀랐다. 몇십 년 된 듯한 책상도 중고로 팔면 새것과 별반 차이 없게 팔린대나. 이 나라는 뭐든 공산품 물자가 부족하다.


 그린팀은 회사 외곽의 시설물을 관리하는 조직이다. 이름이 거창한데 주로 하는 일은 외곽청소, 제초, 폭우 때 쓸려온 돌 치우기 등의 잡일이다. 교육 수준이 낮고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최저임금으로 쓰는 그런 일자리다. 그런 직원의 집에 무슨 돈이 있겠나. 그린팀도 우리 회사 직원이라 직원 당사자는 아프거나 다칠 때 의료보험 적용이 가능한데, 직원의 가족까지는 혜택이 없다. 즉, 그 딸아이는 M직원의 비용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인데, 돈이 없어 어제 병원에를 못 갔단다. M직원은 못 배우고 어딘가 약간 모자란 사람이라 화상에 대한 조기치료 인식 자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매니저가 살콤 귀띔을 해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 병원에는 보내야지...ㅠㅠ


 이곳 조직장인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회사 차원에서 불쌍한 어린것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 이게 아침부터 그 매니저가 나를 찾아온 이유다.


 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이곳 조직장으로서 이곳의 규정과 절차를 준수하고 예산을 관리하며 직원들의 업무를 감독할 의무가 있는 사람인데, 원칙을 무시하고 지원이 불가한 직원 가족에게 회사 비용을 지원할 수는 없다. 상황은 너무나 안타깝지만, 백번을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매니저에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 돌려보낸 후 자리에 왔는데, 아까 보여준 사진이 너무 강렬히 뇌리에 박혀서 자꾸 생각이 난다. 아니, 그러게, 내가 안 본대두. 대책도 없는데 어쩌라고. 두세 살 되어 보이던 그 아이가 데인 곳은 팔다리. 화상의 정도가 매우 깊고, 근육을 침범하는 수준의 심각한 화상이라면 2차 감염으로 생명이 위험할 테고, 설혹 잘 낫는다 할 지라도 움직이는 데 상당한 지장을 받을 수 있다. 피부가 신축성을 갖지 못하고 굳어지는 구축 증상을 말하는데, 증상이 오기 전에 전문 병원에서 꾸준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아 그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벌을 내리시나요 천지신명님. 조직장이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감정이 이입돼서 그만 눈물을 쏟아버렸다.


 회사 차원의 도움은 줄 수 없다. 이건 자명하다. 그럼 회사 비용을 안 쓰고 도와주면 되지. 별로 시간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병원에 보내야 한다. 일단 가까운 화상전문 병원을 수배하고 진료예약을 한 후, 아이 부모를 설득해서 병원 먼저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전 직원에게 기부 호소 메신저를 보냈다.


Good day all empoyees, This is General Manager.
As many of you are already aware/knew about the unpleasant event(burn incident) of Mr. M's daughter, it is miserable and sad for all employees.
As Mr. M is not financially sound, I would like many of our employees to help him in your capacity. I want him not to be depressed or feel alone in this situation. As you all know, severe burns require a long treatment period, countless pains, and a lot of treatment costs.
Joy increases as we share, and sorrow and pain decrease as we share.As already known, if someone wants to give any donations, please contact to Mr.S(Admin). He will collectively give these to Mr.M.
I wish and pray for the good health of all our employees and their families.
 직원 여러분, 좋은 하루입니다. 지사장입니다.
 M씨의 딸의 불미스러운 사건(화상)에 대해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만큼 우리 직원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M직원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조금씩 그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우울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심한 화상은 긴 치료 기간과 셀 수 없는 고통, 많은 치료 비용이 필요합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과 고통은 나눌수록 줄어듭니다. 기부에 동참하길 바라신다면 총무담당직원에게 연락하십시오. 그는 모인 기부금을 M씨에게 일괄적으로 전달할 것입니다. 모든 직원분들과 그 가족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다들 넉넉치 않은 임금을 받는 현지 직원들이지만, 기꺼이 기부 취지에 공감해준다.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이 모였다. 기부를 받는 동안 이슬라마바드 병원 예약이 확정되었으며 다음날 그 아이를 병원에 보낼 수 있었다. 진단 결과,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의 화상은 아니라면서, 그래도 일부 조직에 수술이 필요한 치료를 해야 한다고 경과를 알려준다. 진단과 수술, 입원에 필요한 총 병원비는 기부금보다 살짝 비싸게 청구되었는데, M직원의 처지를 듣고 기부금 범위 이내에서 치료가 가능하도록 병원비도 조정이 되었다. 인샬라. 신의 가호가 있으셨군요.


 다사다난 일주일을 현장에서 보내고, 주말 다시 이슬라마바드 아파트로 향했다. 바쁜 업무를 내려놓고 혼자 있으니 또 그 아이가 생각이 난다. 조그만 몸으로 화상과 수술을 견디어내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또 눈물이 나려 한다.


"지사장님. 안타깝지만 개인의 불행에 너무 감정이입하시면 안 됩니다. 이 나라는 이 정도 불행은 매우 비일비재한 나라예요. 둔감해지셔야 해요. 상황은 안타깝지만 선 긋지 않으시면 앞으로 생활하기 힘들어집니다."


 내가 현장지사에서 너무 마음 아파하니 옆에서 저렇게 조언을 해 주었다. 사실 그 말도 맞다. 현장과 이슬라마바드를 오가며 보이는 수많은 걸인들, 팔다리가 없이 구걸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구제해 줄 수 없는 일이고 눈을 감아버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한 번 적선을 베풀면 주변의 걸인까지 다 불러 모아서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안전을 위협받으니 절대 길에서 적선하지 말라고 교육받은 터였다. 아니 이 나라는 공장 등 산업시설도 별로 안 보이는구만, 왜 이렇게 팔다리 없는 분들이 많이 보이나요?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작은 상처에도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상처가 썩어 들어가면 생존을 위해서 팔다리를 잘라버려서 그렇대는데, 아니 그건 중세시절 이야기지, 21세기 하고도 22년도에 들을 이야기는 도저히 아닌 것 같다.

 전쟁터의 장수가 날마다 죽어나가는 전사자 숫자를 보고받으며 하루 종일 울고 있으면 되겠나. 수천수만 명이 죽더라도 냉철한 머리로 판단하고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는 게 리더가 감내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그건 또 그런 상황에서의 일이고, 나와 연이 닿은 그 아이는 이미 내가 봐 버렸다.


 주말에 센터로스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가며 그 아이를 위한 작은 선물을 샀다. 소꿉놀이 인형. 치료과정이 앞으로 더 고통스럽고 힘들 텐데, 인형놀이할 때만이라도 고통을 참아내며 이기렴. 비싼 거 못 사줘서 미안해.


 그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그린팀의 관리자인 안전환경 매니저한테 소꿉놀이 인형세트를 건넸다. 이거, 그 아이에게 전해주세요. 매니저가 나보고 직접 가서 전달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 걸 "그냥 당신이 전해주기만 해도 충분합니다."하고 들려 보냈다.


 다음날, 매니저가 두 장의 사진을 보냈다.

 치료를 잘 받고 붕대 감고 웃고 있는 사진. 선물을 받고 활짝 웃는 사진.


자신이 어릴 적 다쳐서 치료받는 사진이 외국에 실리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는 없을 것 같아서 미리미리 검열을 했다. 웃는 표정을 못 보여줘서 아쉽다


 화상의 고통이 여전히 극심할 텐데, 웃고 있는 아이 사진을 보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만해서 다행이다. 인샬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왜 꼭 불행은 가난한 집에 더 빨리 찾아오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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