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해 보이고 답답하겠다 싶지만 엄마가 선택한 삶. 엄마는 아무 걱정 없이 편하다며 본인 생활에 만족해하신다. 나도 아주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엄마, 이거 좀 봐봐. 이야기 할머니라고 유치원에서 그림책 읽어주는 거야. 엄마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엄마, 내가 숨고라는 데에 구직 등록해 줄게. 무리는 하지 말고 하루 몇 시간만 애 봐주고 하면 될 거 같아."
나는 엄마가 활동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엄마가 할 수 있을 만한 일들을 여러 번 권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처음엔 생각해 보마 했지만 이내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노 하시며 나의 제안을 거절하기 일쑤였다.
엄마는 결혼할 당시 무일푼이었던 아빠를 만나 온갖 궂은일을 다 하시며 가정을 일구었다. 주인집 한켠에 방을 하나 얻어 얹혀살기도 하고 갓난쟁이 오빠를 업고 조금 더 싼 집을 구해보겠다고 발품을 팔기도 하셨단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내 기억 속의 우리 집은 2층 주택집이었고 , 아주 어렸을 때는 연탄보일러를 쓰다 기름보일러로 바꾸기도 했으며, 내가 초등학교 2-3학년쯤 친구들 집에는 없던 에어컨도 사 들였던 거 같다. 또 비슷한 시기에 당시 신차였던 르망으로 차를 바꾼 기억도 난다. 내 기억에 나는 비교적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거 같다. 학교에서 가정조사서 같은 종이에 집 평수, 자가용, 컴퓨터 등등 이런 걸 적어야 할 때도 옆 짝꿍보다 풍족해 보이는 우리 집이 내심 뿌듯했던 거 같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10살 즈음의 우리 집은 아빠와 같이 일하는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자주 왔으며, 그러다 엄마 아빠는 싱크대 가게를 하셨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옆에 타월 집이 있는 우리 가게로 자주 오갔으며, 엄마 아빠는 바빴고, 가끔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봤고, 엄마가 며칠씩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밥솥에 누렇게 딱딱해진 밥을 먹어야 했다. 지금도 밥솥에 오래 있던 밥은 그때의 그 냄새가 나서 싫다. 나의 10살까지의 기억은 그렇다.
맞다. 7살 미술학원 크리스마스 행사 날에 나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당시 신혼부부가 제주도에서나 샀을 법한 목각 청둥오리 한쌍을 선물로 받았다. 훗날 엄마는 시간이 없어 급히 동네 선물의 집에서 샀다고 했다. 나는 지금 그때 내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도 왜 당시의 엄마가 이해가 안 될까. 나이가 들면 철든다는 말이 나에겐 해당이 되지 않나 보다. 나는 아직도 7살 그날의 서러움이 가득하다. 그날 나는 왜 이런 걸 줬냐고 떼를 쓰긴 했을까.
그날 못 울어서 나는 아직도 억울한 건가.
그때 우리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으며, 나는 할머니랑 같이 잤던 거 같고,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지금은 퀼트라고 불리는 손수 미싱질한 실내화 가방을 들고 다녔고, 같은 반 아이들은 주로 분홍색 캐릭터 가방을 들고 다녔다. 몇몇 못된 아이들은 내 가방을 보고 놀려 댔으며, 나는 순해 빠져 그런 아이들에 대항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 주영이란 아이는 이런 나의 약한 점을 공략했던 거 같다. 당시 3학년이었나 4학년이었나. 어른이 된 지금은 그 아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참 걱정이 되기는 한다만. 그때 주영이는 내게 집에서 돈을 가져오라 시켰다. 무슨 조건으로 그런 걸 시켰을까.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엄마에게 말도 못 하고 엄마 지갑에 손을 댔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주영이는 나한테 돈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왜 나는 그 명령을 들어야 했을까. 왜 나는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을 못 했을까?
10살,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한 즈음부터 나는 엄마에게 말 못 할 일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