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과 글이란 과연 어떤 글일까? 우선 명료한 글이다. 말과 글은 일차적으로 나와 타자 간 정확한 소통이 목표다. 혼잣말이 아닌 이상 누구에겐가 말을 한다는 것을 내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고, 그러려면 일단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 인류의 클래식『수사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체의 미덕은 명료성에 있음을 분명히 하자”고 말했다. 특히, 전문가나 특정 집단이 아닌 시민대중을 상대하고, 육하원칙을 중요시하며, 중요한 사실부터 앞에 내세우는 역피라미드 문장 구조를 취할 정도로 내용의 빠른 파악과 즉각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언론이야말로 명료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명료하지 않은 레토릭이 여럿 눈에 띈다.
사실관계
언제부턴가 언론에 ‘사실관계’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사실’은 알겠는데 ‘사실관계’는 무엇일까?’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라는 말인지, 어떤 사실들의 뭉치를 말하는 건지, 단편적 사실이 아닌 맥락적 사실을 뜻하는 레토릭인지 아리송하다. 사실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저 ‘사실관계’란 말만으로는 사실들 사이에 친소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례를 보자.
해경청 소속 의경 특혜 의혹 제기…당국 "사실관계 확인 중"
해양경찰청에서 복무 중인 의경 중 일부가 특혜를 받고 일선 해경서에서 본청으로 배치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략)... 이와 관련해 해경청 의경관리계 관계자는 "철저한 검증 과정과 내부 위원 평가를 거쳐 본청 의경 인원을 선발하고 있다"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으나 논란이 된 부분은 있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2021.6.27. 연합뉴스)
‘특혜 자대 배치’라는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면 되는데, 취재원은 굳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하고 기자는 그대로 받아썼다. 주장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데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가지 사실들을 확인해봐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관련 사실(들)’이라고 쓰면 의미가 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저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인터뷰 내용 자체도 좀 이상하다.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논란이 된 부분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다니. 논란이 된 부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사실을 확인 중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송영길 "이재용 사면, 사실관계 다시 확인 후 입장 정리"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이나 가석방 여부와 관련해 "사실관계 체크가 미진했던 것 같은데 체크하고 다시 한번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송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코로나19 백신접종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부회장 사면 발언 관련) 착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수정하려고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송 대표는 이날 오전 당 대표 취임 한 달을 맞아 진행한 '민심경청 결과보고회'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사면은 대통령 권한"이라면서 "현재 상태로 보자면 이 부회장의 재판이 종료가 안 돼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법적 요건이 충족된 다음에 국민 정서를 청와대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 같다"고 했다. (2021.6.2. 머니투데이)
이 기사에 따르면, 송 대표는 본인 말대로라면 ‘착각’에 불과한 일을 “‘사실관계’ 체크가 미진”했다는 레토릭을 쓰면서 뭔가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파악해야 할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실은 이날 오전 송 대표의 발언 몇 시간 뒤 문 대통령이 4대 그룹 최고경영자와 오찬 회동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히자 송대표가 오후에 입장을 조정한 것이다. 정치적 고려를 한 것이든, 팩트체크가 충분하지 못했든 이를 “사실관계 체크가 미진”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두루뭉술한 -사실을 호도하는- 표현이다.
언론은 송대표가 “사실 확인이 부족했다”고 말했다고 쓰면 된다. (쌍따옴표가 마음에 걸린다면 빼버리면 된다) 그래야 독자들이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지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정치인이나 권력을 가진 쪽에서는 단순한 사실도 사실관계란 말로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할 때가 많다.
다음은 쿠팡 물류센터 화재 원인과 관련된 기사이다.
“화재 보고도 신고 늦은 이유”…노동자들의 증언은?
일용직 노동자들은 물류센터 안에 휴대전화를 가져갈 수 없어 각종 사건 사고가 나도 대처가 늦는다는 게 노조 측의 주장입니다. 청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곳곳에 먼지와 포장재 더미가 쌓여있어 화재 위험이 높다고 전했습니다. ... (중략) ... 실제로 이천 쿠팡 물류센터는 넉 달 전 소방 점검을 받았는데, 소화기 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비롯해, 무려 1백 가지가 넘는 지적 사항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쿠팡 측은 "작업 중 휴대전화를 보다가 사고가 날까 봐 전화 반입을 막은 것"이고, "청소 불량은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2021.6.18. MBC뉴스데스크)
대기업 비자금 수사도 아니고, 평소 청소가 제대로 됐는지 안됐는지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중에 업체에서 파악해서 답을 내놓는다면 그 답은 과연 사실일까, 사실관계일까.
‘사실관계’를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사물 사이의 사실상의 관계”라는 뜻으로 나와 있다. 역시 아리송하고 용례와도 차이가 있다. ‘[법률]’이란 말머리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법률 전문 용어이고, 법률가들이 소장이나 판결문 등에서 자주 사용하고, 이를 법조 기자들이 그대로 인용하면서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실’ 대신 ‘사실관계’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을까. 우선 1880년부터 1966년까지 98종의 신문 620만 건의 기사 아카이브를 구축한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 검색해봤다. 이 기간동안 ‘사실관계’라는 어휘를 쓴 기사는 고작 5건, 그것도 모두 법률과 직접적으로 관련됐거나 관보를 그대로 실은 형태다. 예를 들면 “청구의 원인된 사실관계”(請求의 原因된 事實關係, 황성신문, 1908.8.12.), “제1심재판소는 소송의 사실관계를 사소로 심문하기 불편하므로”(第壹審裁判所는 訴訟의 事實關係를 私訴로 審問하기 不便함으로, 대한매일신보, 1908.8.8.) 같은 식이다.
다음으로 최근 30년간 54개 매체의 기사를 수록한 국내 최대의 기사DB인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 검색을 통해 알아봤다.
2002년만 해도 연간 1,000건 미만의 기사에 쓰였던 ‘사실관계’가 2020년에는 14,000건에 육박해 무려 14배나 늘었다. 특히 2015년 이후에는 그래프가 매우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관계도 분석을 해보면 관련 기관으로 검찰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나 법조계, 특히 검찰이 이 단어의 진원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인기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씨 인사이드의 법학 갤러리에는 법률 관련 과제를 받은 듯한 네티즌이 “사실관계란 단어가 무슨 뜻이야?”란 제목으로 사실관계가 무슨 뜻인지 묻는 게시글이 있다. 일반인은 물론 법률 관련 수업을 듣는 학생 에게도 ‘사실관계’란 단어는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 어휘인 것이다.
지금 언론이 쓰고 있는 ‘사실관계’는 대부분 ‘사실’로 써도 무방하다. 게다가 앞에서 밝힌 대로 ‘사실관계’라는 레토릭 자체가 대중매체인 언론이 쓰기에는 해상도가 낮고, 독자보다는 취재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이다. 언론에서 ‘사실관계’란 어휘의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는 우리 사회의 대립과 분쟁을 최종적으로 조율하고 조정해야 할 정치권이 자신들의 고유 업무마저 검찰과 법원에 넘김으로써 정치의 사법화가 진행되고, 이에 영향을 받아 사회적으로도 사법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어느 집단이든 주로 쓰는 레토릭이 있고, 그 레토릭은 그 집단의 사고방식과 견해를 대변한다. 설사 법조계가 ‘사실관계’라는 용어를 남용하더라도 대중과 전문가 집단을 매개하는 언론은 더욱 명료하고 독자친화적인 단어로 고쳐 써야 한다. 학문의 세계나 전문 영역이 아닌 대중 뉴스매체에서 전문 용어나 지나치게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를 저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