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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회사는 답정너 메뉴판

by 김연경

카페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잔 정도 그날 먹고 싶은 음료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메뉴판에 없는 나만의 레시피를 시도해 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대부분 직원들은 출근하자마자 잠을 깨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신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직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우. 저 오늘 많이 피곤한가 본데요?"

"왜요?"

"커피에서 음쓰맛이 나요."


그 말에 우린 "야 너두?", "야 나두!" 하며 서로 공감의 버튼을 눌렀다. 마침 커피맛에 대한 피드백도 심심찮게 들어오던 차여서 결국 원두를 바꾸기로 했다.


원두 테스트는 생각보다 고단했다. 일단 여러 업체에서 샘플 원두를 받아 5가지로 추려냈고, 먼저 카페 직원들끼리 맛을 봤다. 그런데 이걸 그냥 ‘맛을 봤다’ 한 마디로 퉁치기엔 억울할 정도의 과정이었다.


원두 고유의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해 원두를 바꿔 내릴 때마다 그라인더와 머신 추출구를 청소해야 한다. 5개의 원두를 맛보려면 청소만 최소 5번. 거기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한 라떼, 아이스 라떼 이렇게 네 가지를 만들어 맛을 본다. 즉 청소는 다섯 번, 추출은 스무 잔. 유후! 테스트를 마치면 배가 부를 지경이다. 그날은 모두 카페인에 절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잠을 설쳤다.


카페 직원들의 투표를 통해 2개의 원두로 추렸다. 이제 본사 시음이 남았다. 우리 카페를 담당하는 본사의 직원들이 찾아왔다. 심각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음.. 다 똑같은 거 같은뒈?”


그럴 수 있다. 원두를 바꾼다고 해서 김치찌개가 된장찌개 맛이 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여기는 엄연한 회사이니 때리면 안ㄷ.. 아니 절차에 따라야 한다. 직원들의 혀와 모든 감각을 쥐어짜서 의견을 모았고, 바꿀 원두를 최종 결정해 납품받을 날까지 정했다. 그런데..


“네??? 원두 안 바꾼다고요??”

“네.. 기존 원두 업체랑 계약 문제가 있어서 못 바꾸게 되었어요.”

이미 체념한 점장님의 말을 듣자, 카페인에 절어 밤잠 설친 그날이 떠올랐다. 못 바꾸는 게 아니라 안 바꾸는 거겠지. 역시 회사는 다 이딴 식이야..!


그래, 여기도 회사였다. 의견을 모으는 척하지만 결국 정해진 답을 밀어 넣는 답정너.

그렇게 예전에 다니던 회사가 생각났다.


헤맴을 반복하던 방송 작가 일을 접고, 나는 한 통신사의 자회사에 입사했다. 직업은 카피라이터. 상품 소개, 서비스 매뉴얼 같은 문서를 고객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쓰는 일이었다. 각 부서에서 만든 고객 자료가 고객의 손에 닿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매번 새로운 아이템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방송 작가일 땐 매 회차를 새롭게 기획해야 했지만, 이곳은 정해진 틀 안에서 주어진 작업을 했다. 적당한 창의성, 정해진 마감, 야근 없는 삶. 글은 다루되 창작의 고통이 없는 일. '이게 바로 천직인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던 그때..


꿀 냄새를 너무 풍겼던 걸까?

갑자기 해당 업무를 하지 말고 다른 팀으로 이동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 배치된 곳은 카드뉴스와 영상을 만드는 팀.


그렇다.

나는 방송국이 아닌 회사에서 다시 '작가'가 되어 있었다.


꿀 같던 하루는 다시 아메리카노로 돌아왔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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