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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Mar 26. 2020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

나를 바꾸는 것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1년, 나는 바뀐 환경과 적성에 안 맞는 전공으로 인해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다. -정확한 진단을 받지는 않았고, 상담 전 받았던 설문검사 결과 우울감이 오래 지속되어 우울증으로 넘어가기 직전 단계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웃으며 '그런 때도 있었지~' 하고 넘기지만, 고3 시절도 잘 버텨낸 나는 막 20살이 되고 인생에서 처음 겪는 우울감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도 돌아서면 바로 우울이 따라붙었고, 아무 일없이 누워있다가도 갑자기 밀려오는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결국 집 근처 상담 센터에서 주 2회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 데,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 단단해졌다.



   이때 느낀 점에 대해서는 차차 여러 편에 걸쳐 풀어나가고 싶은데, 이번에는 내가 느꼈던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에 대해 나눠보고 싶다. 내가 느꼈던 대부분의 우울감이 '바람직'이라는 막연한 개념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당시 나는 학생회 활동도 하고 있었고, 대학에서 나름대로 친구들을 사귀며 잘 어울리는 등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는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느꼈던 것은 아마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초중고 내내 한 동네에서 자라며 학교에 걸어서 다녔고, 그만큼 같은 학교로 진학한 친구들이 많아 가장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인연이 이어져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어도 한 반의 절반 이상이 아는 얼굴이었으니 사람이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크게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하나 없이 학교에 가고, 심지어는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안정적이고 익숙했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여기에서 나를 괴롭혔던 것이 바로 '바람직'이다. 나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멋진 대학생이라는 이미지는 꽤나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술자리를 즐기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잘하는 소위 '과탑 인싸'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대학생이었다. 그리고는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들과는 예전처럼 가까운 친밀감을 유지하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말이 안 된다. 물론 누군가는 저렇게 생활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체력적, 성격적으로 저 많은 것들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과 일, 자기 자신을 돌보기 위해 적절히 분배하며 살아간다. 수십 명의 사람과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사람이라면 아마 한 명 한 명에게 쏟는 관심의 양이 조금 분산될 것이다. 반대로 나 같은 사람은 에너지의 절반 정도는 나 자신에게 쏟고, 나머지는 많아야 세네 명의 사람에게 몰아서 쏟는다. 이러한 비율은 무엇이 좋고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람의 특성마다 '다른' 것이고, 자신의 성격에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에너지를 쏟는 비율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내향적인 것보다는 외향적인 게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개인주의보다는 이타주의가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기반으로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못한 나를 탓했다.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을 때 안정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 환경에 대해 파악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알려주고, 서로 맞추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변한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를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4개월간 버티고 무너졌다.







   상담 이후, 나는 내가 다소 내향적이고 개인적이고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반대되는 가치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받아들였다. 그 뒤로는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별로 원하지 않는 모임에 나가기보다는 정말 친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한번 더 만났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새내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성향이나 인간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외모나 사회적 성과 등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나의 과거 경험을 근거로 단호하게 말하건대, 나를 바꾸려는 생각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치적 우위가 없는 것에 '바람직'이라는 우위를 세우지 말아라. 이제는 다소 식상한 표현이라고 여겨져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기억하자.



   당시 상담을 하면서 나는 내가 외향성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었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성향에 우위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초라하고 별로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대게 그 바람직함은 맞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고, 나를 깎아내리면서까지 좇을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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