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Aug 19. 2024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 당한 썰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아픈 기억

 아픈 기억을 다시 복기하는 것만 해도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서 쓸까 말까 하다가 시계열로 풀어낸 여행기 본편에는 이 얘길 안 썼는데,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둬야 또 당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조심할 것 같아서 어렵사리 소매치기 당한 얘길 꺼내본다.




 여행 떠나기 전 지인들로부터 강조 또 강조해서 들은 경고가 있다.

 스페인, 그중 바르셀로나는 특히 소매치기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니 조심하라고.

 여행 중 소매치기 무섭지. 특히 일행이 없는 혼자 여행객이 소매치기를 당하면 국제미아가 되어버릴 소지가 다분하므로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다.


 나름 소매치기에 대한 대비를 해서 가긴 했다.

 여권 분실에 대비해서 여권사본과 증명사진도 챙기고, 별도의 비상금 주머니도 따로 보관했다.

 해외에서 하등 필요가 없는 대한민국 운전면허증과 여분의 신용카드는 지갑에서 빼놓고 처음부터 가져가질 않았다. 지갑은 언제나 외투 안주머니에 지퍼를 끝까지 닫아 보관하고 다녔고 겨울이니 외투의 앞 지퍼를 열 일도 없었다.


 그런데, 결국 소매치기 당했다.


 무조건 경계하고 의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혼자 배낭여행객의 철칙이었건만, 여행지 도착 후 며칠 별 일이 없고 사방팔방 마냥 예쁘기만 한 관광지에서 마음이 풀어져버려서 사주경계가 느슨해져 버린 내 탓이다.


 2023년 12월 11일 여행 4일 차 월요일.

 몬세라트 투어 관광상품을 무사히 마치고 가이드님께 기분 좋게 팁도 10유로 드리고 카탈루냐 미술관 야경까지 씩씩하게 혼자 구경하고 돌아오던 지하철 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일이 터졌다.


https://brunch.co.kr/@ragony/399


 맨 정신에 에너지 충만했으면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루종일 뽈뽈거리고 다닌 것도 모자라 야경을 보겠다고 밤늦은 시간 혼자 돌아다녔던 것 자체가 매우 위험했던 일이었다.


 당시엔 12월 겨울이었지만, 기온은 한국 늦가을 정도로 매우 포근했었다. 거기에 나는 행군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걷다 지하철에 들어왔으니, 온몸에 땀이 났었다.


 여느 때처럼 지갑을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그고 지하철을 탔는데, 더웠던 관계로 외투 앞지퍼를 반쯤 열어놓고 있었다. 소매치기가 득실대는 지하철 안에서 말이다. 그래도 설마, 마저 앞지퍼를 나 몰래 열고 다시 안주머니까지 뒤져서 지갑을 꺼내가겠냐며 스스로를 너무 과신했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삭신이야 오늘 너무 많이 걸었어~ 멍 때리며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숙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왠 젊은 여성이 지하철 종이지도를 펼쳐 다가오며 내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하. 내가 이때 뭔가 이상하다 직감했어야 했는데. 나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데 이 여성 자꾸 스페인어로 물어본다. 내가 못 알아듣는 외국인이면 당연히 스페인어를 잘하는 주변 현지인에게 물어봐야 정상인데, 자꾸 지도를 가리키며 여기가 여기 맞지요? 하는 투의 질문을 해 댄다.


당일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분위기였음...


 "잠깐만 계셔보세요. 제가 지도 어플을 열어 찾아볼게요. 당신이 말한 역은 여기가 아니네요. 저어기~ 저쪽에 있는거예요."


 라며 알아들을지도 모를 영어로 설명을 해 주니 끄덕끄덕 하면서 밝은 웃음을 보이더니, 바로 다음역에서 내려버린다. 내 곁에 있던 어느 중년의 여인과 함께. 나는 이때까지도 아무 의심을 못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Passeig de Gràcia역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뭐가 좀 허전하다.

 아니, 이거 안주머니가 왜 열려있지?


 헉...

 지갑이 없어졌다.

 ...

 큰일났다.


 지갑에는 당연히 여행지에서 쓸 유로화 현금, 이슬라마바드 돌아가서 사용할 얼마간의 루피화 교통비, 한 장의 국제신용카드와 비상용 체크카드가 모두 다 있었단 말이다. 전철 10회권공항버스 바우처도 지갑에 있었다. 전날까지도 분실에 대비해서 한 장의 신용카드는 스마트폰 케이스에 꽂아 사용하다가 케이스가 뚱뚱해지는 게 불편해서 도로 잠시 원위치시켜놨던 터였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 왜 이런 시련이 나한테. ㅠㅠ 이제 남은 여행은 어떡하나. 망했네. 망했어. ㅠㅠ


 천만 다행히, 여권 있고, 대부분의 바우처도 있고, 정말 정말 다행히 스마트폰은 분실하지 않았다.

 그 소매치기단이 분명 내 스마트폰도 노렸을 텐데, 다행히도 내가 폰만큼은 손에 쥐고 있었던 터라 훔쳐가지 못했을 것이다. 스마트폰까지 분실했다면 모든 통신수단과 결재수단을 잃어버린 채 망망타국에서 정말 국제미아가 되었을 뻔했다.


 이제 어쩐다. 어쩐다.

 바우처는 있지만 숙소 가방에 숨겨둔 비상금만으론 남은 여행 턱없이 부족한데.


 전철역사에서 밖으로 나오니 카사 바뜨요가 보인다. 아. 그래, 여기 지나가는 한국인들에게 부탁을 해보자. 카사 바뜨요는 유명 관광지라 하루종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제 한국인을 찾아봅시다...


 한국인이 누구 안 지나가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같이 몬세라트 투어를 다녀온 신혼부부가 눈에 보인다.


"아,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네요. 저 아시죠?"


"아, 그럼요. 반갑습니다~ 숙소가 근처신가 봐요?"


"아 네... ㅠㅠ 저기... 느닷없이 이런 부탁드려 정말 죄송한데, 혹시, 현금 여유가 좀 있으면 제게 좀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이제 막 전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공짜로 달라는 게 아니라 오늘 환율로 지금 당장 한국 계좌에 입금해 드릴게요."


"아휴, 저런. 이를 어떡해요. 근데 저희가 지금 당장 몇 유로 밖에 없는데... 아, 저희가 트레블 카드가 있어요. 출금 수수료만 부담해 주신다면 저희가 근처에서 인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만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피곤하실텐데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ㅠㅠ"


 구글맵 열고 근처 은행 ATM을 찾은 다음, 구세주 같던 그 두 분 신혼여행객을 모시고 여행을 마칠 때까지 문제없을 만큼의 유로화를 인출하고,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한국계좌에 송금해 드렸다. 이로써 급한 불 해결.


 당하지 말았어야 할 소매치기 당해 기분이 땅끝까지 추락해서 숙소인 호스텔로 복귀했다.

 제길슨. ㅠㅠ 호스텔 카드키마저 지갑에 있었다. 흑흑. 문 좀 열어주세요.


 카운터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카드키를 재발급받았다. 원래 카드키 재발급에 벌금 성격의 수수료가 들어가지만 내가 워낙에 불쌍해 보였는지 분실벌금 면제해 주셨다. 소매치기는 나쁘지만 바르셀로나에는 이런 친절한 분도 계셨다. 고맙습니다. 엉엉. ㅠㅠ




 지하철에서 당한 소매치기를 복기해 보면, 그들은 지하철을 탑승하면서부터 나를 표적으로 노리고 들어왔었음이 틀림없다. 2인 1조였던 그들 중 진짜 내 지갑을 털었던 사람은 중년 여성. 내가 사주경계 느슨한 틈을 노리고 나와 같은 전철 지지봉을 붙잡는 척 하면서 미리 내 주변에 착 밀착해 있었다. 그 상태에서 얼굴 반반한 젊은 여성 투입. 내 시선과 신경을 빼앗게 만들면서 안주머니까지 뒤져서 지갑을 털어갔다. 소매치기 성공하고 전철 다음역에서 내리며 나를 향해 웃던 그 악마의 미소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실, 작정하고 노리고 설계한 소매치기라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다.

 전철 탑승 시 소매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좀 더 철저히 사주경계를 했었어야 했고, 현지인이 걸어오는 관심에 반응하지 말고 무시하거나 도망갔었어야 했다. 한 곳에 멍때리며 서 있기보다는 주변을 살피며 객차 안에서도 이리저리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였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는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택시를 탔었어야 했다.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남은 여행동안에는 더 이상의 분실사고는 없었다.

 생애 처음 당해 본 소매치기. 이번 여행 동안 가장 큰 사건사고였고 지금까지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실품이 가방도 아니고 딱 지갑 하나였던 점. 온갖 바우처, 사진, 금융정보 등이 모두 담긴 스마트폰은 분실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다.




 유럽여행 가실 때는 소매치기 조심하시라.

 그냥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미리 그들의 수법을 유튜브나 인터넷 뒤져 숙지하고 적절한 방어장비를 갖추어 여행 다니시길 추천드린다. 그리고 가급적 여행자 보험에 가입해서 만의 하나 있을지도 모를 사건사고에 대비하시는 편이 좋겠다.


 아. 지금도 그날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ㅠㅠ

이전 25화 두근두근 두바이, 바이바이 두바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