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ADHD Sep 15. 2023

고장 난 스피커처럼

공감능력부족.

심리상담센터에서 받은 검사지에 생각나는 대로 체크를 한 뒤 나온 여러 가지 결과들 중 하나다.

공감능력부족이라니!

공감하는 능력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으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 아닌가?  내가 그게 부족하다니.

진짜 어딘가 모자란, 문제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거처럼 수치스러웠다.

혼자 들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은 나 아닌 누구도 몰라야 했다.

절대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절대로 꾹꾹 닫혀 있어야 했는데...


나는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나는 어디서나 당당하고 솔직한 사람들이 부럽다. 부럽고 두렵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는 주눅 들어 두렵고, 그들이 부러워 나를 감춘다.

언제부터였는지, 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딘가 당당하지 못하고 숨기고 포장하려 했다.

내가 믿고 안심하는 곳은 남편, 딸, 그리고 엄마뿐 이다.

그리고 이들은 안다. 내가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걸.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걸 이들만이 그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다행이고, 그래서 슬프다.

나는 고장 난 스피커처럼 제 멋대로 말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 못하면서, 이들 앞에서는 나사가 풀린 듯, 어린아이 옹알이 하듯,
나오는 대로 뱉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리가 붓고 허리가 아프다.

야근을 자주 해서 늦게 집에 와 야식을 먹으니 위도 안 좋다.

며칠 전에는 밤새 앓다 열을 재보니 39도가 넘었다. 그래도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 출근을 해야 했다.

그즈음 나도 가벼운 목감기로 기침을 좀 했는데, 기침을 자꾸 하니 목이 칼칼하고 시원한 것이 당겼다.

달달하고 따끔하고 시원한 것. 목에 안 좋을 걸 알지만 그런 것이 먹고 싶었다. 나는 늘 그렇다. 병원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 충동성, 자제력부족은 ADHD의 큰 특징 중 하나다.

먹고 싶은 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서 시원하고 따끔하고 달달한 것을 머릿속으로 찾아 헤맸다.

아! 스파클링 와인! 그거였다. 내가 마신 와인 중 제일 달달하고 맛있었던 와인. 그게 먹고 싶었다.


"여보, 나 시원한 스파클링 와인이 먹고 싶어."


남편은 열이 펄펄 나도 힘겹게 일어나 꾸역꾸역 나가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아프냐고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와인 타령을 한 것이다.


"ㅎㅎㅎㅎ"

"편의점 가서 사 와~"


남편은 웃고 만다.

나는 이때까지도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다.

고장 난 스피커가 고장 난 줄 알고 떠들겠는가,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일 뿐이지.

다음 날, 남편이 그런다.

"나 아픈데, 여보는 옆집 가서 놀고 있고, 마중해 주는 사람은 없고, 여보가 와인 먹고 싶다고 해서  좀 섭섭하더라."


남편은 섭섭한 마음을 삭힌 후에 자신의 마음을 슬며시 말해 준다. 절대로 그때그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그러지 못한다.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해 버리고 만다.

남편의 그 말을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그랬구나. 내가 또 그랬구나. 이런 나를 어쩌면 좋을까.

부끄럽고 미안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배려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누구한테 보다 섭섭하게 하고 있다.

얼마나 섭섭했을까. 센터에서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은 타고난 기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노력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불쑥 튀어나오는 무심함에 남편에게 번번이 상처를 주고 있다. 고치고 싶고 알아봐야겠다 싶어 검색해 보니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이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 거란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감정상태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나마 공감해 주며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내 생존 방법이었던 거 같다. 후천적으로 연습된 보완책이라면 보완책이겠지. 아니면 혹시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었던 아닐까? 문득 겁이 난다. 나는 내가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부끄럽고 싫다.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게 해주는 것인데, 이때 롤모델이 부재하게 되면 공감능력을 발달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롤모델의 부재. 나는 여기서 또 가정환경 탓을 해야 하는 건가.


우리 오빠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신 밖에 모르고 스스로도 그걸 인정한다.

"나만 좋으면 된 거 아니가? 다른 사람들 신경 쓸 거 없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 오빠를 엄마는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받아주고 이해하려 해서 오빠의 그런 성향을 더 키운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자신이 가장 힘들었다.

아빠는 아빠대로 자신은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는 엄마대로 참고 살았는데 알아주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오빠는 또 부모님 기대만큼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을 테고,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지 않고  힘든 것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모두 자신들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공감해 주지 못했고, 나는 공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원망만 하기에 나는 이제 충분히 나이가 들 만큼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원망만 하고 있기에는 마흔이라는 숫자가 너무 무겁다.

고장 난 스피커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는 고쳐 봐야겠다. 



혹시 스피커가 고장 났나요?

오늘 아차 하고 실수한 말이 있나요?

우리 고장 난 스피커에서 

아끼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말들이 나올 때까지 

스피커에 대고 아아, 아아, 하고 조심히 소리를 내봐요. 

지지직 지지직, 귀가 따가운 상처 주는 말들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마음을 가다듬어 봐요.












이전 14화 남편에게 쓰는 편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