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죽일 듯이 노려 본다.
내 손에는 어느새 칼이 들려있고, 오빠 손에도 둔탁한 무언가가 들려있다.
우리 둘 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 덤벼든다.
"오빠가 뭘 아는데? 오빠는 뭐 잘했는데?"
"이게 확!"
"쳐봐, 쳐봐! 나라고 못할 줄 알고?"
엄마는 중간에 서 울먹이며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서로 건드려서는 안 될 아킬레스건을 아프게 찔렀고, 묵혀뒀던 감정이 폭발했다.
오빠와는 사춘기 무렵부터 거의 대화가 끊겼다.
내가 고등학생 때 오빠는 지방의 대학교에 다녔고, 내가 대학생 때 오빠는 의경이었다.
4살이라는 나이차이가 남매사이를 가까워지지 못하게 한 것인지, 싸하고 들쑥날쑥했던 가정 분위기가 둘 사이를 굳어버리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유가 한두 가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빠도 나도 성적이 고만고만하고 성격도 그저 평범했다.
우리 남매는 위태로운 집안의 공기를 바꾸지 못했다.
우리가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나라도 성격이 더 밝았다면 엄마 아빠는 우리 때문에라도 조금은 웃으셨을까, 그렇게라도 가정이 지켜질 수 있었을까?
오빠는 이모가 소개해 준 새언니와 1년 정도 만나다 결혼을 했다.
새언니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전라남도에서도 배 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도초라는 섬이 고향이라고 했다.
언니는 아주 예쁘고 싹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차분한 인상에 늘씬한 몸매를 자랑했다.
15년 전쯤, 아직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기 전 둘은 시끌벅적하게 결혼을 했다.
아빠가 집안의 장남이기도 하고, 오빠도 사촌들 중 첫째라 조금 서두른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결혼식은 빠르게 준비됐다. 신혼집은 용인의 20평대 아파트로 아빠가 구해주셨고, 예식은 울산에서 치러졌다.
당시 나는 만나던 사람이 없었는데, 결혼이란 걸 하게 되면 이렇게 후다닥 해치우듯이 해야 하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던 거 같다. 결혼식은 둘이서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방식대로 누구나 이렇게 하니깐 비슷하게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는 결혼 안 해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오빠는 한 가정을 꾸렸고, 나와 엄마 둘이 남았다. 아빠는 여전히 집에 머물지 않으셨으므로.
결혼하고 2년쯤 뒤, 나에게 첫 조카가 생겼다. 눈망울이 포도알처럼 크고 까만, 생글생글 잘 웃는 남자아기였다. 집안에 아기가 들어오니 분위기가 화사했다. 오빠네만 집에 오면 까르르르 아기 웃음소리에 얼었던 공기가 녹고 우리 집도 여느 집처럼 하하 호호 웃음 넘치는 집이 될 수 있겠다 기대감마저 들었다. 나는 오빠와의 관계가 어쨌든지 좋은 고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 남매가 바꾸지 못한 집안 분위기를 아주 작은 생명체가 내려와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아기는 연약한 존재지만 아기의 존재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걸 느꼈다.
그 후, 한 명의 남자조카가 더 생겼고, 명절이며 집안 행사에 올 때마다 새언니는 점점 웃음기가 없어 지고 정신없이 분주하고 지쳐 보였다.
새언니는 아이들 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라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듯 보였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버거워 보이는 언니를 보며 안쓰럽기도 하고 앞으로의 내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 사이 나도 결혼을 했다. 내 결혼식에 아빠는 계시지 않았다. 내가 남편과 만날 즈음부터 두 분은 이혼 준비를 하셨으며,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때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원하는 결혼식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남편과 계획한 대로 결혼식을 셀프로 준비했으며, 비록 하객도 적고 미흡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면서부터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로부터 10년, 추석이었다.
오빠가 얼마 전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집들이 겸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였다.
식구들 이래 봤자 엄마, 오빠네 식구, 우리 세 가족이 전부였다.
새언니는 간만의 가족 모임이라 신경을 많이 쓴 듯 보였다.
나도 오랜만의 만남이라 다온에게 가장 값나가는 원피스를 입혀 갔다.
새 아파트에 인테리어까지 한 집이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전제적으로 화이트와 아이보리색으로 마감을 한 천장과 벽, 베이지색 포세린 타일 바닥에 거실에는 실링 팬, 자동으로 열리는 커튼, 은은하게 비추는 간접 조명, 비싸 보이는 브랜드 소파, 환하고 깔끔한 욕실, 잡동사니 하나 없는 완벽한 집이었다. 모델하우스 같았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나는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우드 톤의 자연스럽고 멋스러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우리 집과는 다른 분위기였지만 확실히 신경을 많이 쓰고 돈 들인 티가 팍팍 나는 고급스럽고 흠 없는 집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도 우리 집이 사람 냄새나고 더 좋아하며 이 집은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네 하며 내심 샘을 냈다. 사람의 질투심은 본능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우와, 진짜 집 좋다, 언니가 신경 많이 썼네요, 이런 거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라며 집 구경 하는 손님으로서 멘트도 잊지 않았다. 오빠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맞장구 쳐줬으며 나는 적당히 흘려 들었다.
조금 늦은 시각이지만, 새언니가 준비한 저녁이 차려지고 술잔이 오가기 시작했다.
거의 1년 만의 술자리였다.
나는 엄마 집에서 미리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온 터라 금방 취기가 올랐다.
"우리 먼저 도착해 엄마랑 한잔 해서 내일 보면 되는데, 굳이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빨리 해치우고 싶었던 건가?"
하고 싶었던 말이 터졌다.
새언니도 할 말이 있겠지.
"아니요, 저희도 울산에 다녀오느라 피곤하긴 하지만 술도 한잔하고 하려면 저녁에 봬야...
내일은 바로 가셔야 하신다고 하니 그런 건데...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오빠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내 말이 맞다 생각한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저녁 먹을 거 우리는 덤으로 부른 거 같은데요? 엄마 집에서 저녁 먹었다니깐요?"
"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해요."
"네. 그냥 말은 해야지 싶었어요. 괜찮아요."
할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편했다.
한잔 두 잔 술이 오갔다. 실없는 농담도 해가며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인테리어 하면서 힘들었던 이야기와 내가 책을 만든 이야기까지 나왔다.
새언니는 대단하다며 내가 인테리어에 대해 칭찬해 준 것에 대해 회답을 했다.
"그냥 제 얘기예요. 어린 시절 얘기, 엄마아빠 이혼한 얘기, 이런저런, 풀고 싶은 얘기들을 써봤어요."
어쩌다 보니 내가 대학을 휴학 한 얘기, 유치원을 그만두고, 옷가게를 접은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참 시작한 것도 그만둔 것도 많았다. 내가 오래 지속하고 있는 건 결혼 생활이 전부인 거 같다.
내가 아팠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엄마 아빠 사이가 불안해서 나도 불안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빠가 말한다.
"나는 니 핑계인 줄 알았다. 지가 잘못했으면서 엄마아빠 탓하는."
오빠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되받아친다.
"그럼 오빠는 내가 그러는 동안 뭐 했는데? 내가 왜 대학을 그만두고, 유치원을 그만두고, 옷가게를 접었는지 알기나 알아? 물어는 봤어?"
"..."
나도 그 이유를 모르는데 오빠라고 알 턱이 없다. 오빠는 짐짓 놀래며 입을 닫는다.
속이 시원했다. 잘한 건 없지만 내가 그러는 동안 가족들은 뭐 했냐고 묻고 싶었다.
우리 집보다 더 힘든 가정환경에서도 꿋꿋이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자식들이 더 많다는 걸 인정한다.
나도 이겨내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다. 약해빠진 내 멘털을 탓했다.
"고모, 우리 엄마 아빠도 자주 싸웠어요. 그래도 저는 언니들이 있어서 버텼던 거 같아요. 언니랑 노는 게 너무 재밌었거든요. 고모는 사랑받고 자랐어요. 저에 비하면 공주님이죠."
사랑받고 자랐다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내가 그렇게 외롭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새언니는 내가 공주로 보였단다. 세상에.
나는 공주님이었다.
나만의 성에 갇힌 공주님. 문 좀 열어 달라고 조용히 우는 공주님.
허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안에서 나만 외로이 탓하며 울었다.
조금 더 크게 울지, 문을 열고 나가보지, 바보 같이 그러지 못했다.
나는 크게 소리칠 자신이 없었고, 문을 열고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나는 나의 성을 지었다.
그곳엔 나의 남편과 딸이 있다. 언제건 내가 부르면 달려와 안아 준다.
더 이상 나를 울게 했던 그때의 성을 원망하지 않는다.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여기서 나의 삶을 산다.
나의 성을 지킨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내 가족이 있다.
혹시 나를 아프게 했던 과거의 가족들을 아직 원망하고 있나요?
상처받은 어린 나에 머물러 있나요?
이제 그만 울어요. 울지 말아요.
더 이상 나는 어리지 않아요. 상처받지 않아요.
그동안 나는 많이 자랐고, 이겨냈어요. 그래서 이만큼 왔어요.
그래도 잘해왔어요. 그렇게 아팠는데도 이렇게 잘 해냈잖아요.
용기를 가져요. 희망을 가져요.
이제 내 행복은 여기에 있어요.
응원할게요. 어린 내가 진짜 어른이 되는 날까지 내가 지켜볼게요.
힘을 내요.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