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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도 안 했는데 인생이 나왔어요

by 김연경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주문표를 잘못 보는 바람에 음료가 잘못 나갈 때가 있다. 뜨거운 음료 대신 아이스로 나간다든가, 아메리카노가 나가야 하는데 카페라테가 나간다거나. 보통 손님들은 음료가 잘못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원래 주문했던 음료로 다시 가져간다. 그런데 잘못 나온 음료를 그냥 먹는 손님도 더러 있다. 이유는 뭐 이런 거 아닐까. 빨리 가야 하거나 귀찮아서, 아니면 잘못 나온 음료가 개이득(?)이라서. 가끔 남자 무리들이 손님일 땐, 일행 중 한 명의 애정 어린 협박이 작용하기도 한다.

“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우리 인생도 주문한 대로 받아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수저는 부담스러우니까 은수저로 해주시고요. 머리는 안 똑똑해도 되는데 남편은 잘 생기게 해 주세요.” 이렇게 구체적인 커스텀까지 팍팍 해가면서.


애석하게도 우리는 모두 주문도 안 한 인생을 받아 마시며 살고 있다. 내가 주문한 대로 인생이 나오는 건 애초에 불가능. 그래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인생이 입맛에는 좀 맞으십니까..?”

그야말로 ‘이번 생 개이득 땡큐!’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뭐 그냥저냥 먹을 만한 사람도 있을 거다. 아니면 입맛에 안 맞아도 어쩌겠냐며 초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요리조리 자기 입맛에 맞게 다시 제조해서 먹거나.


그럼 인생이 내 입맛에는 맞았냐고?

하.. 정말 더럽게 맛없었다.

어렸을 때는 나름 나 잘난 맛에 살았던 것 같은데, 살아갈수록 인생이 밍밍해지더니, 나중에는 씁쓸해지기까지 했다.


학창 시절에는 딱히 말썽 안 부리고 지각, 결석 안 하는 모범생이었다. 공부 욕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 성적은 그냥 그랬고, 대충 성적에 맞춰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국어선생님을 잠시 꿈꿨으나 교직이수와 편입까지 실패한 뒤 다니던 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취업엔 애초에 뜻이 없었고, 준비는 더더욱 없었다. 정말 무슨 배짱이었을까? 이런저런 회사에 지원을 해봤지만 서류 합격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계속된 탈락의 고배에 만취해 가던 어느 날, 대학 동기 중 누군가 방송 작가를 하러 방송아카데미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엇! 나도 방송 작가가 하고 싶긴 했는데!’


그렇게 MBC 방송아카데미 구성작가 과정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 작가가 되어 연예대상에서 작가상을 받는 상상, 아니 망상까지 하면서.

하지만 그딴(!) 식으로 시작한 방송 작가 생활이 달콤할 리 없었다.


그렇게 나는 주문도 안 한, 점점 더 씁쓸해지는 인생을 마시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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