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렌식
내가 ‘포렌식’이란 말을 처음 접한 때는 2006년이다. SBS스페셜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편을 제작하기 위해 당시 신월동에 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現 국립과학수사연구원)와 미국의 마이애미CSI를 취재하면서 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론에서 ‘포렌식’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빅카인즈 검색에 따르면 2000년~2006년까지 포렌식이란 단어를 쓴 기사가 모두 79건밖에 안되는데, 그중 80%도 전자신문이나 디지털타임스 같은 전문지였다.
당시만해도 일간지들은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포렌식’이란 단어를 쓸 때는 아래 기사처럼 풀어서 썼다.
檢, CSI수준 과학수사기법 준비
검찰은 혐의 입증을 위한 과학수사기법도 준비하고 있다. 필적 감정을 위해 1억원대의 첨단 종합문서 감정장비 ‘다큐센터’를 마련했다. 2008년에는 대검 ‘디지털 증거수집분석 센터’(디지털 포렌식 센터)를 만들 계획이다. (서울신문 2006.10.2.)
"사이버 범죄 이젠 안 통해"
포렌식(forensic)은 범죄수사에 사용되는 과학적 증거 수집 및 분석기법을 말하며 ‘디지털 포렌직’은 컴퓨터ㆍ인터넷 등 디지털 형태의 증거들을 수집ㆍ분석하는 기법이다. (한국일보 2006.3.1.)
이처럼 당시 언론에서는 ‘포렌식’이란 말 대신 ‘법의학’ 또는 ‘과학수사’란 말을 주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영문명은 NFS, 즉 National Forensic Service이다. 그러니까 ‘포렌식’이란 말은 요즘 언론에서 쓰이는 용례처럼 수사기관에서 피의자 휴대폰을 감식하는 것보다는 훨씬 큰 개념의 단어이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포렌식은 “1. 법의학적인, 범죄 과학 수사의 2. 법정의, 재판에 관한”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고, 옥스퍼드 사전은 포렌식을 형용사와 명사형으로서 '범죄조사에 적용하는 과학적 방법과 기술(의)'(Relating to or denoting the application of scientific methods and techniques to the investigation of crime)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포렌식은 한마디로, 쓰이는 맥락에 따라 법의학, 과학수사, 법증거분석작업, 법과학기법 또는 기술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일반인들에게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단어다. 지금도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에서 ‘포렌식’을 검색하면 ‘포렌식 뜻’ 또는 ‘포렌식이란’ 말이 자동완성 검색어의 첫 번째로 떠오른다. 그만큼 시민대중에게 포렌식이란 단어가 낯설고 명료하지 않다는 얘기다.
빅카인즈에 수록된 기사 중 2000년부터 2021년 7월 현재까지 ‘포렌식’이란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모두 21,568건. 그런데 그중 1/4이 2020년 한해에 쓰였을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물론 휴대폰 분석을 포함한 과학수사 기법 자체가 최근에 많이 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증가세는 자연스럽지만, 이 정도로 급증한 것은 취재원은 물론 언론이 무분별하게 이 레토릭을 사용하기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신의 꼬리 못 자르고…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 “종결”
경찰은 주요 강력사건에 버금가는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수사를 벌였다. 서초서 7개 강력팀 35명이 편성돼 한강공원 인근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고 목격자를 조사하는 등 A씨와 그의 가족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포렌식도 진행했다. (경향신문 2021.6.29.)
45일치 수신 통화내역 못봤는데..."이용구 외압 없었다" 결론
‘내·외부 부당한 사건 개입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는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포렌식에 의해 진행됐다. 진상조사단은 지난 4개월간 이 전 차관과 서초서장, 형사과장, 형사팀장, A경사 등 조사 대상자 91명의 통화내역 총 8000여 건을 분석하고 휴대전화 12대, PC 17대 등을 포렌식 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2021.6.10.)
‘포렌식’이라는 어휘가 들어간 기사는 2017년에 1,436건에서 2020년에 5,377건으로 거의 4천 건이 는 반면, ‘과학수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2019년 10,872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0년 6,836건으로 갑자기 크게 줄었다. 아마도 포렌식이 한국어로 풀어 쓴 유사한 번역어 –이를테면 ‘과학수사’-들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틴어 ‘포럼’(forum)에서 기원한 영어 단어 ‘포렌식(forensic)’은 미국 드라마 CSI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 개념이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전문가 집단의 언어, 일종의 에크리튀르이다. 영어권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존재했던 이 말을 그동안 한국 언론은 기사 내용에 따라 ‘법의학’, ‘법과학’, ‘과학수사’등으로 풀어 써 왔다. 그러다 그 개념이 디지털 분야에까지 확장되자 한국 언론은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거나 만들지 못하고 어느 순간 고민 자체를 놓아버렸다. 시민대중이 보는 기사에 “포렌식” 또는 “포렌식하다”라고 쓰는 것은 언론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성실하지 못한 결과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언론은 언어를 수단이자 목적으로 하는 레토릭의 전문가 집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정 전문가들이 쓰는 언어나 수사는 그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대중매체로서 언론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언어를 찾고, 만들며, 구사해야 한다. .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국가인지 아닌지 여부이다. 개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가 종속되고 따라서 사고가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을 급속히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개념을 번역해낼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 ‘사회’, ‘문화’, ‘경제’ 등 지금까지 동아시아 삼국에서 쓰는 개념어가 탄생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일본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교토대의 야마기와 주이치 총장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어로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독자적인 용어에 의해 생각하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토대의 중점 연구 분야 중 하나인 ‘물성물리학’을 예로 들며 “‘물성(物性)’이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물체의 질적인 속성을 생각하는 물리학인데 이 명칭의 학문은 일본 외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2016.12.2. 동아일보)
개념 자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개념’이란 말 같은 번역어라도 만들어내야 하는데, 한국의 전문가 집단이나 언론이 그조차도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저널리즘적으로는 독자나 시청자 같은 소통 대상을 소외시키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문제가 있고, 수사학적으로 보면 마땅히 확보해야 할 ‘명료성’은 커녕 아예 불명료하다고조차 말하기 어려운 생소한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레토릭은 개연성의 학문이라 논쟁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포렌식’이라고 하면 토론의 여지조차 닫아버리게 된다. 국가기관에서 “이게 포렌식한 결과입니다”라고 하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왠지 꼼짝 못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만 같은 단어이다. 수사기관이나 언론에서 쓴 ‘포렌식’이란 말은 그 말의 즉각적 이해 불가능성만큼이나 자신의 과학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스크린도어’란 말을 ‘안전문’으로 바꾸자는 운동을 펼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공공 언어를 바로 잡는 일을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 날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구속되었을 때 감옥에서 나와 한방을 썼던 잡범들. 배운 것 없어 어려운 말 앞에 주눅이 들고 자기변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언어문제가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의 보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곰곰이 짚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언어는 인권이라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중략)...시민이 공론을 만들어가는 공간인 공론장의 언어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 민주적 토론을 북돋울 시민적 예의가 깃든 말 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