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그 아이 다문화야”
“그 동네에 다문화가 많잖아”
일상에서 별 뜻 없이 주고받는 대화다. 글자 그대로 ‘다양한 문화’를 일컫는 ‘다문화(多文化)’라는 단어가 어쩌다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게 됐을까.
위 사례에서 본 것처럼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레토릭은 ‘다문화가정’을 뜻하기도 하고 ‘다문화가정’의 2세를 명명하기도 한다. ‘다문화학생’, ‘다문화자녀’, ‘다문화청소년’, ‘다문화 노래경연대회’…. 포털 사이트에서 ‘다문화’로 검색해서 최근 신문기사 제목만 죽 훑어봐도 ‘다문화’라는 레토릭을 사용해 만든 조어들이 어색한 레토릭이 되고 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문화’가 표방하는 가치관과 달리 역설적으로 ‘구별짓기’를 조장하기도 한다. '다문화'도 ‘거시기’라는 사투리처럼 뭉뚱그려 얘기해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대충 뜻이 통하는 단어가 된 것일까? 아무도 유래와 함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누구나 쓰는 레토릭이 됐다.
우리가 쓰는 ‘다문화’는 영어의 ‘multicultural’에서 나왔다. 이 말의 역사는 아주 짧다. 20세기 초중반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해 1980년대에 미국에서 교육자들에 의해 확산됐다고 하니 채 100년도 안 된 말이다. 구글 N그램뷰어에서 바로 확인 가능하다.
‘multicultural’은 ‘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적, 민족적 집단과 관련한’(옥스퍼드 사전), ‘특히 인종적, 종교적 전통에서 다른 다양한 문화와 관련된’(케임브리지 사전), ‘다양한 문화의, 다양한 문화와 관련된’(메리엄-웹스터 사전)이란 사전적 뜻이 있다. 그러니까 ‘다문화’(multicultural 또는 milticulturalism)라는 말은 원래 인종, 민족, 종교, 문화 등과 관련이 있고 외국, 즉 국가와 결부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주로 ‘외국인’ 그중에서도 특히 ‘동남아’와 관련돼 인식된다.
2021년 8월 현재 여자 테니스 세계랭킹 2위로서 도쿄 올림픽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였고, 넷플릭스에 인물 다큐멘터리가 올라온 세계적인 스타 오사카 나오미를 대부분 한국 언론이 ‘혼혈 선수’라고는 해도 ‘다문화 선수’라고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이 레토릭이 ‘국내용’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기사에 쓰인 ‘다문화’는 거의 ‘다문화(茶文化)’, 즉 차(tea) 문화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다문화’의 의미로는 ‘혼혈(아)’이 많이 쓰였고, 저잣거리에서는 심지어 ‘튀기’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는 2003년 30여 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건강가정시민연대가 기존의 혼혈아, 국제결혼, 이중문화가족 등 차별적 용어 대신 ‘다문화가족’으로 대체하자고 권장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08년에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됐으니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좋은 취지로 민간에서 먼저 제안한 용어를 정부가 받아들인 사례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명명하기가 잘못된 건지, 활용이 잘못된 건지 결국 ‘다문화’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돼 버리고 말았다. ‘multicultural(ism)’, 즉 ‘다문화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이다. 최근에는 한 사회나 국가뿐 아니라 기업 단위에서도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경쟁력 차원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다문화가정(가족)’의 전제 조건은 사실 ‘다문화사회’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개념인 ‘다문화사회’가 이뤄져야 ‘다문화가정(가족)’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빅카인즈에서 ‘다문화사회’를 검색해보면 고작 8,014건의 기사가 나오는데, ‘다문화가정’은 그 14배 가까운 111,416건이 나온다. ‘다문화가족’의 45,569건까지 더하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열린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토론과 논쟁 등 기초를 닦고 정서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보다, 복지지원책 같은 제도로서 다문화주의가 앞서가는 현실이 언론 기사에도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트렌드21 코퍼스를 보면 ‘다문화(가정/가족)’라는 언어가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언론이 ‘멱살 잡고 끌고 온’ 형국의 레토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문화’라는 단어의 공기어가 처음 등장한 2005년에는 ‘다문화’개념의 등장과 더불어 ‘주의(主義)’나 ‘사회’가 ‘다문화’와 함께 가장 많이 쓰인 단어였다면,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된 이후인 2013년에는‘가정’, ‘가족’이 ‘다문화’의 최상위 공기어로 올라섰다. ‘다문화=타문화=다문화가정(가족)=다문화2세’하는 식으로 인식의 패턴이 생기고 굳어진 것이다.
‘다문화주의’를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이나 계층의 언어를 적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가정)’란 레토릭의 당사자들인 ‘다문화가정’과 ‘다문화가정의 2세’들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문화라고 부르는 게 제일 싫어요”로 요약될 수 있겠다.
개설한 지 10년이 넘었고 2,000 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한 동남아국가 ‘다문화커플’들의 인터넷 카페에 오른 글과 그에 대한 댓글이다.
○○○: 다문화라는 게 뭘까?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화’와 혼동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중략)...다문화사회랑 다문화가족을 인정하는 사회는 완전 다른 개념이거든요...(중략)....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가 있는 거 자체가 이미 거부감이 있다는 의미이고 '다문화가정/가족'이라는 그룹으로 나눈다는 거 자체가 이미 ‘우리와는 달라’라고 싫어하게 하기 위한 것일 수는 있습니다.
○○○: 다문화가정 이란 용어 자체가 차별이란 말에 공감합니다. 자녀들이 가장 민감한 중학생이 되면 본인이 다문화가정이란 걸 숨기려구해요.
○○○: ‘장애우’라는 이상한 단어를 쓰자고 사회적으로 장려하다가 장애인들 스스로가 “’장애우’라는 단어가 뭔가 동정심을 유발해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며 거부반응을 일으킨 사례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호칭을 해야 할 때는 담백하게 ‘국제결혼가정’ 이라는 심플한 명칭으로 부르면 충분한데...
○○○: 몇 년 전에 저도 비슷한 글을 적었는데 어떤 분은 제 생각을 바꾸라고 어떤 분은 개의치 말고 그냥 살라고 하시더군요. 어쩌면 저는 다문화란 말에 개의치 않고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내 아이들과 내 배우자도 다문화란 말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외국 유수의 언론에서 찾아봐도 ‘multicutural’ 또는 ‘multicuturalism’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지, ‘다문화가정(multicutural family)’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하는 경우에도 한국식 ‘다문화가정’과는 개념적 접근이 다르다. 전문가들도 ‘다문화’대신 좀 더 명료한 명명하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국제결혼가정을 부를 때 ‘이민자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굳이 특정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다문화가정보다는 이민자가정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장한업 이대 불문과 및 다문화-상호문화협동과정 교수)
“두 가지 정도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다문화가족’ 대신 ‘국제결혼가족’ ‘이민자가족’ 같은 더 정확한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문화 개념을 제대로 쓰는 것이다.” (권숙인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나는 ‘국제결혼가정’이나 ‘이민자가족’ 같은 용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혼혈’이나 ‘튀기’는 명백한 차별표현이지만, 국제결혼가정이나 이민자가정도 차별표현인가? 국제결혼가정이나 이민자가족을 백안시하는 행위가 차별이지, 말이 차별을 부른 것이 아니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차별을 없앤 것이 아니라 차별을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나 가족을 ‘다문화’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은유인 동시에 다문화주의 자체를 왜곡한다. ‘다문화가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회가 다문화적인 사회가 되거나 다문화적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민자가정이나 국제결혼가정을 우리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포용할 때 다문화사회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다문화가정’이 많아도 그들에게 한국 사회 동화 교육을 강조한 나머지 그들이 한국 사람처럼 말하고 (한동안 새해면 공영방송에서 방송하던 외국인 (한국)노래자랑처럼) 행동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정책을 펼친다면 그것은 다문화사회가 아니라 단문화사회로 가는 길이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행정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때 퍼졌던 장애우란 레토릭 대신 이제는 대부분 장애인으로 쓰지만 누구도 비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잘 정착해가고 있는 것처럼, 정직하고 명료한 용어를 오랫동안 쓰는 게 정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빠른 길이다.
나는 다문화주의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에는 한참 역부족이고 지식과 경험도 짧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처럼 ‘다문화’라는 레토릭이 활용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쓰는 ‘다문화’는 분식(粉飾), 완곡, 불명료, 왜곡, 비보편적, 차별적 레토릭이다. 언론과 사회가 사용하는 ‘다문화학생’, ‘다문화자녀’, ‘다문화청소년’에 당사자들의 마음속엔 멍이 들어간다. ‘다문화’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