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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라쥬 Jun 15. 2020

프레임으로 나를 가두는 날

숫자의 저주 (ft. 머피의 법칙)


오래전 연인이었던 그가 꿈에 나왔다. 뜬금없이 아프단다. 많이 아팠는데 그간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했단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이 무슨 난데없는 뜻밖의 재회란 말인가.. 실제도 아니고 그것도 꿈에서..


드르르르륵.

[긴급재난문자_ 확진자 발생]


무언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잠자리를 떨쳐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당시 시각 오전 8시 18분.

하필이면 휴대폰으로 마주한 시간에 숫자 8이 두 번이나 겹쳤다. 조짐이 좋지 않다. 애써 숫자를 떨쳐내고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방으로 향한다. 여느 날보다 유독 늦잠을 자며 칭얼대는 아이들. 애써 고운 목소리를 쥐어짜며 갖은 애교와 함께 아이들을 깨워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유난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칭얼거리는 둘째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시선을 돌려 시계를 본다. 이때 시각 오전 9시 09분.


'안과를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빠르게 외출 준비를 한다. 외출복을 갈아입고, 큰아이의 학습량을 체크하고, 둘째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워 집을 나선다. 현관 키패드로 미리 호출한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무심결에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본다. 오전 10시 10분.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안과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있는 안과를 바라본다. 다행히도 출입문이 열려있다. 안도하며 발을 내딛는 순간, "오늘은 오전 진료가 없습니다. 예약 리스트에 이름 적어주시고, 이따 2시에 다시 오세요." 이.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 벽면의 시계를 바라보게 된다.  당시 시각 오전 11시 11분.


허탕을 치고 발을 돌려 나온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다른 안과로 향한다. 늘 다니던 지름길로 차를 몰아본다. 마트 옆길의 왕복 4차로. 신호등을 지나자마자 정면에 검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까마귀다. 나의 차선 정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에 치우쳐있다. 오른쪽 차선에는 자동차들로 갓길 주차가 되어있어 차선 변경은 불가능하다. 도로 중앙엔 분리대가 있어 반대편으로의 진입도 불가능하다. 와중에 녀석과 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빵빵대며 클락숀을 울려본다.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도 녀석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 결국 녀석과 나의 거리 1m를 남겨두고 나는 비상등을 켰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녀석에게로 디다다닥 달려갔다. "저리 좀 가라!!"  그제야 녀석은 푸드덕대며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까마귀와의 신경전을 끝내고 겨우 도착한 또 다른 안과. 지하 5층까지 있는 주차장이 모두 만원이다. 지하 5층까지 모든 층을 빙글빙글 돌며 결국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간다. 빙글빙글 수차례 돌다 겨우 빈자리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정면에 이중 주차된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어쩔 수없이 초보시절로 돌아간 듯 전진 후진을 수차례 반복한 후에야 결국 주차가 마무리된다. 한숨을 내쉬며 나도 모르게 시계에 눈이 간다. 낮 12시 12분이다.




오래된 버릇이자 패턴이다.

숫자에 달린 징크스. 그런 날엔 유달리 시계를 자주 보게 되는 탓도 있다. 허나, 정말이지 신기한 것은.

그런 날에 시계를 보게 되면 늘 이런 식이다.


10:10, 11:11, 12:12

1:11, 2:22, 3:33, 4:44, 5:55...


이러한 숫자의 저주는.

아니 숫자의 프레임으로 인한 찝찝한 기분은. 주로 오전에 시작되어 오후 4시 44분쯤 절정을 이룬다.


이런 날의 나는,

'그래도 혹시나'하는 기대로 '깨어져라, 깨어져라!' 하며 평소보다 시간을   자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여지없이 반복되는 숫자의 실루엣.


동일 숫자의 프레임을 벗어나 보려 노력할수록 더욱 그들이 내게 가까이 스며들어옴을 느낀다. 그러다 마침내 5:55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그저 체념하고 만다. '역시나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 조용히 맥주를 찾으며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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