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그때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카톡으로 그 친구 이름을 물었다.
같은 반에 주영이라는 나쁜 애가 있었어.
그런데 그때 엄마는 날 혼내지 않았잖아.
내가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거다. 바보같이 친구 때문에 엄마 지갑을 뒤진 그때의 내가 아니라
무슨 일 있냐고 묻지도 혼내지도 않은 엄마였다. 내 기억이 다 지워버린 걸까. 아니. 그럴리는 없다.
이제 와 엄마가 이런다.
"너와 나의 MBTI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또 어이없는 이유를 대는 거다.
엄마와 나의 기억엔 오류가 많다.
엄마는 내가 잘못한 것만, 나는 엄마가 미웠던 것만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에 교차점은 없다.
내가 그랬다고?
유치원을 그만두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어느 날 옷가게가 하고 싶어졌다.
옷가게에서 직원으로 잠시 일하다 사장님 모습이 좋아 보였던 지 해볼 만하겠다 싶었던지 나는 덜컥 한번 해보지 머 생각이 들고 말았던 거다. 나는 무언가 도전하는 것에 1등이다. 덤벼들 때는 다 할 수 있을 거 같고, 새로운 걸 해봐야겠다는 짜릿한 흥분에 도취된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때를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난 무언갈 덮고 싶었던 거 같다.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 해낸 나를 그럴듯한 포장으로 가리고 싶었던 거 같다.
아마 포장하고 덮고 가리고 하는 건 우리 가족 내력일 테지. 이걸 보면 엄마는 또 변명하기는 하시겠지만.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니느라 돈 한 푼 모아 둔 게 없는 처지에 옷가게를 차리려면 우선 돈부터 마련해야 했다. 엄마 아빠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기 싫었지만 그때 나는 절실했다. 나는 옷가게 사장이 되어야 했다. 이 시점의 기억이 썩 정확하지 않다. 아마 주제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라 추측해 본다. 엄마는 그때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빠한테 돈 받아내 달라고 나한테 온갖 아양을 다 떨더만. 결혼 자금 미리 달라해달라고. 제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본인을 미워 마지않으며, 이쁜 구석이라곤 없던 딸새끼가 지 필요하니 본인한테 돈 구해달라고 알랑방구를 뀌어대니 엄마도 참 속이 문드러지긴 했겠다 싶다.
그래도 결국은 얼마 후 결혼 자금을 미리 준다는 명목으로 아빠로부터 5천만 원이 입금됐다. 그래. 말하면 될 줄 알았다니까. 예전부터 돈 떨어졌다 징징대면 돈은 부족하게는 주지 않던 엄마 아빠였다.
그렇게 내 수중에 5천만 원이 쥐어졌다.
자, 이걸로 이제 어떻게 놀아볼까.
주위 좋은 직장 다니는 친구들은 자기 힘으로 5천만 원을 모으기도 하더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럴듯하게 여행을 다녔냐면 그것도 아니고, 명품을 샀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내 수중에 들어온 돈은 구멍 뚫린 것처럼 술술 새어나갔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정신 차리라고 먹는 약은 왜 아직도 나의 경제개념은 낫게 해주질 못하는 건가.
어찌 되었든 돈은 받아 냈고,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가게를 차리고 번듯한 옷가게 여사장이 되면 완벽했다.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를 멋지게 변신시키기 위한 마법을 부리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따라라란.
맘에 드는 가게를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옷을 사입하러 동대문에 가고.
나를 변신시켜 줄 마법을 신나게 부렸다. 가게 이름은 레인보우였다.
마법으로 만든 무지개.
5천만 원은 금세 떨어졌다. 마법을 부리기에 썩 충분한 금액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실컷 입어 보고, 또 입혀도 보고, 그 옷이 어울리는 손님께 또 팔고. 꽤 재밌는 마법놀이였다.
아빠 돈 5천만 원으로 마법을 부리는 동안 아빠는 개업식 때는 물론이고 단 한 번도 들러보시지 않았다. 필요하다는 돈을 주신 것 만으로 본인 역할은 했다 싶으셨나 보다. 1년쯤 후 쉬고싶어서 가게 문을 닫고 집에 있을 때 그날따라 아빠가 오랜만에 집에 오셨는데 그때도 아무 말 안 하셨다. 뭐 제대로 할 줄 기대도 안 하셨겠지. 5천에 본인 일은 다하신 거니 머.
언젠가는 엄마가 가게에 갑자기 들렀다.
이 옷은 얼마냐, 저 옷은 얼마냐, 갑자기 관심 있는 척을 해댔다. 돈 구해줬으니 역할 다 한 거 아냐?
갑자기 왜 왔지?
그러고는 이건 잘 기억나지 않는 대목이긴 한데,
인테리어를 보고 한 말이었나, 옷을 보고 한 말이었나 엄마가 걱정 돼 머라고 한 마디 했나 보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돈 구해줬으면 그걸로 엄마 역할 끝이야, 무슨 자격이 있다고 무슨 관심이 있는 척 잔소리야! 이제 와서.
"엄마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내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니 엄마는 기함을 하고 돌아갔다.
엄마, 나는 덜 채워졌어. 내가 채워도 채워도 비워지는 깨어진 그릇이라 그런지, 자식이란 그릇에 사랑을 채워주지 않은 부모들 탓인지 이제 와 보니 부모의 탓만도 아닌 거 같긴 한데...
나는 엄마, 텅 빈 깨어진 그릇이었어.
날 때부터 깨어져 나왔는지 살다가 깨졌는지 나도 이제는 모르겠어.
그때 나는 엄마,
엄마가, 우리 집이 나를 깨트렸다고 생각했나 봐.
자기가 깨트려 놓고 왜 그래!
깨트려 놓은 사람이 무슨 할 말 있어?
뾰족한 가시를 바짝 세워 엄마를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억울하다는 듯, 너는 왜 그렇게 자존심이 세냐, 고집부리지 마라, 성격이 왜 그렇게 강하냐고 하며 나와 날을 세웠다.
맞다. 나는 엄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세상만사 물러빠진 내가 절대 이기고 싶은 단 한 명. 그건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