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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의나비 Jul 31. 2023

여보, 밥이 없어

" 띠 띠 띠띠..."

이게 무슨 소리지? 여행 가방을 정신없이 싸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다. 알림 창에 7번이 깜빡깜빡 거린다. 이게 무슨 표시지? 당황한 나는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 냉장고가 이상해. 띠띠띠 소리가 나고 화면에 7번이 떴어!"

"여보, 나 일하고 있어... 냉장고에 A/S 번호 있지? 거기로 전화해 봐."

"아 그렇지... 그럼 되겠다. 알겠어. 일하는 데 미안."

 

아까 안 보이던 A/S번호가 냉장고 위 쪽에 떡 하니 붙어있다.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니 에러가 뜬 거라고 수리기사를 불러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당일접수는 안되고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금요일, 주말은 지나야 기사님이 오실 수 있고, 우리는 여행 후 화요일 올 정. 어쩌면 좋지.

또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남편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걸까. 그랬다. 나는 당황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일단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그가 무슨 상황이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당장 복잡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나에게 남편은 급한 불을 꺼주는 소방관이다. 나는 언제나 119를 부른다. 그리고 119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여보, 일단 냉장고 코드를 뽑아 봐."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 어디 있지? 아우 진짜 어떡해......"

"당황하지 말고, 괜찮아. 그럼 차단기 어디 있는지 알지? 현관에. 거기 차단기를 일단 다 내려서 냉장고 차단기를 찾아봐."

"아? 응. 알겠어. 어...... 없는데? 아 찾았다. 꺼졌어! 음........ 7번 표시 없어졌다!"

"그렇지? 당장은 괜찮을 거야. 음식은 다 옮겨 놓고 여행 다녀와서 기사님 부르자. 예약해 둬."

"응... 알았어. 고마워."

 오늘도 나의 소방관은 불을 꺼줬다.


사실 이런 일은 오늘 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방문수업을 다닐 때는 바쁘게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수업을 들어갔는데, 마치고 내려와 보니 주차된 차가 안 보였다. 어디에 주차를 했는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나 그때도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못 찾겠다고 말하니 퇴근하고 내가 수업하고 있는 아파트까지 와서 지하 주차장을 뒤지고 뒤져서 차를 찾아 주었다. 그동안 수업을 마치고 내려와 보니 남편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고.


언젠가는 추운 겨울날, 집에 난로를 켜고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식탁의자 위에 있던 방석이 떨어졌다. 요리하느라 정신없던 나는 방석을 어딘가 위에 올려 두고 요리를 한참 하는데 어디 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어? 무슨 냄새지? 하고 돌아보니, 방석이 난로 위에서 타고 있었다. 여보! 여보! 내가 소리 지르니 남편이 후다닥 달려와 방석을 난로에서 치우고  방석을  싱크대에 넣어 불을 꺼트렸다. 온 집안이 연기 투성이고, 남편은 창문을 모두 열어 연기 냄새를 빼냈다. 나는 그때까지도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있었다.

속으로는 방석이 왜 난로에 있었던 거지 하면서.


어찌 되었든 냉장고 사건은 그렇게 급하게 해결해 놓고 울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동안에 냉장고는 까맣게 잊고 신나게 여행을 즐겼다.


그렇게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잊고 있던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은 무사했고, 냉장고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수리 기사님이 오셨다.

걱정 스런 마음으로 수리 과정을 지켜보는데...  와... 채소칸 서랍을 여니, 냉장고 벽에 빙하처럼 얼음이 잔뜩 얼어 있다. 바닥까지 그야말로 빙하판이다. 저게 언제 저렇게 되었지...

왠지 기사님께 부끄럽다. 살림을 얼마나 제대로 안 했으면 냉장고가 저 지경이 되었을까? 드릴 같은 것을 가지고 오셔서 얼음을 우다다다 깨 부신다. 그렇게 1시간 남짓. 꽁꽁 언 얼음을 대야 가득 세 번이나 넘게 덜어냈다.

"외부 공기가 유입 돼서 냉각기가 세게 자주 돌아가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문을 자주 열어 둬서 그럴 수도 있고, 냉장고 위 바란스가 문에 걸려 문이 꽉 닫히지 않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치워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이 났다. 요리하며 재료들을 꺼낼 때 문 열고 닫기가 귀찮아 그냥 열어 두고 꺼내던 일. 문을 꽉 닫지 않아 경고음이 울리던 일.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고장 나지 않고 이만큼 사용한 것이 용하다.

그렇게 냉장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내가 뭐 했다고 진이 빠진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고 남편 쉬는 주말.

여느 때처럼 나는 끼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뭐 먹나. 일생의 과제다.

"여보 먹을 게 없어. 머 먹지."

 점심에도 저녁에도 같은 말이다.

내 머릿속에 그날그날의 메뉴판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선 나는 오늘 저녁도 시켜 먹어야지 하며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여보 좀 와봐."

남편의 심상찮은 목소리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음식들이 나와있다.

저것들이 어디서 나왔나.

유통기한 한 달은 지난 베이컨, 뜯어 놓고 안 먹은 냉장 식품들, 상해 빠진 채소들......

아... 처음 보는 듯 낯선 음식들.

 "여보 좀 너무 하지 않아? 냉장고를 열어봐야 뭐가 있는지 알지."

맞는 말이다. 나는 항상 열어보지도 않고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먹을 거 없으니 배달시켜 먹자고, 외식하자고.

나는 한 번 사서 해 먹고 나면 그 재료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음식들은 사라지지 않고 냉장고 안에서 잠든다.


남편이 내 메뉴타령에 혹시나 뭐가 있나 하고 열어 본 냉장고에서 잠들어 있던 음식들을 깨운 것이다.

나는 할 말이 없다. 참고 있던 남편이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나는 할 말이 없다. 그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지 못하는 남편 성격에 이만큼 얘기할 정도면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 맞다.


이날은 남편도 마음을 먹었는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 낸다.

나도 출근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 내가 여보를 많이 이해해주고 있어도 이건 너무 하지 않냐, 요새 다른 일 하느라 집중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하지 않냐, 그렇게 집안일이 하기 싫은 거냐.

 응? 집안일이 하기 싫은 거야? 하고 묻는 거다.

 나는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야 했을까. 그런데 기어이 입을 열고야 만다.


" 응, 하기 싫어."


남편은 놀란 눈치다. 진짜로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나 보다.

여보, 각자 자기 할 일은 해야 하는 거야. 나는 가기 싫어도 출근해서 일을 하고, 여보는 여보 일을 하고, 다온이는 다온이가 할 일을 하고 그래야 가정이 꾸려지지.


"같이 살기 싫은 거냐?"

남편이 묻는다. 이건 좀 심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살기 싫대?"

"그럼 집안일하기 싫다며, 그게 같이 살기 싫다는 거지."

"뭘 또 그렇게 말해. 그냥 집안일이 싫다고."

"그게 그거지."

 

똑같은 말들이 반복되어 오가며 감정은 반복될수록 점점 커진다.


"그만하자."


싸한 분위기로 대화가 끝난다.

이 분위기를 또 어떻게 풀지......


저녁은 있는 걸로  해 먹어야겠다.


아, 맞다.


여보 밥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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