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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적 진실'은 진실보다 더 진실한가

실체적 진실의 진실

by Editor M
실체적 진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을 사용했을 때 문체는 명료해진다”고 하였다. 또 “자연스러운 것은 설득력이 있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설득력이 없는데, 청중은 연설가가 어떻게든 술수를 써서 물 섞인 술을 자기에게 주려 한다고 생각하면서 잔뜩 의구심을 품은 채로 연설을 듣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평소 ‘사실관계’라고 거의 말하지 않듯이, ‘실체적 진실’이라고도 잘 말하지 않는다. 두 레토릭은 비슷하게 모호하다. ‘실체적 진실’의 실체가 있다면 원래부터 이 어휘가 광범위하게 쓰였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법조계에서 이 말을 많이 안 쓴 것인지, 아니면 언론이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실체적 진실’이란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빅카인즈에서 검색해보면 언론 기사에 등장한 ‘실체적 진실’이란 레토릭은 1990년부터 2011년까지 22년 동안 연평균 444건이었는데, 2012년부터는 매년 1,000건을 넘기 시작하더니 2018년부터 2020년까지는 3년 연속 해마다 2,000건을 넘었고 2020년에는 3,000건에 육박했다. 최근 9년 동안만 보면 연평균 1,695건으로 그 전 22년간 수치보다 4배나 뛰어올랐다. 언론에서는 ‘실체적 진실’을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쓰고 있을까.


‘구미 여아 사망’ 친모 기소…추가 혐의 입증 못 해

숨진 아이가 발견된 지 50여 일 만에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면서 앞으로 재판을 통해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전망입니다. (2021.4.5. KBS뉴스7)


이 재판은 형사재판이다.(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질 전망”이라고 해도 일반 독자나 시청자가 듣기에 아무런 의미상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잡음 없이 선명하게 들린다.


“일장기 말소사건 보도 이길용 기자는 마산 아닌 인천 출신이었다”

이 기자에 대한 기존 연구물로 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출간한 ‘일장기 말소 의거기자 이길용’이 단행본으로 유일하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 의미 등을 짚어보는 논문은 상당수에 달한다. (2021.4.28. 동아일보)


마찬가지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체적 진실’이라고 하면 뭔가 더 진실 같아 보이고, 진실을 넘어서는 진짜 진실 같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반대다. 인플레이션이 오면 화폐가치는 떨어진다. 요즘은 언어에 거품이 많이 낀 시대다. ‘실체적 진실’이란 레토릭이 많이 쓰일수록 ‘진실’의 수사학적 가치는 떨어진다. ‘진실’에 불신이 싹튼다. 일부 인터넷 언론들이 자극적인 제목 달기 경쟁을 벌이면서 언론 레토릭의 본디값이 떨어져 점점 과격하고 말초적인 레토릭을 동원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제추행 해놓고…신고한 피해자 마구 때린 50대 징역 1년

재판부는 “보복 목적의 범행은 형사사건에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저해하고 국가의 사법 기능을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며 “더욱이 누범 기간에 범행해 책임이 무겁다”고 판시했다. (2021.6.18. 동아일보)


우선, 판결문에 나온 한자 개념어의 나열을 언론이 직접 인용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기사의 명료성은 떨어졌다. '보복 범행은 진실을 감추고 사법 기능을 해치는 중범죄'라고 썼다면 의미전달이 더 쉽고 분명했을 것이다. 취재원의 레토릭을 그대로 인용해서 대중에게 전달하는 게 좋을지, 간접 인용하는 게 좋을지 결정하는 것도 언론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번역도 직역이 좋을 때가 있고 의역이 좋을 때도 있다.


법조계가 ‘실체적 진실’이란 용어를 써온 데는 이유가 있을거라 짐작한다. 법률용어사전을 보면 원고와 피고 간에 어느 쪽이 정당한가만 가리면 되는 민사소송과 달리, 형사소송의 경우 “법원이 당사자의 주장, 사실의 부인 또는 제출한 증거에 구속되지 않고 사안의 진상을 규명하여 객관적 진실을 발견하려는 소송법상의 원리”를 ‘실체적 진실주의’(Prinzip der materiellen Wahrheit)라고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그러한 원리의 추구나 정신, 즉 ‘실체적 진실주의’는 있다 치더라도, 언론 레토릭으로서 ‘실체적 진실’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법조인들이 실체적 진실주의를 통해 획득하려는 목표도 그저 사실(들)이 아닐까. 결국 법률가들의 개념 세계에서 사용하는 ‘진실’의 내포적 의미와 언중이 사용하는 ‘진실’의 내포적 의미가 달라 수사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실체적 진실’은 언론이 시민대중을 상대로 그 의미를 학습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전문가 용어일까.




“정확성(precision)이란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 프레키데레(precidere, 자르다)이다.” 1965년 처음으로 출간돼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4번이나 개정판을 낸 수사학 교과서 『한 권으로 배우는 수사학』(Classical Rhetoric for the modern student)은 "정확한 단어는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개념들을 모두 잘라낸 단어, 우리가 말하려는 바를 넘지도 않고 못 미치지도 않는 단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부정확하다고 규정한다.


1.우리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지 않는 단어들

2.우리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들

3.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되 우리의 의도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닌 단어들


법조인은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길은 어렵고 힘든 길이다.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하는 과정으로의 진실이나, 객관적으로 확보한 사실을 법률 교과서나 법조문에서는 ‘실체적 진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대중에게까지 똑같은 레토릭로 특별하게 포장될 이유는 없다. 법률전문가가 아닌 대부분 사람에게 진실은 언제나 진실 하나로 족하다. 언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외롭지만 꿋꿋하게 홀로 서 있는 ‘진실’이란 단어의 ‘실체적 무게’를 언론이 가볍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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